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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여중 구세주 ㅣ 특서 청소년문학 21
양호문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7월
평점 :
주인공은 중2 남혜진이며 현재는 20대 중후반이 되었을 만한 여성입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 후 작은고모네에 의탁해서 어렵게 살았는데,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 적응도 못 하고 딱 가출소녀가 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이란 정말 한순간의 기분, 분위기, 좋거나 나쁜 영향 등 그야말로 우연의 요소에 의해 정반대 방향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가출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그녀의 인생에 손을 뻗어 "구원해 준" 같은 학교 친구가 바로 구세주였습니다. 성이 구씨고 이름이 세주입니다.
주인공은 다소 내성적이며 여성치고도 완력이 그리 강하지 못합니다. 이런 혜진이를 고비마다 잡아 주고 도와 준, 정말로 좋은 친구가 세주입니다. 세주에게는 쌍둥이 남동생 세우가 있는데 이 소설에서는 살짝 암시만 되는 정도이지만 혜진이는 세우에게 조금 마음이 있는 듯도 합니다(p72, p127). 아직 한창 젊은 나이이므로 혹 속편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둘이 어떻게 잘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작품은 여성들끼리의 가슴 뭉클한 우정에 대해 포커스를 맞췄으므로 그런 곁가지는 없는 편이 과연 나았겠습니다.
겉돌던 혜진이에게 소속감을 마련해 준 고마운 친구 세주와의 우정이 중심이고, 4총사로 어울려다니던 나머지 둘 차인정, 함은하는 약간은 비중이 낮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은하, 인정, 주인공 혜진은 반드시 약속 장소에 나올 듯하지만 왠지 (타이틀 롤인) 구세주는 안 나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데, 무슨 일이 있나, 소설 막판에 어떤 큰 불행한 일(사고로 몸이 불편해졌다거나, 둘이 어떤 일 때문에 치명적으로 싸웠다거나)이 벌어지기라도 했을까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훈훈하게 돌아가니 마음 놓고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세주는 정말로 1인칭 화자 혜진이한테 구세주 노릇을 해 주는데, 앞서 말한 대로, 무서운 사회 선생에게 교과서를 준비 안 한 게 걸리면 무척 혼이 났을 테며,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위기였던 그녀에게 이런 일까지 벌어졌더라면 꼼짝없이 그녀는 가출소녀가 되었을 겁니다. 이 대목이 독자인 저에게는 평행우주의 갈림길처럼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구세주가 특별한 무슨 안목, 혜안이 있다거나, 남달리 똑똑하다거나 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갖는 순수한 호의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바뀐 것입니다. 청소년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우정의 가치, 기적으로도 보였습니다.

혜진이는 차남구함 4총사 중 가장 약한 멤버였던 탓에, 소설 중반부쯤에 오이소박이 패거리한테 걸려 큰 봉변을 당할 뻔합니다만 이때도 구세주가 때맞춰 나타나 구세주 노릇을 합니다. 차남구함 4총사가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을 보낼 무렵에는 광우병 쇠고기 파동이라든가 UFC의 론다 로우지(=라우지) 같은 스타가 나타나 인기를 끄는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략 십 년 전이죠. 광우병 파동은 어떤 정치적 메시지 같은 걸 전달하는 것 같지는 않고, 소설 속에서 그저 시대의 이정표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처럼 시끄러웠던 사건이 전혀 정치적 색채를 안 풍기게 한 데에서 이 소설의 담백하고 잔잔한 분위기가 더 잘 도드라지는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 또 중요한 인물은 "짱아찌" 할머니인데, 프롤로그에서 생선 냄새 나는 어느 수다스러운 아주머니하고 좀 겹치는 이미지입니다. 그 아주머니는 평생 사는 삶이 신산한 듯하지만, 나중에 드러나듯 "짱아찌" 할머니는 엄청난 재산가이기도 했으니 다르다면 다르네요. 할머니가 그 많은 재산으로 좋은 일 하시는 장면에서는 박수가 절로 나올 만하지만, 소설 속의 남성여중 학교 재단은 (작품 중에도 그런 서술이 있지만) 내부 문제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먼저 해결되고 나서 기부가 이뤄져도 이뤄졌으면 더 좋을 뻔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웃음이 나오는 대목은 어느 분의 칠순잔치에 이미테이션 가수 전남진씨가 공연 오는 장면입니다. 이미테이션이라고 해도 가창력은 다들 좋은데 이분은 그렇지 않아서 웬만하면 박수 쳐 주고 좋게 넘어갈 관객들한테 큰 조소를 받습니다(아무리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한들). 이 장면이 p85에 나오고 대타 격으로 무대에 오른 "걸그룹" 차남구함이 분위기를 휘어잡는데 웃음이 안 나올 수 없습니다. 한참 뒤인 p185에는 저 부분을 언급(allusion)하며 "누가 칠순 잔치를 하나?"라는 말이 나오는데, 앞에서 그 일화를 본 독자는 여기서 또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혜진이는 세주의 따뜻한 우정 덕분인지 마음에 여유를 찾고, 마을 전체가 큰 수해를 입은 그날밤 공장의 물품을 필사적으로 지켜냅니다. 혜진이가 그저 자기 자존심만 중히 여기는 애였으면 친구 세주를 부를 생각도 안 먹었을 건데(그랬으면 공장은 더 큰 피해를 입었겠죠), 그러지 않고 상황이 급할 때 무엇을 더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는지 마음을 바르게 먹은 아이라는 게 드러나죠. 이래서 혜진이는 복을 받아(?) 나중에 대학원도 다니고 더 알찬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닐까요? 프롤로그에서 생선 아주머니(?)가 외모에 대해 칭찬하는 걸 보면 미모도 잘 피어나게 성장한 것 같고 말입니다.
이 소설의 4총사보다는 더 늦은 나이에 해후하는 설정이지만 십대때 순수한 우정을 나누고 성인이 되어 재회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는 <나우 앤 덴>이 있습니다. 그 영화보다 자극적이거나 극적인 설정은 없지만, 마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잔잔하게 그 시대의 풍속도를 보여 주는 면에서 더 뭉클한 면이 있습니다. 결말이 해피엔딩인 점도 마음에 듭니다. (스포) 나중에 세주는 약속장소에 나타나는데, 특유의 그 활동적인 면을 잘 살려 부사관이 되어 있으며 여성인데도 UDT에 지원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힙니다.
에필로그에서 혜진이는 더 이상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데 이 대목은 화자가 유년시절의 미숙함과 완전히 결별하고 어른이 되는 걸 상징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처럼 유년기와 어떤 행복한 결별을 이뤄 내어야 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