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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카네기 성공대화론 ㅣ 데일 카네기 성공학 (미래지식)
데일 카네기 지음, 이은정 옮김 / 미래지식 / 2021년 11월
평점 :
특히나 데일 카네기 자신이 생전에 유려한 연설가이자 강연자였고 소통의 대가였기 때문에 이 책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독자의 각별한 관심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꼭 능란한 화술로 상대의 감탄을 부르게 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고 내심으로부터의 설복을 끌어내는,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감화까지를 목표로 삼는 보다 고차원적인 방법론인 듯합니다. 대인 관계에서 있어 군자의 마음가짐과 인화를 강조했던 동아시아적 가치와도 통하는데 이런 걸 보면 사람 사는 이치는 동과 서, 고(古)와 금(今)이 다를 바가 없는 듯도 합니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그저 지금 자신이 상대에게 전달하려는 바에만 집중해도 충분한 것을, 이러다가 혹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잊지 않을까, 상대가 오해를 하지 않을까, 갑자기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등등 뭔가 부정적인 상상(p43)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저자는 특히 "지나친 무대 공포증을 당신 스스로 만들어내지 말라"고도 합니다. 어느 정도의 긴장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너무 잘해야겠다, 완벽을 기한다 등의 강박이 자체 좌절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가 많지는 않으나 있기는 있습니다. 현장에서 사람들을 많이 겪고 또 지도하기까지 해 본 저자 같은 전문가라야 이런 세심한 코칭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청중이 공감하게, 열렬하게 말하라(p60)" 얼마전 어느 정치인이 약간은 갈라지고 째지는 목소리로 연설하는 걸 들었는데 여튼 그 정치인이 청중의 관심사를 정확히 짚기는 했는지 대단한 호응이 나오기는 하더군요. 데일 카네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화제에 자신이 흥분할 게 아니라 그 흥분을 청중에게도 전달하려는 열의가 있어야 한다." 또 "탁월한 연설가를 보면 어느 정도 복음 전도사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고도 합니다. 약간은 신들린 기질 비슷한 게 있어서 청중과 자신을 함께 파르르 떨게 하는 enthusiasm 같은 게 필요하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이건 정말 쉬운 경지가 아닐 듯도 합니다만 그래도 주위에 보면 사소한 소재로도 주위의 공감을 잘 끌어내는 이들이 있고 일종의 genius입니다. 교육수준이나 지능과도 원칙적으로는 무관해 보입니다.
데일 카네기는 커리어를 통틀어 많은 이들과 소통했고 지도했고 일종의 "치료"도 했으며 적절한 처방을 제시했습니다. p91에는 다소 재미있어 보이기까지 한 일화가 나오는데 여건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 어느 보험회사 영업사원에게 데일 카네기 본인이 "비둘기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라"고 무신경하게(!) 조언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카네기는 무심결에 생각한 대로 이 "비둘기"라는 주제를 그에게 꺼낸 건데, 의외로 이 영업사원은 비둘기에 대한 책 40권을 읽고 데일 카네기가 무엇을 그에게 처방하려고 했는지 성의 있게 알아내려 했던 거죠. 일종의 위약 효과라고 할까, 그는 카네기가 의도한 바를 훨씬 넘어 열중과 천착의 대상을 찾아 집중하던 중 자신이 그간 무엇이 부족했는지 (카네기도 모르는 사이에) 답을 찾아 성공의 길 입구를 스스로 마련했다고나 하겠습니다. 비둘기가 대체 그의 영업 스킬에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무성의하게 막 던진 일종의 가짜 화두였으나 그의 믿음(?)이 결국 그를 살린 것입니다. 혹 비둘기 아니라 비둘기 똥이었다고 해도 그의 진지함과 열정이 결국은 좋은 효과를 내었을 거고요.
"허세를 부리지 말라. 이는 모든 청중을 삽시간에 당신의 적으로 만드는(p108) 특효를 낸다. 반면 구태여 비굴할 필요까지야 없으나 겸손, 겸허의 자세는 호감과 존경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 강연과 연설의 대가였던 데일 카네기의 입에서 과연 나올 법한 말입니다.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고 허풍과 과시를 일삼는 자를 싫어하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래서인지 p109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인용됩니다. "미국의 방송계는 버텨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가 드는 모범적인 예는 당대 미국의 방송인 에드 설리번(1901~74)인데 우리 한국이라면 유재석 같은 이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추상적인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데일 카네기는 "사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말을 시작하라(p123)"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데일 카네기의 자계서는 두루뭉술하고 현학적인, 혹은 뼈대만 앙상한 교훈으로 채워지지 않고, 언제나 누구누구가 이런 삶을 살고 이런 식으로 상황에 대처했다는 식의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언제 어디서 산 사람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그 이야기가 구체적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실제 삶에 참고로 삼을 만하겠다며 청중과 독자들이 대뜸 관심을 갖는 거겠죠.
