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으로 읽는 수호지 -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들의 통쾌하면서도 슬픈 반란 교양으로 읽는 시리즈
시내암 지음, 장순필 옮김 / 탐나는책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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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현세와 내세의 연(緣)을 만든다고 합니다만 <수호지>에서는 태위 홍신이 복마전을 잘못 열어 세상에 108귀신을 풀어 놓게 되고 이것이 바로 향후 양산박의 백팔 두령이 된다는 설정을 세웁니다. 그런데 백팔 호걸은 이 군담소설의 주인공인데도 그 본색이 복마(伏魔)라는 것이니 아이러니입니다. 주인공들이 아무리 선한 의도, 굳센 의리, 애민 정신을 가지고 활약해도 그 근본은 결국 천계이건 지상에서건 마냥 환영 받을 수만은 없는 어떤 사악한 영(靈)이라는 점을 소설에서는 전제합니다. 


 

책표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들의 통쾌하면서도 슬픈 반란." 우리는 이 고전을 읽을 때 재미있다, 통쾌하다 같은 느낌은 항상 가져 왔지만, "슬프다"는 감상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고전에 등장하는 많은 사연들은 "슬픕니다." 누명을 쓰고 쫓겨 다니며, 아내로부터 배신 당하고, 힘 없는 민초는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재물을 착취당하거나 가솔을 빼앗기고, 호걸은 그런 불의를 참고 보아 넘기지 못해 개입하다 관(官)으로부터 죄를 받고.... 이런 이야기가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결국 산채로 숨어들어 도적이 되고, 관과 항쟁하고, 폭력과 편법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슬픈 사연들입니다. 이 책은 대하소설 분량인 <수호전>의 요약본입니다만, 그저 요약에 그치지 않고, 이처럼 주제와 구성 중 "슬픔"이라는 키워드를 포착하여 독자 앞에 제시한 게 고유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소설의 서두는 간교한 탐관오리인 고구의 횡포로부터 시작합니다. 고구는 공놀이 잘하는 재주 하나로 황제의 눈에 들어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는데, 힘이 생기고 보니 과거의 개인적 원한을 푸는 데 권한을 남용하려는 못된 마음을 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호걸인 사진, 이충, 노달 세 사람이 독자에게 먼저 소개됩니다. 특이하게 이충은 호걸이라 불리기엔 조금 부족한 인물됨인데도 사진에게 한때 무술을 가르친 스승(스승으로 불리기에도 부족하지 않냐는 게 독자로서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이라서 이 정도 대접을 받네요. 저 뒤 p345에 등장하는 설영도 여기 이충처럼 약쟝수 출신입니다.

 

이후엔 저 두 사람은 무대에서 잠시 퇴장하고 노달의 원맨쇼가 이어집니다. 아마 <수호전>에서 가장 큰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인물은 바로 노달, 즉 노지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달은 본디 하급 군관인 제할 역을 맡은 이였으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애매한 일에 엮여 김 노인 부녀를 돕다 쫓기는 몸이 됩니다. 이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법명을 받는데 그게 "지심"이죠. 

 

이 과정에서 동경 개봉부(p32)라는 말이 잠시 나오는데 이곳은 변경이라 불리는, 시대적 배경이 된 북송 시기의 수도입니다. 개봉부라는 이름이 아직도 일부 남아 현재도 카이펑이라 불리죠. 1500여년 전 전국 칠웅 중 하나였던 위(魏)나라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당시 대량, 변량이라 불렸습니다. 이 외의 주요 도시는 서경 하남부, 남경 응천부, 북경 대명부(p68)입니다.

