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로부터 - 과거에서 기다리고 있는 미래
민이언 지음 / 다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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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겉모양만 봐도 예쁜 책입니다. 이런 책은 보통 여행작가님들의 책, 시집(이라면 좀 두꺼운 편이겠지만)이 보통 이렇게 책을 만들더라구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판형의 책입니다. 책을 열면 예쁜 사진, 그림 등이 가득 담겼을 것 같은데 기대만큼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역시 좋은, 은은한 그림과 사진이 품어져 있었습니다.

"당신의 전성기, 리즈 시절, 영광의 시기는 언제였나요?" 누가 이렇게 혹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만화 슬램덩크에서는 "지금"이라 대답한다고 합니다만 아마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듯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은 분명 행복한 분이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교직원으로부터 "학생들은 4년 후면 여길 떠나지만, 우리는 평생 직장이야"라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게 그렇게 되나? 고개가 갸웃해졌겠지만 그분이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뭐 막을 수는 없죠. 이 책에 가득 담긴 추억의 회고 중 초반에 등장하는 건 "매점돌이"입니다. 초등학생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엄마 아빠가 고교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분이라서 아이가 계속 해당 고교를 드나늘었나 봅니다. "넌 누군데 여길 들어왔니?" "아니 이 매점돌이를 모르다니?" 그야말로 주객전도이지만 애 입장에서는 도리어 황당했을 만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다니던 도장 건물 아래 1층에서 운영되던 미니슈퍼 아들이었던 어느 형과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나네요.

"때로 우리의 미래는 과거에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모두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의 족쇄에 얽매어 현재가 좌우된다는 게 아니라, 과거에 어떠어떠한 행적을 밟았기에 우리의 현재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놓인 것이죠. 여튼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책임을 져야 하며 때로는 과거를 진지하게 회상하며 과거를 재구성하거나 반성할 필요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가장 자주 발동되는 동기는 "추억과 만나고픈 욕구"일 것입니다.

p52에는 작가 정용훈님의 작품이라는 어떤 일러스트가 있습니다. 민이언 작가의 말로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패러디가 정 작가님의 의도였다고 하네요.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데, 제 잘난 멋에 살아가고 있을 저 녀석이 불쌍해." 이 말을 들으니 좀 뜨끔해지기도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도 참 남 말을 잘 안 듣는 편인데, 고등학생 시절이라면 얼마나 귀를 닫고 살았을까요?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의 제가 정체도 다 밝히면서 "이렇게 해 보라"고 진지하게 간절하게 충고한다면 과연 말을 들을까요? 딴 건 몰라도 몇 가지는 꼭 가르쳐 주고 싶은 게 있는데... 혹 안 듣는다면 에이 어차피 그렇게 생겨먹은 녀석이겠거니 하고 포기하겠습니다. 지금의 저도 아직 이런데 걔야 오죽하겠습니까.

듀스의 김성재가 멋있어 보여 저자는 남자인데도 경희대 의상과를 지원했었다고 합니다. 요즘 같으면 남학생이 의상과를 간다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볼 듯합니다. 선망하는 연예인 따라 대학을 지망하거나 목표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가장 빛났던 시절로 대학 시절을 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뭘 어디다 두고 온 게 십수 년이 지나도 계속 미련으로 남는 게 있습니까? 저도 그런 게 있는데 책에서는 어렸을 때 음주운전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 이야기를 합니다(제 경우는 물건이었으나 책에서 말하는 건 사람, 사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고였네요). 십 년 후에 저자는 입장이 바뀌어, 그때 곤란과 슬픔을 겪었던 "물리선생님(p79)"의 처지에 서게 됩니다. 아직 어린 학생이 저지른 어떤 쉬쉬해야 할 일, 이를 덮고 영원히 마음 속에 묻어야 할 교사의 책임... 하긴 이런 스승이 있는가 하면, 학생보다 더 경박하고 천한 처신으로 잔머리를 굴리며 정치를 하는 자도 있기 마련입니다. 어느 교사에게서 사내의 한숨과 고민, 눈물, 진정성을 학창 시절에 목격한 이는 행운아입니다. p272에 나오듯 저자는 물리 쌤은 아니고 중국어/한문 교사입니다.

