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꽃말
김윤지 지음 / 이노북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풋풋함 그 자체가 좋다.
욕구와 욕망이 앞서는 것보다, 마음이 앞서는 풋풋함이 좋다.
 (p33. <연애> 中)

욕구와 욕망이라고 할 때 꼭 그것이 성(性)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습니다. 대뜸 그런 것부터 떠올린다는 게 벌써 풋풋함과는 거리가 먼 타락한 영혼의 증명입니다(독자인 저를 포함해서). 김동인의 단편 <광화사>에는 주인공인 화공이 순수한 여인의 아름다움에     반해 하룻밤의 연을 맺은 후, 바로 그 다음날 이미 알 것을 알고 난 여인의 눈빛이 예전과 달리 흐려져 있는 걸 보고 크게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 때문에 여인과 연을 맺었으니 그 이기심을 지나치게 탓할 건 아니지만 여튼 어떤 경험이 있고 없고가 사람을 이처럼 전과 후가 달리 보이게 만드는지 신기합니다. 

 

이뿐 아니라, 돈과 이익을 위해 달려드는 것, 그렇지 않고 그저 순수히 마음이 끌려서 몰두하는 건 서로 다릅니다. 무엇이든 타고난 본성이 시켜서 그 앞에 다가가는 건 풋풋함이고 순수함이며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가 뭐 별거 있나요.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들이 낱말과 문장이 되고,
당신과 나의 숨결이 우리의 운율이 되고,
 (p35. <시> 中)

 

셋째 행을 보면 전반부는 "당신과 나", 서로 분리된 주체였다가, 후반부에서는 "우리"로 융합됩니다. 이때 숨결은 비로소 운율로 승화합니다. 별거 없지만 분명히 별 게 있습니다. 

 

사랑이란
마음의 온도를 맞추는 것 (p19. <물음> 中)

 

그러나 "설렘의 감정만으로는 지킬 수 없는 것 또한 사랑의 단면이다. 때론 다툼을 통한 성장이 필요하다"고도 합니다. 냉혹한 현실을 말할 때 시는 산문을 닮네요(행 구별은 제가 생략했습니다). 그럼 역시 풋풋함만으로는 사랑을 지킬 수 없다, 이어갈 수 없다는 뜻도 될까요? 제가 예전에 읽은 고 이윤기 선생의 책을 보면 군신 아레스의 입을 통한 "사랑도 전쟁과 같아서 때로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활짝 피었던 우리가
이는 바람에 모두 떨어지고
(중략)
그러니 꽃잎 한 점도 남기지 말자, 우리 (p68. <꽃잎 한 점>)

 

길지도 않은 한 편의 시이지만 마지막 행까지 읽고 나서야 제목이 왜 꽃잎 한 점인지 알았습니다. 사랑이건 우정이건 온전히 헌신하고 공유하고 보여 주고 안겨 줘야 하며 어떤 미련이나 비자금을 남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자주 하는 말인데 예전에 드라마 <사랑과 전쟁> 어느 에피소드에서 "아낌없이 주는 게 뭐가 좋은지 알아? 미련이 안 남는다는 거야."라는 대사가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서 부정을 저지르고 뉘우치는 전남편의 재결합 요구를 거절한다는 거죠. 물론 저런 건 미련이 남든 안 남든 무조선 거절해야 되는 거고 말입니다. 

 

이 시는 마지막 행에 자꾸 눈이 갑니다. "-X에게로부터-" 왜 이 작품에만 저 말이 붙어 있을까요? 또, "에게로부터"라는 조사 뭉치는 무슨 뜻일까요? "에게+로부터"일까요, 아님 "에게로+부터"일까요.

 

나날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미련들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어요.
살면서 이런 기분을 몇 번이고 느껴 본 적이 있습니다.
미련들이 사라져 삶의 마련이 사라지는 그런 기분을. (p170. <미련이 남기는 마련> 中)

 

미련이 저렇게 사라져 버리면 "마련"도 결국 같이 사라지고 만다, 정말 그런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건 결국 미련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미련은 떠나 보내어도 마련은 남겨 둬야 할 텐데 그게 그렇게 다 뜻대로 되면 인생이 참 쉽겠죠.

 

집 안 어딘가에 있는 서랍장 안에는
전달되지 못한 주인 잃은 편지들이 있다 
(중략)
그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p60. <서랍장> 中)

 

화자도 그 서랍장이 집 안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알지, 어디인지는 정확히 모르는 듯합니다. 그러니 주인을 잃은 것 아닐지... 혹은, 어차피 처음부터 편지들이 주인을 잃게 하려고 내심 작정했기에, 알고 있었던 서랍장에 대한 기억을 고의로 잃었는지... 누구를 향해 쓴 편지도 그 누구한테 전달되게 하려면 그 나름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지막 행의 "사랑들"을 저는 처음에 "사람들"로 잘못 읽었습니다. 서랍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잊은 사람들, 내가 잃은 사람들... 편지를 집 삼아 서랍장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 안에는 하나씩의 사랑이 둥지를 틉니다...라고 생각했었으나 제가 잘못 읽은 것일뿐...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무한하지만 유한한 시간들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로 흘러가는가.
(중략)
닿지 못한 한마디 한마디들이 쌓여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지는 않을까. (p115. <무한하면서도 유한한 것> 中)

 

이 작품에서도 "전달되지 못한 주인 잃은 편지들"이 연상됩니다.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말은 유한하지만 담은 정은 무한합니다. 3차원 공간도 테두리는 유한하지만 그 안에 무한대의 넓이를 품을 수 있습니다. 유치환의 <깃발>에서처럼 노스탤지어 때문에 소리 없이 질러진 아우성들이 유한한 서랍장을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그 서랍장은 사실 무한한 공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사랑들이 그리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니...

 

사회에서도 보면 꽤나 많은 타인들이 우리의, 나의 삶에 필요치 않은 간섭을 하는 때가 있다. 
(중략)
나를 어느 정도 안다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의하지 말아주길.
(중략)
우리가 아무리 가깝더라도 우리는 결국에는 다르기에, 
우리는 더없이 가깝고 그래서 더 서로가 서로를
신중하고 조심해야 하는 소중한 타인입니다. 
(p161. <우리는 타인입니다> 中)

 

사실 이런 무례한 언행을 우리는 일상에서 겪기도 하고, 혹은 내가 타인에게 저지르기도 합니다. 내가 저지른다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당한 사람은 많다는 것도 좀 신기합니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한테 그러고 다니는 건지... 그런데, 아마, 그랬던 사람도 혼자서 나중에 생각하기로, 그때 선을 넘은 게 아닌가 하고 후회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너무 상처 받지 말자구요.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놓는 것이 더 힘든 일이란 것을 
몇 번의 좌절과 실패를 통해 알게 되었다.

(중략)
틀린 길, 맞는 길은 없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내가 있는 길이고 나이다. 
(p192. <내려놓기>)

 

틀린 길, 맞는 길이 따로 없고 각자가 서 있는 길이 모두 다 이유가 있어서 그리 된 것입니다. 자연계에도 얼마나 다양한 생물들이 있습니까. 꽃은 또 얼마나 종류가 많습니까. 그 다양한 모습 중에 틀린 것도 없고 맞는 것도 없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모두 각자의 꽃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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