 

임충(앞서 나온 이충과는 물론 다른 사람입니다)이 등장하여 양산박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는 이야기가 잠시 나옵니다. 이 다음으로 중요한 이야기는, 양중서가 채경에게 보내는 생신강을 양지가 호송하는데, 이 보물을 조개, 오용, 공손승 등의 호걸이 작심하고 계획을 세워 도중에 훔칠 계획을 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벌이는 책략이 마치 현대의 하이스트(heist) 영화를 보는 듯 흥미롭습니다. 그저 출중한 무력만 쓰는 게 아니라 제법 치밀한 속임수가 개입해서입니다. 임무를 다하지 못한 양지는 누명을 혼자 뒤집어쓰고 도망하여 노지심과 합류합니다. 십자파의 장청과 그 부인 손이랑도 이때 처음 등장(p85)하는데 이 무시무시한 부부는 뒤(p259)에 다시 자세하게 그 행적이 나옵니다. 노지심과 양지는 보주사의 산적들을 무릎 꿇리고 두령이 됩니다.

 

한편 나중에 양산박에서 가장 고매한 인격자로 추앙 받는 송강이 이때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조개 등이 등장시부터 도적의 본색을 거의 숨기지도 않는 것과는 다르게 송강은 그야말로 의리의 화신이며 유교적 덕목을 훌륭히 실천하는 지사입니다. 송강의 친구 조개, 그리고 그 휘하의 오용 등은 쫓겨 다니다 양산박에 당도하는데 이때 먼저 자리를 잡았던 임충과 의기투합하여 그릇이 작은 왕륜을 몰아내고 두령이 됩니다. 양산박의 진짜 신화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거죠.

 

송강은 남자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최고인데 까무잡잡한 얼굴에 다소 왜소한 체격 때문인지 여자들한테는 별로입니다. 놀라운 건, 염씨 할멈과 그 딸 파석이 송강에게 큰 신세를 지고도, 장문원이라는 미남자와 파석이 불륜 관계를 맺는 바람에 큰 파문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파석은 물론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못된 수작을 벌이기에 죽어 마땅하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자아내지만, 송강 본인도 처신이 좀 더 치밀했다면 이런 일이 애초에 벌어지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여튼 살인죄로 송강은 쫓기는 몸이 되며 이 과정에서 시진과 만납니다. 시진 하면 단서철권이라는 단어가 자동으로 함께 떠오르는데, 시진의 시(柴)씨가 바로 북송의 전조였던 후주의 마지막 왕 시 세종의 성씨입니다. 호걸 중에 지체가 가장 높은 인물이었으며 나중에 조정으로부터 대사면을 받는 데에 하나의 복선이겠습니다. 또 이 과정에서 무송을 만나는데 이 캐릭터 역시 <수호전>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높은 인물로 꼽히곤 하죠. 

 

무송의 이야기는 압축, 요약 없이,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사연, 또 그 형인 못난이 무대와 형수 반금련, 서문 경에 얽힌 사연이 이 책에 아주 자세히 펼쳐집니다. 이처럼 이 책은 <수호지> 전체에서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부분은 과감히 요약하지만, 널리 읽히고 사랑 받아 온 부분은 원본과 별 차이 없이 자세히 풀어 줍니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원본에 비해 별반 죽지를 않습니다. 


 

이 대목을 읽고 다시 느끼는 건 차라리 반금련 본인보다 뚜쟁이 왕 노파야말로 악인 중의 악인이라는 점입니다. 서문경은 위의 장문원과 비슷한 포지션이고요. 아마 여기서 영향을 받았는지 요시카와 에이지의 장편 <미야모도 무사시>에도 코믹한(본인은 전혀 웃기려는 의도가 아니지만) 노파가 하나 나오죠. 과일을 파는 꼬마 운가도 그렇고요. 여튼 이 책에서 무송의 이야기는 원본으로부터의 축약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분량이 상당히 깁니다. 


 

무송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질 않고, 장몽방과 장문신의 교묘한 흉계에 말려 고생하는 이야기가 또 한참 펼쳐집니다. 여기서 무송에게 신세를 지는 시은은 성이 시(施)씨이므로 앞의 시진과는 다릅니다. 시은은 그 이름만 놓고 보면 남한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인데 이야기에서의 역할은 정반대라서 아이러니입니다. 아무튼 노지심과 더불어 <수호지>의 양대 스타라 할 만한 무송도 결국 머리를 깎고 뜻하지 않게 (노지심처럼) 중 행세를 합니다. 