연예인이 많이 다닌다는 대학 중에 단국대가 있죠. 데니 안, 손호영, 하지원 등 발에 채이는 게 연예인이었다는 게 저자의 말입니다. 그런데 유난히 큰 키 외에도 남다른 아우라 때문에 "진짜 연예인"이란 느낌을 주었던 이가 고 이은주였다고 합니다. 사실 스크린이나 TV 화면에서 볼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저자의 이런 회고를 읽으니 다시 생각하게도 되네요. 여튼 고인의 명복을...

이 책에는 매점에 관한 사연이 참 많이 등장하네요. 고교 때 초등학생이었던 매점돌이, 저 이은주를 만난 장소도 캠퍼스 내 사범대 매점, p112에 나오는 "깐돌이네"도 외상값에 얽힌 이야기... 하긴 누구에게나 매점은 허기를 달래고 가벼운 잡담을 나누던 추억의 장소이긴 합니다. 공부만 하느라 안 그랬던 사람도 있겠지만.

특히 여성의 경우 과거에는 능력도 좋고 외모도 멋진데 그냥 결혼 후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사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죠. 지금은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만 현재 평범하게 그냥 주부로서 늙어가는 분들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왜 그런 대단한 포텐을 살리지 못했나 하는 마음도 듭니다. 저자분도 1988년 올림픽 때 외대생 신분이면서 통역으로 일했던 사촌 누나를 책에서 떠올립니다. 여성으로서 통역 관련 일은 참 멋진 로망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꼭 활짝 피고 스폿라이트를 받아야만 제대로 사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이들과 평안한 현재를 함께하며, 지금 이 순간이 만족스럽다면 그 이상 잘산 분도 없을 것입니다.

p206에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네요. 말씀대로 리메이크도 자주 되었고 한때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 랭크에서 예스터데이, 홀리데이(스콜피언스 곡)을 이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죠.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먼 지평을 응시하게 하는 명곡은 세월이 지나도 언제나 모든 세대로부터 리퀘스트 되는 것 같습니다.

장국영이 부른 노래 <투 유>는 저는 현재 곡조가 잘 생각나지 않네요. 그리 안 좋아해서일 수도 있고... 저자는 "처음으로 가사를 외워 본 팝송(?)"이라고 합니다. 곡조 자체가 생각 안 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그런데 한국에서 광고를 찍기 위해 일부러 가사를 영어로 번역한 거였고, 북경어, 광동어 버전에는 "비"가 언급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튼 저 당시에는 이상하게도 장국영, 왕조현, 임청하 등 중화권 배우들이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하죠. 지금은 그때와는 팬덤 사이즈가 달라진 대륙의 대스타들이 있지만 한국인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시피합니다. 정말 예전 이야기입니다.

p243에도 나오지만 <천장지구>의 원제는 "천약유정"이죠. 이게 희한하게 한국에서 개봉만 하면 제목이 이상하게 바뀌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자는 학교 다닐 때 한시(漢詩)를 외워 구술하는 시험을 본 적 있다고 합니다. 백거이의 명편이 그 대상이었다고 하네요. 개인적으로 한시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제가 만약 그 학교를 다녔다면 꽤 유리했을 듯합니다.

이 책에는 만화 <슬램덩크>가 자주 인용됩니다. 어쩌면 생의 모든 국면을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사, 사건, 상황, 배경, 교훈으로 일일이 대치시켜 회고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하긴 우리 누구에게나 그런 문학 작품, 만화, 애니, 드라마는 한 편 정도 있기 마련이죠.

p256 이하에는 포송령의 <요재지이>에서 모티브를 딴 <쳔녀유혼>이 분석됩니다. 라캉의 실재계와 상징계 이론도 원용되고 그 시절 이 영화를 아주 몰입하여 감상한 분만이 할 수 있는 분석이 이어집니다. 돌이켜보면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인지, 꿈에서 잠시 엿본 환상인지 모를 과거의 추억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의 실재 여부가 아니라, 과거를 자양 삼아 현재를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자신에게 떳떳이 자문할 수 있느냐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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