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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다 - 카르멘 라포렛 탄생 100주년 기념판
카르멘 라포렛 지음, 김수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평점 :
배경은 스페인 내전 직후이니 꽤 오래 전이고 작가분도 근 백 년 전 사람이지만 적어도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심리, 드러내는 감정, 형제, 친족, 부모, 자녀 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와 소소한(때로는 심각한) 갈등 등은 한국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국 역시 이념의 좌우 대립 탓에 적잖은 갈등상을 겪었으며 어느 정도는 상황이 현재진행형이므로 더 공감되는 바가 큽니다.
소설 초반을 읽으며 저는 처음에 화자인 안드레아, 아직 나이가 젊고 거의 어린애같은 감성을 지님과 동시에 어른들 속을 몇 번은 들어갔다 나온 듯한 의뭉스러운 구석도 많은 여대생의 이름과, 이 집의 가정부인 안토니아 두 이름이 내내 헷갈렸는데 사실 지금도 헷갈립니다. 둘은 나이, 신분, 성격 등 모든 면에서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데 작가님이 왜 이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지금도 좀 원망스럽습니다. 이 점만 제외하면 소설은, 과연 고전은 고전이었구나 싶게, 어찌보면 평범한 가정과 평범한 주인공을 내세워 참 의미 깊은 장면 장면들을 만들어 내었으며, 두고두고 생각할 메시지를 던져도 줍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특히 한국 독자들이 읽어 보면 공감할 대목이 많습니다.

앞서 평범하다고 했지만, 아니 형제 중 하나는 공화파에 가담하고, 그 모친은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간직하며(그렇다면 좀 과장해서 반대 진영인 국민파에 한 발은 담갔다는 소립니다), 다른 형제는 반대 진영에 가담할 것을 농반진반으로 권유 받는 가정이 어떻게 평범한가, 또 그 겪는 일들을 보면? 이렇게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이 무렵 스페인의 어느 가정이 이런 이념 대립, 혹은 내전의 상흔으로부터 자유로웠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이 가정은 평범한 가정입니다.
또, 사실 다른 의미에서도 이 가정은 평범합니다. 로만 삼촌은 화자 안드레아와 어떤 끈적한 감정이나 가진 듯 처음에 묘사되지만 사실 초반부까지 진행을 봐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안드레아가 얼마나, 몇 겹의 속내를 지닌 능청스러운 처녀입니까. 늙은 삼촌이 아무리 다재다능하고 그 나름 매력적이라 해도 그를 향해 이 처녀가 그런 일차원적인 감정을 품지는 않습니다(윤리적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윤리 문제에 대해 혹 불편하게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이 상황, 즉 안드레아가 아직 이 집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었다는 "상황"을 자꾸 떠올리십시오. 또 나중에 새 인물 에나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리 오래 신경도 안 쓰입니다. 에나만 나오는 게 아니라 더 나중에는 하이메란 "늘씬한(안드레아의 표현)" 체격을 가진 녀석도 나타나서 안드레아 주변에 알짱거립니다.
로만이란 자는 꽤나 자기 중심적이고 나르시스트적인 면도 보이지만, 또 소문에 의하면 공화파에서 꽤 중요한 직분을 맡았다고도 하지만, 사실 전혀 거물도 아니고 그럴 만한 그릇도 못 됩니다. 척 보면 아는 거죠. 말하자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파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파샤는 나중에 그 진영에서 크게 출세하여 스텔리니코프 장군(으로 개명)이 되잖아요. 동생 후안더러 반대 진영에 가담하라고 권하는 걸 보십시오. 진지하고 심각한 각성을 거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사람은 어떤 시대 정신을 대변할 만한 사람이 전~~~혀 아닙니다. 후안은 그저 망나니(이런 집에 으레 한둘은 있기 마련)일 뿐이니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안드레아 저애가 얼마나 여우 같은지 알기나 해? 그저 연극이나 꾸며대면서 남들 무시하기나 하고, 그저 너랑 쿵짝쿵짝할 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애라고!"(p329)
와, 이런 걸 보면 딴 건 몰라도 후안이 사람 꿰뚫어보는 직관력만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래봤자 독자인 저한테는 못 미치죠. 전 초반부만 읽고도 안드레아의 사람됨을 다 알아봤거든요. 별 말도 안 하고 그저 할머니와 외숙모의 대화를 중계방송만 했는데도 말입니다.
안드레아와 이름이 비슷한 가정부는 소설 내내 적어도 안드레아의 시선에서는 "가정부"로만 불립니다. 안드레아는 심적으로 이 가정부와 제법 거리를 둔다는 소립니다. 그 할머니는 적어도 가정부를 이름으로 부르며, 또 심한 악평("짐승")을 할망정 적어도 어떤 감정상의 교차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가정부는 아마 "니네들은 나한테 죽어라 하고 일을 시켜라. 단 어느 선을 넘어들어오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같은, 하층민스러운 방어막을 치고 사는 일종의 전형입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완전히 그녀를 타자시하지 않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생의 한 구간에 그런 여자(계층)와 접점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반면 안드레아에게 가정부 안토니아는 완전히 타자입니다. 뭐 이 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독자인 저는 그리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눈여겨 봐야 할 인물이 바로 글로리아 이모죠. 로만에게는 형수가 되는... 저는 처음에 로만이 형이고 후안이 동생인 줄 알았는데 뭐 여튼요. 근데 이건 저의 명백한 실수였던 게... 도착하는 장면에서 이미 안드레아가 큰삼촌 작은삼촌으로 구별해서 부르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확인은 안 해 봤지만 김수진 역자가 독자들에게 성의를 보여 이렇게 일부러 번역한 거겠죠? 이래서 제가 또 문예출판사 책을 좋아합니다. 여튼 글로리아 이모는 글쎄 뒤에 보면 후안이 자기 마누라한테 만족한다는 대사가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아직 어른이 덜 된 사람입니다. 언젯적 일인데 시동생이 자신한테 관심이 있었다느니 뭐니 흉한 이야기를 한참 어린 조카한테 떠들고... 물론 현재의 삶이 불행하니 그나마 행복했던, 아니 행복을 꿈꿀 수나 있었던 처녀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이후 이야기는 스포라서 이 독후감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로만이 확실히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형제간 터울이 많이 나긴 합니다만) 매력은 있는가 봅니다. 이 독후감 앞에 언급한 그 인물과 기어이 일이 벌어지니 말입니다. 또 저분, 누구라고 이야기는 안하겠습니다만 또 기어이 누구하고 일을 저지릅니다. 이러니 이거 뭐 무슨 한국 아침 드라마의 스페인 고전판인가 하실 분도 있겠으나...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감동적입니다. 또 고전 소설답게 정격을 지키고 따라서 구성이 이지적입니다. 긴 말 하지 않겠으니 꼭 읽어들 보십시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