소통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청중의 집중력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이런 판에 이런저런 두서없는 이야기를 산으로 바다로 진로를 바꾸면서 장황히 늘어놓아 봤자 누가 관심을 갖겠습니까. 데일 카네기는 그럴 바에 "한 가지 주제만 잡아서 집중적으로 파고들어라(p135)"고 말합니다. 일화에서 소개되는, 사무실의 하잘것없는 일에까지 일일이 꼬투리를 잡는 존스 사장님처럼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합니다. 사장은 사장답게 사장이 할 일에만 집중하면 충분하고 또 그래야만 직원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지난시대 미국의 위인은 대개 유려하고 박식한 문필을 구사하는 능력이 필수 요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편안한 구어(口語)를 잘 써서 대중을 사로잡는 이들도 있었는데 데일 카네기는 이런 쪽의 대가로서 링컨과 우드로 윌슨 두 대통령(p148)을 꼽습니다. 구어를 잘 구사하여 최고의 직위에까지 올랐다는 건 그만큼 대중과 잘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현대에서는 최우선순위에 놓인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네 말의 의미를 새총으로 (대충) 맞히지 마라. 꼭 해야 할 말은 권총으로 정확히 적중시켜야 한다." 명언이죠.
이 책은 완역본답게, 본문에 역자 주석을 달아 간혹 그 의미가 명확지 않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독자를 분명히 일깨우기도 합니다. 영어에서 grasp, 혹은 clutch 같은 동사는 일차 의미가 "움켜쥐다"인데, p172 같은 곳에서 저자는 이를 "파악하다", "마음을 사로잡다" 등의 뜻으로 쓴다고 역자는 친절히 알려 줍니다. 아마 clutch라는 단어는 스포츠에서 쓰기 때문에 한국 독자들도 그 첫번째 뜻만은 알 것 같습니다.
또 저자는 현장에서 바로 떠올려 이야기하는 주제가 청중을 매혹시킨다고 좋은 힌트 하나를 알려 주네요. 아무래도 저자가 강연의 달인이다 보니 이런 재치 있는 테크닉을 당대에 잘 구사했을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즉석 연설이라고 해도 즉석에서 하지는 말라"고도 합니다. ㅎㅎ 저도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바와 살짝 모순이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저자도 아니나다를까 그 언급을 합니다. 그러나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화제 자체는 즉석에서 떠올려서 청중을 지루하지 않게 할망정, 연설의 내용만큼은 마치 사전에 원고를 준비나 한 듯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으로 승부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평소에 깊은 사고를 하여 해당 주제가 무엇이 되든 그에 대해 피상적이지 않은 분석이 나올 정도가 되어야 하며, 또 어떤 영역에서건 조리가 선 발언이 나오게 사고의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평소 실력이 탄탄하게 갖춰져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의 사역을 할 때 비유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연설자는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면 안 되고, 혹 구체적인 사례를 들기 어려울 때에는 청중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p226)를 쓰는 게 효과적이라고 데일 카네기는 말합니다. 여기서도 데일 카네기 본인이 언제나 존경해 마지 않았던 링컨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는 줄타기 곡예사 블롱댕의 비유를 드는데, 남북 전쟁이라는 험난한 난국을 헤치고 나아갸는 정부를 향해 국민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촉구하는 연설에서 이런 멋진 비유를 든 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적시적소에 나오려면 그만큼 많은 독서를 통해 적확한 연결을 짓는 지적 훈련이 선행되어야 하겠지요.
"요점을 요약하고, 행동을 촉구하라." 먼저 요지가 잘 정리되어야 청중은 그 긴 시간 동안 자신들이 무엇을 들었으며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는지 마지막에 다시 유념할 수 있습니다. 또 결국은 나 자신의 일상 속에서 행동상의 변화가 실천되어야만 이 모든 감흥과 각성이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괜한 양해를 구하며 겸손을 가장하지 말라고도 합니다. 청중은 언제나 연사가 잘 준비된 사람이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성실성, 열의, 진정성, 명료함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공감능력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