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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평점 :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금 이 책은 그의 모든 저작들이 그 본문 중에서 일일이 참조하는 레퍼런스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읽어도 재미있고 유익한 지식의 보고죠. 초판이 나왔을 때는 이렇게 두껍진 않았는데 이제는 하루이틀 독서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분량이 많고 깊이있어졌습니다. 이 책을 제목대로 "백과사전"으로 읽어도 좋지만, 베르베르의 문학세계 압권이기도 한 만큼 책을 요리조리 뜯어보면 독자 나름대로 문학 해석론 하나가 머리에 절로 그려질 정도가 됩니다.
특정 작품만을 꼽을 게 아니라 최근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두 작품에서도 그렇고 베르베르의 작품에는 세계사적 사건이 자주 언급되는 편입니다. 여기에 항목으로 게시된 사건들의 설명은 작품 본문에도 비교적 상세한 편인데, 이 책은 아예 레퍼런스로 작정하고 만들어진 책이니까 더 자세하죠.
이 개정판은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히듯이 이전판과는 항목 순서를 좀 달리 배치했습니다. 이전판보다는 개별 작품에 언급된 연관성으로 더 항목들을 가까이 묶어 놨고, 그래서 백과사전 성격보다는 개별 작품 해설의 성격이 더 강해지지 않았나 하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반 독자 입장에서야 그냥 백과사전으로 읽어도 좋을 만큼 절대적(?)인 내용 정확성은 여전히 높으며, 상대적(?) 성격은 그저 재미를 더하는 정도입니다. 너무 상대적 요소가 덜하면 우리 독자들이 베르베르의 글을 읽는 특유의 끌림이 덜하겠죠.
독자에 따라서는 순서가 더 백과사전 같았던 이전 판이 편제면에서 더 그리워질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갈래사전과 작품 사전 그 중간쯤으로 위치를 이동한 듯도 합니다. 다만, 다만, 두께와 내용 보강 면에서는 (당연한 소리지만) 이 최신판을 이전판이 도무지 대체할 수 없습니다.
서양 역사에는 별 괴짜 같은 사람들이 다 등장하여 희한한 소리를 학문의 탈을 쓰고 늘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석학 故 움베르토 에코의 저작 중에 자주 등장하죠. 그런데 간혹은 현재까지 그 성과가 자주 언급되며 해당 학문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되는 사람 중에도 기괴한 설을 푸는(풀었던)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p124의 파라켈수스 같은 이가 대표적인데, 출간 당시 큰 인기를 끌었고 저도 오래 전에 독후감을 남겼던 <제3인류>에서도 언급되었고 (아마도) 베르베르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사람이죠.
모세는 특정 작품을 가릴 게 아니라 베르베르의 거의 모든 작품에 지나가듯이라도 한 번 정도는 언급이 되는 위인이죠? 우리는 기독교 신자 아니고서는 큰 관심도 없지만, 서양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예속 상태를 끊어내고 고난과 선택의 연속이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을 자유로 민중을 이끈 영웅"으로, 종교 떠나서 널리 높이 평가되는 사람입니다. 이 부분 베르베르의 설명은 꽤나 건조하게 팩트 위주로 진행되며 따라서 "절대적" 성격이 강합니다. 물론 읽기에 유익하지만 작가만의 "상대성"이 좀 발휘되었더라면 아쉬움이 여전히 이 개정판에서도 남습니다.
p223에는 네로가 등장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번안가요 <검은 고양이 네로>를 떠올릴 수 있는데 노래 속의 네로는 "네그로"가 변천된 형태로서 그저 검다는 뜻입니다. 반면 고대 로마에서 저 황제의 이름에 쓰인 단어 "네로(당연히 라틴어이겠죠)"는 사내답다는 뜻이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네로의 악행에 대해 가장 실감나게 설명한 출전은 문학 중에서는 시옌키비치의 <쿠오 바디스>였고, 논픽션 중에서는 콜린 윌슨(<아웃사이더>의 저자)의 <잔혹(원제는 [세계 범죄의 역사])>이었습니다. 짧지만 베르베르의 이 버전도 무척 풍자적이고 강렬합니다.

p174에는 아즈테카인들이 상상한 종말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 역시 내용이 보강된 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최신작들에서 자주 이 사항이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네 번의 태양기를 거치며 파멸과 생성을 거듭했는데, 그리스 신화와도 유사하고 종말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유대 설화(나아가 기독교관)과도 닮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베르베르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과정이 미래에 반복될 수 있다"는 겁니다. 반복의 본성은 동아시아 여러 문명의 세계관에서 언제나 염두에 두는 것이죠. 정말로 북미 원주민들이 시베리아에서 합류하여 베링 해협을 건너간 이들의 후예라면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p387에는 군신 아레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베르베르는 본문이 아니라 각주 안에서 아레스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 설명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취향과 관점에 의해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타 문헌의 단순 인용에 불과한 건 이리 처리하는 듯합니다. 여기서도 "남자다움"이라는 뜻이 환기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아니 신인데요. 마치 <수호전>의 흑선풍 이규라든가 벽초판 임꺽정에서 곽오주 같은 게 생각나곤 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요즘은 한국의 이런저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일상적으로 논의될 만큼 대중화된 토픽입니다. p468에는 다소 짧은 분량으로 설명되는데 베르베르만의 통찰이 궁금한 독자로서는 예전판이나 지금이나 다소 아쉬운 부분이죠. 그런데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고 있는 건 오로지 고양이뿐이다." 그렇긴 할까요? 고양이가 자신이 산 줄(혹은 죽은 줄)아는 것과 "절대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라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어찌보면 이야말로 지식의 상대성과 절대성을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이 될 듯도 한데요.
바로 다음 페이지에는 "관점"이라는 짧은 우화를 베르베르가 소개합니다. 마치 예전 책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 같은 책에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이 책에서 직접 읽어 보시고.... 살고 죽음의 판단 주체가 되려면 (이 이야기의 프레임을 빌리자면) 그걸 개구리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지, 아니면 사람의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야할지를 먼저 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정하는" 건 또 누구여야 할지.
"과연 누가 피해자들의 위대함을 이야기해줘야 할지(p408)." 그런데 중국사에서 이를테면 조송 초기에 사천(쓰촨)에서 대거 학살이 이뤄진 탓에 오늘날 그 지방에 사는 이들은 사천 원주민의 특성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중원인들의 개성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서하인들도 몽골에 의해 절멸되었죠. 오늘날 동아시아인들이 기억하는 건 위대한 중화문명의 면면한 역사뿐이지 소수자로서 기록말살형까지 당한 숱한 그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습니다. 어떤 논자는 그 와중에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한 한국인들은 그 생존 자체가 기적이라고도 하는데 그래서 중국이 한국을 못 잡아먹어서 저리 이를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 소르망은 예전에 한국이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도 했죠(뭔지는 직접 찾아보시길). 아 참 그래도 서양 문명이나 서반구 역사는 베르베르 같은 동정심 깊은 옹호자, 기록자가 있어서 우리에게 이렇게 패자의 사연을 전해라도 주지 않습니까.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