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언니, 못된 여자, 잘난 사람 - 글로리아 스타이넘, 삶과 사랑과 저항을 말하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서맨사 디온 베이커 그림, 노지양 옮김 / 학고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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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아예 적대적인 입장이라고 해도 이 책 저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이름 정도는 한 번쯤 들어 봤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치적 신념이 어느 편에 가깝건 간에, 그녀의 열정적인 활동, 기존의 어떤 교조적 측면에 기대지 않는 창의적인 사고, 구태의연한 클리셰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로 재소화하는 능력, 재치있고 예리한 시각과 그것을 표현하는 감각적인 문체는 확실히 어떤 종류의 재능을 그녀가 지닌 게 아닌가, 이 사람은 여튼 능력 있는 사람이다, 뭐 이런 결론에 (독자 중) 누구라도 이를 만합니다.


원 가족(=생물학적 가족, 타고난 가족)과 선택한 가족, 물론 이런 구분은 여성에게만 유효한 게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로 가능합니다. 장인 장모님, 처남, 처제 등은 다 선택한 가족인 배우자의 혈족들이죠. 여기에 대해 저자 스타이넘은 도러시 디너스틴의 견해를 인용(p28)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들 중에는, 가족이 아니었으면 결코 만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사람들도 있다. 생물학적 가족의 가장 중요한 점은, 나와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해 알고 귀히 여기고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페미니즘 하면 전통, 기존의 가치, 이런 걸 송두리째 뒤엎으려 드는 과격한 견해와 이를 극성스럽게 타인에게 강요하는 그 주장자 정도의 이미지를 자동으로 떠올리기도 합니다. 바로 이 책 저자 스타이넘도 그런 편견의 딱지가 붙어 다니는 사람 중 하나죠. 그러나 위 구절을 읽어 보십시오. (페미니즘이 아예 상극으로 싫어할 만한) 유교 경전이라든가, 아니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성 오거스틴 등의 경건한 책에 실릴 법한, 절제되고 관조된 통찰의 산물이 아닙니까. 어쩜 이처럼이나 성숙하고 사람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언술이 다 있을까, 순간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습니다. 


반면 "선택된 가족"의 개념에 대해 저자는 다소 넓게 잡습니다. 친구, 학교 둉창, 직장 동료, 연인, 파트너 등이라고 합니다(p30). 스타이넘이 이런 기초 개념에 대해 자신만의 고유한 쳬계로 무엇이라 규정하는지 독자인 제가 무지한 탓에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처가, 시가 식구분들은 (배우자라는 한 다리를 건너) 생물학적 가족의 범주에 속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우자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나 (배우자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내가 장인 장모님을 따로 선택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가족"에 대해서도 피붙이처럼 공경하고 사랑할 줄 아는 덕목, 품성이, 또한 인간이 존엄해지는 하나의 이유가 되겠죠. 


놀라운 건 이 가족의 개념에서 저자는 민주주의의 속성까지 새로 도출, 정의한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 넘어가는 과정이 매우 유려하고 설득력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이래서 여성은 정치적이(라야 한)다"라며 다시 페미니즘 본령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합니다. 전개되는 논리 구조가 아름답기까지 하며 이런 페미니즘이라면 보편 가치의 교육 일환으로 중고교 교과서에 실려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읽으면서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 대목 한번 꼭 읽어들 보십시오. 


"우리는 서로서로 필요하다. 설사 돈을 받지 않더라고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일이 있기를, 당신이 직접 선택한 가족인 친구가 있기를 바란다. 지역사회에 대한 나의 사랑은 사회 운동에서 나왔다.(p40)" 


이런 구절들을 볼 때 저자 스타이넘이 염두에 두는 "선택한 가족"은 배우자나 성 파트너 같은 것보다, 어떤 신념 등을 공유하는 동지에 더 가까운 성격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마치 프랑스 혁명 3대 정신 중 하나인 "박애"라든가, 아니면 "연대"를 떠올리게도 됩니다. 


