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의 이름은
조진주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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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는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되었습니다.

<침묵의 벽>은 외부의 소음이 모두 차단되고, 귀에 들리는 건 오직 나의 숨소리뿐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자각과 충격에 대해 다룹니다. 정한영이라는 여성 연출가가 교통 사고 차량 안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동승했던 다른 남자, 즉 박은규가 살인 용의자로 몰립니다. 망자가 교통 사고 이전 어떤 타박상을 입어 의식불명이 이미 빠졌었고, 따라서 교통 사고는 은규라는 이가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 겁니다. 여기서 은규, 또 그의 누이 은정이 어린 시절 심한 가정 폭력을 겪었음이 드러납니다. 정한영의 유가족과 그녀의 생전 애인은 박은규를 살인자로 이미 지목하고 나섰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일>에는 크게 두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동수 씨라는 학원 강사가 학원장을 폭행한 일인데, 이분은 자신의 이해 관계 때문에 아니라 다른 신입 강사에게 원장이 가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다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평소에 상당수 교사들에게 약간은 밉상이었던 뚱뚱한 여학생 현지에게 노성태라는 교사가 모욕적인 말을 한 사건입니다. 학교에는 정규로 채용된, 신분이 보장된 교사가 있는가 하면, 이 단편의 1인칭 화자처럼 기간제 교사가 있죠. 주인공은 현지가 솔직히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거나 자신까지 나설 일이 아니라 보아 서명에 불참하려 했으나 학생 현지는 뜻밖의 오해를 합니다. 그리고 동참하라는 말을 하며 꺼낸 어구가 "(자신의 행동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란 거죠. 현지는 자신을 위해 일을 벌였으나 동수 씨의 부인 은지 씨는 남편이라는 다른 매개를 사이에 하나 두고 "모두를 위한 일"을 은지보다는 덜한 확신으로 이어갑니다.

<란딩구바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어느 작품(p85)의 한 구절에서 따온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소설 마지막(무서움)에 나옵니다. 젊었을 때는 일어 번역을 했고 저 작품이 2018년작인 걸로 봐서 최근까지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자랑하는 분인데 현재는 케이크 배달을 하십니다. 물론 케이크만 전문으로 배달하는 건 아니고 우리가 잘 아는 라이더 알바를 하시는 중인 듯합니다. 이 과정에서 못된 놈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조숙한 어린 소녀를 만나기도 하는데 아이와의 대화를 보고 비로소 우리 독자는 주인공 박정옥이 노인임을 눈치챕니다. 성함을 보고 더 빨리 알았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결말이 충격이니 찬찬히들 읽었으면 합니다.

꾸미는 해주씨가 키우던 고슴도치의 이름입니다. 어느날 이 반려동물이 죽었는데 해주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분명 자연사가 아닌데 범인도 못 잡고 이 슬프고 충격적인 일에 대해 누구한테 책임도 못 물으니(1인칭 화자인 친구 선화씨 탓도 했습니다), 이 일이 자신에게 몇 년이 지나도 좌절감, 위축감을 느끼게 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럼 결국 꾸미의 죽음은 하나의 핑계가 될 뿐 아닐까요? 단추라는 엄청난(?) 단서를 발견한 후 결국 술 한 잔 걸치고 해주는 최 대리를 찾아가는데...

소녀 주화영은 어려서부터 노래가 꿈이었으나 기대만큼 재능이 꽃피지 못했고 가세도 기울어 갔습니다. 첫째 꿈을 접고 펑키파니라는 록밴드의 리드보컬의이 되었을 때 그녀의 이름은 레나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낸시, 코트니 등으로 이름이 바뀔 때마다 그녀의 인생은 크고작은 전기를 맞았습니다. 코트니는 커트 코베인을 죽인 걸로 의심 받던 코트니 러브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제 인생의 마지막 변신으로 트롯 가수 연주황이 된 그녀는 우스꽝스러운 계기로 그런 예명을 사장으로부터 얻고, 소설 초반의 수수께끼 같은 사건에 이어 아주 비극적인 사고를 겪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고 때문에 OOO나 한 게 아니고, 적어도 약간은 먼저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다시....

어린 시절에 묘한 사건으로 만났던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약간은 난감한 관계 속에서 다시 조우합니다. 우리 누구에게나 삭제 폴더 같은 존재, 사람, 사건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런 건 누구나 가질 권리가 있고 또 나름 능숙하게 할 줄도 알아야 상처를 덜 받고 야무지게 제 이익을 챙기는 거죠. "너 그때 OO 때린 일 생각 안 나?" 누군가는 분명히 기억하는 일을 누군가는 정반대로 왜곡하면서도 딴에는 철석같이 진실로 여깁니다.

이름이 비슷해서 자매나 쌍둥이로 착각되는 아이들도 한 반에 몇은 꼭 있었고 선생님도 쉬운 구별을 위해 별명을 붙여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정작 소 닭 보듯 하는 일도 잦은데... 소희와 소정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너랑은 그저 좀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싶어." 그새 둘 사이, 혹은 각각의 삶에는 많은 일들이 이미 벌어졌던 것입니다.

자매라고 해도 성격, 식성 등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난감한 건 보통 부모님이죠. "내 몸에서 분홍색 모래가 쏟아지는 꿈이었다. 흩어지는 모래를 보며 어쩌면 조금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쏟는 눈물은 대개 자기 연민애서 비롯한 게 많죠.

아직은 약간 젊은 듯한 고모와 그녀의 시어머니. 시어머니는 그저 평범한 시어머니는 아니었습니다. 이해할 수없는 건 오히려 고모이고, 지독한 일도 시간이 지나면 질끈 눈을 감아 넘어갈 수 있으니 지레 포기하지는 않아도 되겠죠.

아홉 편의 단편은 생경한 듯 하면서도 친근한데, 낯선 불편함처럼 느껴지는 대목도 사실 우리가 여태 꾹꾹 눌러왔던 어떤 두려움, 비겁 등을 수면 위로 끌고 와 되새기게 만들어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개운하면서도 찜찜하기도 한 이 맛은 무엇일지.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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