 

송강은 청풍산 산적들에게 잘못하여 죽을 뻔했으나 이곳 두령들은 앞서 보문사나 양산박의 경우와 달리 호걸로서의 송강을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이 과정에서 의기지사인 송강은 유고의 아내를 도적들로부터 구해 주는데, 어찌된 일인지 <수호지>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천하의 악질들입니다. 장청의 부인 손이랑 역시 비록 호걸들과 의기투합하기는 하나 본업이 인육만두를 빚는 악질이니 기가 막히죠. 

 

p275에 모용언달이 나오는데 소설에서는 이 인물이 모용귀비의 친정 오라비라고 하지만 창작된 캐릭터입니다. 또 소설에서는 모용귀비가 송 휘종의 애첩이라고 나오지만 사실은 휘종의 형 철종의 첩이었죠. 둘째 줄에 지부의 한자 표기가 地部라고 나오는데 이는 저자께서 잠시 착각하신 듯합니다. 벼슬 이름이 지부, 지현 하는 식이니까 知府가 맞습니다. 知縣이라는 표기는 이 책 앞부분에서 맞게 나왔더랬습니다. 또 앞 p249에서는 知府라고 바로 나와 있습니다. 

 

송강은 평소에 잘 다져 둔 인맥과 평판에 힘 입어 형벌을 거의 모면하던 중 대종과 흑선풍 이규를 만납니다. 이규 역시 <수호지> 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캐릭터죠. 공손승도 도술에 능한 인물이지만 여기서 만난 대종 역시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지녔습니다. 이규는 본인도 얼굴이 검으면서 송강더러 "시커먼 자(p312)"라 부르는 게 우습습니다. 

 

동아시아의 역사나 픽션 속에서 영웅과 충신은 간혹 필화(筆禍)를 겪는데 대개 간교한 자가 글 몇 획을 고치거나 곡해하여 큰 사고를 일으키는 식입니다. 여기서는 황문병이라는 악인이 나와 송강을 모함하는데 그 와중에 군사(軍師) 오용이 실력을 발휘하여 문서 위조를 하는 등 재주를 부리지만 먹혀들지 않습니다. 

 

양산박에 어느 정도 서열과 체제가 갖춰진 후 축가장과 일대 결전을 벌입니다. 작가 시내암은 본디 원말에 일어난 도적의 무리 중 장사성의 진에 가담했다고도 전해지는데 이 대목은 작가 자신의 이런 체험을 어느 정도 반영한 듯합니다. 조정은 절대선이자 최고 권위인데도 도적들이 감히 부정하고 든 것도, 이름만 송 황실이지 혹 작중의 조정이 원조(元朝)를 암유한 것이라면 주제의식이 떳떳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걸 호삼랑이 맹활약하는 모습도 볼 만합니다. 장팔사모를 휘두르는 임충이 등장하고서야 싸움이 진정됩니다. 저 앞에서 유고의 간악한 아내를 처단할 때 두령 중 왕영이 큰 불만(p293)을 품었는데 송강은 이 대목(p393)에서 비로소 자신의 약속을 지켜 호삼랑에게 왕영을 장가들게 합니다. 


 

천하를 벌벌 떨게 하는 이 호걸들이 애초에 산 속으로 쫓겨 와 도적질을 하며 살게 된 건 모두 희대의 간신 고구의 악의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은 나라를 망치고 영웅을 핍박한 간신을 처단하고 호걸들이 제 명예를 찾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허나 시대가 변해도 악소배들이 국정을 전횡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패턴은 변함 없이 반복됩니다. 이 고전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각종의 폐단과 비위가 횡행함을 독자에게 일깨우며 깨어 있는 정신으로 공동체를 일궈 나갈 필요가 있음을 각성시킵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된 서평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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