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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탁월한 취향 - 홍예진 산문
홍예진 지음 / 책과이음 / 2021년 7월
평점 :
"비가 와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아니라, 비 오는 날이 좋은 거야." 비 오는 날마다 "아, 날씨 좋다!"며 탄식(?)하던 어느 선생님이 자신의 반응에 대해 붙인 설명이라고 합니다. 설명인 듯도 하고 새로운 문제를 낸 듯도 합니다. 만약 말의 순서가 바뀌어 "비 오는 날이 좋다는 게 아니라. 비가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거야."라고 하셨으면, 형식적으로는 여튼 설명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그분의 진의는 그게 아니겠지만).
싼 옷을 걸쳐도 옷 고르는 안목이 좋아서 주위의 선망을 사는 젊은 여성은 언제나 주변에 한 사람씩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패피"는 간단하지만 타고난 센스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기 때문에 부럽기도 하고, 누구한테건 유용한 충고를 해 줄 수 있으므로 집단 안에서 (혹 도시 출신이 아니거나, 심지어 고졸이라고 해도) 상위 랭크를 차지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석경의 <숲 속의 방>에 나온 소양은 홀든 콜필드처럼 악을 가장(=위악)한 순수(p19)"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진실은 회색지대에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는 지금 와서 보면 무엇이 옳은지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던 양극단 중 누구 하나가 정말로 정의를 독점했던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진실이 과연 그 둘과 관전자들 눈에 회색으로 보였던 그 지대에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어느 진영이든 간에)의 (어리석은) 눈에는 다 뭉뚱그려 흑과 백 외의 모든 게 회색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듈 다 위선도 위악도 아닌,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던 미개인들이 아니었을지.
블랙 라이브즈 매터를 누군가들이 외치는 이 순간, 씬 블루 라인 깃발을 걸면 오해를 받을 수 있다...(p111) 물론 공권력의 폭력 앞에 목숨을 무참히 잃은 이들이 사소한, 미세한 정치적 메시지의 뉘앙스에도 민감해할 수 있으며 제3자는 되도록이면 저 민감한 이들의 감정과 원한, 분개 등을 존중해야 합니다. 저 같아도 깃발을 치웠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특정 가치와 신념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다른 이념과 취향과 소신을 깔아뭉개며 most favoured, 최혜국 대우를 받아야 할까요? 지금 이 순간에 절실한 그 무엇이 발견되면 앞선 시대의, 혹은 다른 계층의 소중한 감정과 정의체계는 그저 먹줄로 지워져야만 하겠습니까? 이는 또하나의 폭력이고 야만입니다. 민중의 지팡이는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고 모든 공권력은 악이었던 걸까요? 그렇다 치고, 그럼 이제부터 그 모든 걸 단죄, 파괴하고 세워질 시스템은 어떤 것이라야 합니까? 대안 없이 증오와 분풀이만 내세우면 인류의 앞날에 어떤 미래 같은 게 있겠습니까?
"지도상으로 보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라도, 소득 계층에 따라 바다를 소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흥미롭다(p79)." 이 문장 후 지역 유지들이 그들만의 "소비"를 위해 꾸려 놓은 공간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저는 이 대목을 읽고 1988년작 영화 <더티 댄싱>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거기서도 중산층은 하층민과 다른 방식으로 휴가, 공간, 여유 등을 즐기며 "더티 댄싱질"을 경멸하죠. 영화 안에서는 마침내 편견을 버리고 대동단결하며 원초적인 쾌감을 맛본다는 결말이지만 현실은 ㅎㅎ 글쎄요. 그리고... 역시 영미권에서는 연극, 연기... 이런 게 우리와는 달리 최상류층의 문화이며, 사실 우리도 1960년대에 활약한 연기자들 중 유난히 명문대 출신들이 많은 게(또 셰익스피어극에 그렇게 집착하는 전통 같은 게) 다 그런 문화를 어설프게나마 배워 들여와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긴커녕 멋지죠).
"잔디와 형제인 척하는 크랩그래스(p126)" 사실 이 잡초가 얼마나 꼴보기 싫었으면 이름부터가 그리 붙었겠습니까. 그런데 남편분이 "저것도 나름 그래스인데"라고 하는 말씀에서 독자는 현웃이 터졌습니다. 그래도컨벤션은 지켜 줘야 할 듯하며, 꼭 이웃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결국 보기 싫어질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옳게 여겨져 온 것은 되도록이면 지키는 편이 (높은 확률로) 유리하며 또한 현명합니다. 이걸 뒤집으려면 오로지 과학의 힘만 빌려야 하겠네요(쓸데없이 진지).
p148에 나오는 V님 같은 분의 태도나 직장관을 보면 확실히 한국이 근대화에 빨리 성공한 건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중국만 해도 워크에씩(workethic)이 아직 많이 미진하며 그냥 자기일만, 밥값만 최소한으로 해 놓고 집에 가는 패턴이 대부분입니다. 한국은 그렇지 않아서 동료 눈치를 보고 체면을 지키는가 하면 조직 내 승진 욕구도 무척 강한 편입니다. 직위가 돈을 꼭 가져와서가 아니라 오너 앞에서 밥값한 후 훈장 받는 가치를 무척 중시합니다. 그래야 내가 당당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도 그저 공명심 수준이 아니라 분명 워크에씩으로 이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100을 해놓으라고 하면 100에서 어정쩡하게 끊지 않고 그 이상을 하고 갑니다. 세르비아인들은 그 나름 역사가 오래된 민족이겠으나 이런 체험을 집단으로 거친 적이 없고 (죄송하지만) 그 하시는 말씀도 공산주의 체제에서 흔히 하는 선동 교육 시간에 나올 법한 말에 불과합니다. 노동자가 자기 권익 찾지 말자는 게 절대 아니고 말입니다.
이 세상은 책 p174에 나오는 대로, 남한테 폐 안 끼치고 자기 일은 확실히 하면서 자신의 대(代)보다 더 나은 삶과 재산, 보람 등을 자녀에게 남겨 주고 가려는 "검박하고 안전한 사람들"이 지키고 만들어나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회색분자" 같은 건 아니죠. p196에 언급되는 <플랫(flat)라이너즈>는 우리 나라에서는 <유혹의 선>이라는 다소 이상한 제목으로 개봉되었더랬습니다. 최근 나온 리메이크보다 훨씬 더 유명한 배우들이 총출동한 호화 캐스팅인데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올리버 플랫(Platt)도 나오죠.
"어차피 돌려주실 돈으로 계산했으면 애당초 받을 생각도 안 하시는 게 간단하잖아요!(p247)" 이게 합리주의이며 그 백인 며느리(라는 말도 부적합)도 그리 생각하셨겠을 뿐 아니라 애초에 다른 방식이 존재할 수도 없다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그 세대분들은 돈이든 뭐든 오고가는 과정에서 아들(의 가족들)과의 영원한 정이 커 가고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죠. 오히려 저는 "스폰지 같은 이해력으로" 또 진심으로 그 충고를 받아들인 그 시어머니분이 더 대단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 연세 드신 분들이 자기 생각을 좀처럼 안 바꾸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죠. 역시 모정의 힘은 위대하며 무엇이든 다 이해하게 만듭니다. 애초에 번잡한 다른 감정, 다른 장치를 마련하려 들지 않는 편이 훨씬 간단했는지 모르지만.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