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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에릭 재거 지음, 김상훈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평점 :
얼마 전에 영화로 개봉된 <라스트 듀얼>의 원작 도서입니다. 나무위키 같은 데를 보면 이 책을 "원작 소설"이라 소개하는데 에릭 재거 교수가 쓴 이 책은 논픽션입니다. 원작이기는 하나 원작 "소설"은 아니라는 점에서 수정될 필요가 있죠. 논픽션도 소설적 재미를 첨가하거나 작가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사하여 독자를 자극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도 않고 철저히 논픽션 본령의 경지를 추구합니다.
감독 리들리 스콧은 이미 십여년 전 <킹덤 오브 헤븐>이란 대작 속에서 수준 높은 고증, 품격 있는 세계관 등을 잘 녹여낸 시대물을 관객에게 선사한 바 있습니다. 저는 아직 <라스트 듀얼> 영화판을 보지는 못했는데, 시대는 저 대작과 비슷한 구간입니다. 이 책이 워낙 깐깐하게 학문적 근거를 철저히 의존하면서 저술된책이라서, 논픽션 읽는 보람, 혹은 헤비 역덕들에게 진실을 추적하는 재미는 확실히 있습니다만 극적 흥미가 두드러져야 할 역사 소재 영화에서 과연 얼마나 재미있게 구현되었는지는 잘 상상이 안 갑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엇이 되었든 간에 책 원작을 언제나 먼저 읽고 영화를 본다는 주의이지만 이 책만큼은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의문이 생기는 바가 있으면 책을 참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래 백년전쟁하고 십자군이 많이 겹칩니다. 왕이 기사, 영주들을 몰락시켜 가며 서서히 nation을 만들어가는 큰 과정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보통 십자군을 현지 이슬람 세력에 대한 부당한 군사적 침공으로만 간주하고, 또 이와 관련 얼마 전에 교황청이 사과도 했습니다만 사실 이것은 십자군 캠페인에 대한 다소 협소한 관점의 반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읽어 보면 중세 봉건제의 고전적 틀이 시대 변화에 따라 어떻게 스스로, 혹은 외생변수에 따라 기반을 무너뜨려 가는지 (저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독자가 실감나게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본래 의도는 "한 여인과 여러 영지를 둘러싼 두 귀족 가문의 오랜 반목과 투쟁사의 분석"이지만, 이 상세하다못해 때로는 중언부언되는 듯한 서술 속에는 봉건제의 황혼이 다른 외양을 쓴 채 장엄하거나 종종 난감할 만큼 추악하게 묘사됩니다. 이 논픽션 속에서 싸워 대는 두 가문의 수장은, 마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대 기업의 turf를 빼앗기 위해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이고 때로는 정계와 관계 유력자를 구워삶는 반칙을 일삼는 행태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 중세를 배경으로 삼은 여러 전형적 문학은 거의 접할 길이 없습니다. 인기가 떨어지니 시장성이 없어서 출판사가 찍어내질 않기 때문이며 이걸 현대 독자들이 읽어 내게끔 잘 손질할 인력도 부족하고 연구도 미진합니다. 반면 저들 구닥다리 문학을 풍자하려는 의도로 나온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정작 원 풍자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르면서 열렬히 읽습니다. 원작은 실종된 채 패러디만 남았으니 그 패러디의 가치와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없으면서 명작이라 칭송하는 건 어찌보면 난센스입니다. 아마도 그 빈 자리를 이런 역사 재구성-복원 목적의 논픽션이 채워 줄 것 같습니다.
저는 얼마 전 요나스 요나손의 해학 소설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를 읽었습니다. 그 소설의 서두와 이 논픽션의 도입부가 참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사실은 요나스 요나손이 이런 유의 논픽션을 자신의 소설에서 차용, 패러디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실감을 증강하기 위해 인물들의 족보를 길게 서술하는 형식이 그렇다는 겁니다. 저자인 에릭 재거 교수는 이런 논픽션의 서술 정석에 아주 충실히 맞춰 책을 써 나갔으며, 아마 이런 형식이 덜 익숙한 독자로서는 다소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파편적 기록을 효율적으로 취합하여 이런 꼼꼼한 크로니클을 재구성해 낸 업적은 역사 애호가들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내 발품을 대신 팔아서 궁금증을 해결해 준 장인 정신의 산물입니다.
하... 중세 기사도의 정수는 여성, 존중받고 숭배 받아야 마땅한 어느 고아한 여성 그 미덕과 신분과 품행에의 현창입니다. 반면, 속이 시커먼 악당들은 오히려 이런 미덕을 질시하고 누명을 씌워 사회적 평판 하락을 도모합니다. 이때 이 lady를 옹호하는 자를 챔피언이라 하며 그에 도전하는 적수를 챌린저라고 부르는데 이게 현대에 들어 숙녀는 사라지고 챔피언의 명예, 그를 화체한 벨트가 숙녀의 자리에 대신 놓여 복싱 등 일대일 격투기 스포츠에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우스운 건 이 결투라는 게 신의 의사가 반영된다고 보아, 챔피언이 이기면 그 숙녀의 결백이 증명되었다고 보아 일종의 무죄 판결을 갈음하며, 반대로 도전자가 이기면 그녀의 유죄 입증이 된 걸로 보았습니다. 참 원시적이고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기사도 문화와 이를 기록, 미화한 중세 문학에서는 이 과정이 더없이 아름답고 숭고한 낭만의 결정체로 여겨졌습니다.
그 모든 가식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탐욕스러운 귀족들에게 사실 여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논픽션에서도 겉으로는 르그리 가문과 카루주 가문의, 특히 장 4세 카루주 측의 여주인 그 명예를 놓고 싸우는, 사내들의 엄청난 결단과 용기의 표출인 듯 보이지만, 그 실질은 재산 싸움입니다. 종기사 레벨에서도 소출이 높은 알짜 땅을 놓고 이처럼이나 치열한 경쟁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종래의 우정이나 연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상위 귀족인 백작이나 왕 등도 그저 책략과 친분에 의해 부동산의 귀속을 결정할 뿐 민사적 정의나 합리성에 대한 판결은 흔적도 없습니다. 결혼 역시 전적으로 가문의 실리만을 염두에 둔 철저한 정략의 산물이니 외도와 불륜과 사생아 출산이 난무하며, 재산을 상속할 적자들 사이에 나눠줄 몫의 확보가 바로 이런 추잡한 재산 다툼의 근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의 약탈 원정 그 근원적 동기도 결국 이처럼, 한사 상속에 따른 재산 감소와 차자 이하의 몫을 찾기 위한 필사적 몸부림 아니었겠습니까? 땅은 본질적으로 증가시키는 게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마지막 결투라 하면, 당사자 사이에 그저 생사를 판가름하는 더 이상의 이벤트가 없다는 비장한 각오, 평가가 담긴 말이지만, 사실 죽고 죽이는 결투로는 체제와 사회가 지속될 수 없다는 반어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모든 싸움은 그 자체로 야만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