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하는 글쓰기
탁정언 지음 / 메이트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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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에고를 달래며 안정적인 평화에 도달하는 건 꼭 수도자들만의 몫은 아니겠습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그런 마음 수련을 할 수 있겠는데, 이 책에서는 "글쓰기"와 명상을 결합해 우리 마음의 안정을 찾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에고를 알아차리기가 참으로 힘들다.... 에고를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글쓰기다(p63)." 또 이런 말씀도 있네요. "질문으로 글을 시작할 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은 (이) 질문하기가 분석하고 파헤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니, "질문 자체가 바로 우리 자신이 깨어 있게 하는 방법"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예전 프랑스 계몽철학자들도 "내가 무엇을 안단 말인가?"라고 자문했습니다. 저자의 방법론은 주로 동양적인 명상에 가깝다고 독자인 저는 판단했습니다만 이런 이치가 동과 서가 딱히 다를 이유가 없을 듯합니다. 


질문하는 자체가, 어떤 루틴이나 익숙한 느낌, 생각 패턴에 매몰되지 않고 에고를 콕 집어내는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게 저자의 말씀입니다. 확실히 "질문"은, 내게 익숙한 걸 그저 당연하다, 올바르다고 여기게 머물지 않고 "과연 그런가?"라며 한 번 정도는 의심을 품게 돕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대개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나라고 믿고 있지만, 생각과 감정은 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또한 무수히 자주 바뀐다는 걸 알 수 있다(p42)." 


저 문장,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뜻대로 뭐가 안 풀리거나 주변 사람들과 대판 싸우고 나면 미칠 듯이 화가 나기도 하고, 그 화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도 합니다. 아니면, 더 미숙한 반응으로 물건을 부순다거나... 그런데 이런 격한 단계라는 게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두어 시간, 혹은 하루 정도 지나고 나면 "내가 왜 그랬지?" 같은 후회와 자성 단계(p98)를 또 대부분은 거칩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소화나 호흡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뤄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소화불량을 일으키거나 거친 호흡이 일어난다고 그 역시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 난 이것밖에 숨을 못 쉬고, 소화를 능숙히 이루지 못하는 걸까?"라며 도덕적으로 자책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저 병원을 찾거나 간단한 제산제를 사서 복용할 뿐이죠. 


문제는 이처럼 내 자신의 일부라고 볼 수 없는 감정, 반응, 이런 게 진짜 나 자신을 지배하게 놔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치한 결과는, 우리가 어른이라면 여태 살면서 겪은 대로, 극심한 정신적 불안정, 괴로움, 공격(p99), 심지어 극단적 선택에의 충동 같은 걸 초래할 뿐입니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은 대개는 짧은 순간의 미칠 듯한 괴로움에 휘둘려 그런 선택까지 내몰리는 것입니다. 만약 그 혹은 그녀에게 조금만 더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아마도 다른 결정을 내리지 않았겠습니까? 


"나로부터 한 발짝 떨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p43)." (무의식이 아닌) 의식이 주인이 되는 이런 상태를 책에서는 "메타 코그니션"라 소개하며, 이는 요즘 많은 책들에서 독자에게 강조하는 메타인지 상태와 같은 말이겠습니다. 저자는 더 나아가, "글쓰기를 명상이라고 의식하기 시작하여, 에고가 하는 행위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하라(p55)"고 주문합니다. 바른 자세만 잡고 명상에 몰입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이처럼 글쓰기를 통해 명상을 행한다면 확실히 두 겹 세 겹의 성찰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사실 많은 이들에게 고통입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숙제로 내 준 독후감 써오기 같은 걸 떠올려 보십시오. 혹은 일기 쓰기라든가... 이만저만 고통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런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그저 글쓰기로 접할 게 아니라 명상의 방법으로 수행하라는 겁니다. 글을 쓰는 건 분명 나인데, 어느 순간 그렇게 글을 쓰는 나를 누가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p54). 이때의 희열은, 장거리 달리기를 하며 숨이 가쁘지만 그와 동시에 마약을 하는 듯 기쁨이 느껴지는 "러너스 하이"와 유사하다고도 합니다. 


자, 이렇게 해서 나의 그 변덕스러운 감정들, 부질없이 스쳐지나가는 생각, 이런 걸 한 걸음, 나아가 여러 걸음 떨어져서 보게 되면 어떤 장점이 있을까요? 이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되면(p99)" "이상한 일이지만, 나에 대해 화를 내기보다 더 끄덕거려 주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말입니다. 이상합니다. 하지만 유익합니다. 실용적입니다. 어차피 결과는 달라질 것도 없는데 나를 괴롭히고 코너로 몰고 들들 볶을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보다는 (과정이 이상하지만) 나를 잘 달래는 게 훨씬 나은 결과를 낳습니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도 일종의 메타 코그니션이므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게 기특하지만, 더 파고들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상처 입은 나를 잘 달래는 게 우선이죠.


"평온한 행복감이 밀려와 나를 감싸 안았다. 우주와 하나가 된, 전지의 수준으로 도약한 것 같았다(p143)."이는 질 볼트 테일러 박사의 회고입니다. 그녀는 뇌출혈로 큰 상처를 입고 뇌의 일부 기능을 잃게 되었으나, 대신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경지 비슷한 것"을 체험한 거죠. 물론 그녀처럼 평화를 찾기 위해 머리를 다쳐야 할 이유까지는 전혀 없습니다. 이는 오로지 글쓰기를 통해, 명상을 통해, 끊임 없이 나의 빈틈을 파고들며 나를 괴롭히는 에고의 장난질을 캐치하여 잘 다스리기만 해도 된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런 글쓰기를 "알아차림 글쓰기(p185)"라고 저자는 명명합니다. 우리는 운전 같은 걸 하면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스스로를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넣습니까? 도로를 보면 꼭 남한테 피해를 끼치기 위한 게 하나의 목적인 양 운전을 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가 잘 아는 게, 그런 경우에조차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방어운전, 안전운전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상대할 가치가 없는 도발이야. 게다가, 저 사람을 이후 또 만날 것도 아니잖아?" 이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과정"을 겪고 나면 교통사고의 위험도 벌써 피했을 뿐 아니라 기분도 좋습니다. 꼭 보복운전을 해야 자존감이 생기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알아차림을 통해 우리는 벌써 두 가지의 이익, 그것도 아주 근본적 차원의 이익을 얻습니다. 


"선각자들은 우리가 용기, 자발성, 수용의 수준에서 부를 추구하면 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p248)." 심지어 돈 버는 활동에서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단히 "알아채며" 결정을 내리거나 정보를 살피면 좋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저 마음의 평화만 찾아도 인생의 고통 큰 부분을 극복하는 건데, 이런 부수적 이득까지 있다니, 오늘부터 명상, 아니 글쓰기를 당장 실행해 볼 일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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