"군비 축소의 유일한 방법은 우리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다(p41)" 뭐 이미 잘 알려진 슬로건이기도 한데, 이 챕터에서 저자는 mother라는 단어가 동사로 쓰이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대단히 시적이고 격정적인 표현을 이어서 내놓습니다. 이 책의 맥락과는 무관하지만 BBC 드라마 <셜록>에도 형 마이크로프트가 동생 셜록에게 "I'm mothering you."라며 코믹한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죠. 여튼 저기서도 mother은 동사로 쓰였습니다. 


"민주주의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p51)." 참 장엄한 선언입니다. 비단 페미니즘 관점(해석)이 아니라도 저 명제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고, 또 각자의 이유에서 그리해야만 합니다. 스타이넘은 여기에 자신의 주장을 다시 선명히하여 다음의 구절을 추가합니다. "민주주의의 시작은 내가 내 몸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자면 민주주의 안에 사는 여성이 그리 많지 않다." 하다못해, 지독한 속물이자 바람둥이이며 이중인격자인 존 게이지 같은 자도 다이애너 머피에게 "당신이 원하지 않는 건 하나도 하지 않겠다"고 수작을 겁니다(영화 <인디쓴트 프러포절>에서 로버트 레드포드와 데미 무어의 배역들). 여성이 스스로의 신체에 관한 모든 걸 결정할 수 있어야 참다운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초석이 놓입니다. "내가 나의 몸을 축복하면 몸도 나를 축복한다(p87)."


이 저자분도 어느새 운동가, 활동가 중에서 시니어가 되었습니다. 세월은 참 야속하고 무정하기도 하죠. "나는 그 친구들보다 노장이고 선배이며 이보다 나빴던 시절을 기억하기에 그들에게 희망과 낙관주의라는 선물을 줄 수 있다(p81)."


p97에서 저자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잠시 회상합니다. 활동가로서 저자는 페미니스트의 영역에만 머문 게 아니라 그 당시 미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인종 차별 이슈에도 깊이 관여하여 열정적인 활동을 폈습니다. 일상에서 주변에서 차별과 혐오는 자주 접하는 곤욕이자 시련이었습니다. 이때 저자는 간단한 몇 마디로 어설픈 가해자들을 퇴치했는데 이 역시 그녀만의 슬기와 지혜, 순발력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어떤 도그마나 교조적 교의에 사로잡혀 몇 마디를 주문처럼 암송한 채 활동가를 가장하는 엉터리하고는 크게 차이가 나죠.


"일반화하려고 하지 마라. 모든 백인 남성들이 다 똑같지는 않다(p114)."


p124에는 뮤지션인 나오미 저드와 그녀의 딸인 애슐리 저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애슐러 저드는 1990년대 후반 <더블 크라임>, <히트>, <퍼펙트 머더> 등 여러 화제작에 주연으로 나온 여배우이며 당차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잘 표현했었죠. 이 책에서처럼 "저드(Judd)"라는 표기, 발음이 맞고 그 당시 일부 통했던 "주드"는 틀린 것입니다. 


"말을 하는 동안에는 배우지 못한다. 듣는 동안 배운다.(p140)" 


이 책에는 이처럼, 페미니즘이나 특정 사조, 혹은 정치적 이념을 떠나 보편적 감동을 줄 만한 경구들이 도도히 흐릅니다. 


웃음이란 예컨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처럼 참된 인간 본성의 정수를 표현하는 방식이고, 불의에 저항하거나 신랄히 풍자하는 수단이며 그렇기에 어리석고 눈먼 광신자 호르헤는 (가상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편> 제2권을 그리도 경계했던 것입니다. 이 책 p169에서 저자는 "웃음은 곧 자유의 증거"라고까지 말합니다. 웃음의 부재가 곧 자유와 인간성의 부재, 박탈을 뜻한다고 역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여성 운동과 시민권 운동은 모두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p197)"


소통과 교감, 공감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기초적인 덕목이자 필수의 작용입니다. 모든 차별, 부조리, 비위, 폐습이란, 사실 계급장을 떼고 마음을 터놓으며 이야기하는 담론의 공간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자유는 전염성이 있(p205)"으며 서반구에서 진정한 평등이 구현될 때 인권이 압살되는 중인 지구의 반대편 어느 곳에서도 비로소 희망의 서광이 비칠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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