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 조선의 586 - 그들은 나라를 어떻게 바꿨나?
유성운 지음 / 이다미디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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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은 본디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 9대 임금 성종이 정책적으로 키운 데서 그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조선 자체가 성리학 원리에 기반한 국가였으며, 여말에 원에서 본격적으로 이 체계를 배운 유학자들이 대거 확산하며 종래의 불교 중심 국가를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성리학자들이 갓 활동 범위를 넓혀갈 무렵 역성 혁명이 일어났다는 건 아이러니입니다만 본격적으로 선비를 우대하겠다는 새 나라의 비전 표방이 있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닙니다.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기로도 훈구는 적폐, 사림은 도덕적이고 청렴함, 뭐 이런 이분법으로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사림이 집권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세뇌 작업(의 잔재)"라고 이를 평가절하합니다.

중종실록을 보면 "<소학>은 기묘사림이 숭상했던 것이라 부형들이 자제를 가르치고 훈계함에 있어 한 사람이라도 이 책을 언급할까 걱정했습니다."라는 기술이 있다고 합니다(p31). 이는 당시 아직도 세를 크게 떨치던 훈구 세력이 사림에 대해 품었던 두려움을 표현한 것인데, 세상은 과연 그리 변하여 사림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는 유학적 도그마를 바탕으로 군주의 행보를 강력 견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삼은 게 말하자면 <소학> 등의 유교 경전이었던 셈입니다. 저자는 이를 오늘날 586이 1980년대에 즐겨 읽던 <해전사>에 비기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저자의 견해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소학>은 p91에 이황의 입을 빌려 다시 등장합니다.

임사홍은 조선 내내 간신으로 낙인 찍혔고 저희들이 어렸을 때 읽었던 책, 만화 등에도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동시대인이었던 유자광도 그러했고, 좀 뒤인 중종 대로 오면 남곤, 심정 등이 그런 포지션이죠. 뒤의 세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부정적인 인상입니다만 드라마 <왕과 비>에서 임혁 씨가 좋은 연기를 보여서인지 임사홍은 최근 들어 다소 평가가 좋아지는 느낌입니다. 저자는 pp.34~35에서 흙비, 화재 등 천재, 인재를 두고 사실 그대로를 지적하는 임사홍과 그를 탄핵하는 사림의 태도를 대비시키며 "지금 눈으로는 임사홍이 훨씬 정상"이라 지적합니다. 이런 사림의 태도는 시대를 2400년 역행하여 고대 중국 주나라의 질서로 회귀하려는 일종의 퇴행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는 계유정난 당시 사림이 받은 충격에 대해 언급합니다. (한참 전의) 왕자의 난에 대해서는 무덤덤하던 것이 이 사건에 대해서는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전두환의 12.12나 5.18에 대해 당시 학생들이 느꼈던 충격에 비유합니다. 예를 들어 20년 전인 5.16에 대해서는 초기 오히려 장준하 선생처럼 환영을 하던 움직임도 있었던 것과 확실하게 대비되죠.

p41에서는 저자가 신계륜씨가 정형근씨를 국회에서 보고 "주먹이 쥐어졌다"고 한 말을, 신숙주에 대해 사림이 당시 느꼈을 감정과 비교합니다. 이어, 정말 흥미롭게도 YS가 구 민정계, 혹은 상도동계만으로 국정을 이끌 수 없다고 여겨 김문수, 손학규, 이재오 등 이질적인 민주화운동 경력자들을 대거 영입하여 정치에 참여시켰던 행적을 성종의 사림 스카웃에 비견합니다. 이 부분 읽으면서 재미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 세 분(적어도 두 분)은 이후 전 소속 진영과 확실히 선을 그었지만 말입니다.

p53에는 앞서 잠시 언급한 남곤이 등장하여 "우리 나라는 사대뿐 아니라 교린에 있어서도 사화(詞華)가 필요하니 문장 쓰는 능력을 결코 홀대할 수 없다"고 한 말이 인용됩니다. 실제로 앞선 시대의 신숙주도 대(對) 일본 외교를 중시했고 훈구파는 이처럼 국정 운영의 실무 능력 면에서 확실히 뛰어난 점이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는 그 앞선 고려 말처럼 왜구의 극심한 병폐가 덜했고 이런 국면이 훈구파의 집권기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죠. 이후 인종~명종 대는 훈구 집권기라기보다 외척에 의한 세도 정치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여튼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이른바 "사장파와 도학파의 대립"은 이런 구체적인 역사 기록을 보며 의미가 깊어지기도 하네요.

정치권에서는 종종 적통의 논란이 일곤 하는데 사실 이는 적절치 못합니다. 현재의 유권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일꾼이 선택되면 충분하지 과거사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물론 다른 조건이 같다면 기왕이면 족보 좋은 인재를 선택하겠지만 말입니다. 권근이 학문적인 면모로도 포은과 야은에 못 할 바 없었지만, 도학의 적통을 논함에 있어 배척되고, 끝까지 조선 조정을 외면한 저 두 분이 이후 사림에 의해 내내 숭앙되었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이 다음이 포인트인데, 건국 세력이 경멸되고 그 반대 진영이 고평가되는 건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기는 합니다(저자의 견해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무관하게 말이죠).

"조선에 있어서는 사습(士習)이 비루하여 나아갈 바를 몰랐는데 김굉필이 젊어서 김종직에게 수업하여 문호를 조금 알고 스스로 송유(宋儒)의 끼친 실마리를 얻어서 규모를 극진히 하고 그 동정과 시위가 바로 정자, 주자와 같았으니..." 김굉필의 문묘 배향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이 크게 일었을 때 그를 옹호하는 논변 중 일부입니다. 사실 한반도 성리학의 대종은 안향에서 찾을 뿐이며 이분은 원(元)에서 학문한 분인데도 구태여 더 멀리 정주(程朱)의 송(宋)을 거론하는 걸 보면... 여튼 그 앞에는 "멀리 정몽주의 계통을 잇고 염락(濂洛)의 연원을 찾았다"며 김굉필을 높이 평가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저자는 김굉필을 두고 그리 경지가 높지는 못했으나 오로지 제자들을 잘 길러 학맥을 이은 공 하나로 기묘사림이 이처럼 무리수를 둔다며 비판합니다. "정의를 독점하고 배타성이 남달랐던(p90)" 사림은 결국 김굉필의 문묘 배향은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절반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저자는 평가합니다.

썩어빠진 훈구 세력을 몰아내고 세력을 잡은 사림은 그럼 청렴하게 살았을까? 저자는 선조 연간 감사를 지냈던 유희춘을 거론하며, 심지어 첩의 집도 영암 군수와 전라 수사가 맡아 지어 줘야 했을 만큼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김해에 거주하던 박천이라는 인물이 도망한 왜비(倭婢)를 반환할 것을 왜의 사자에 요구하자 "우리는 본래 사천(私賤)이 없다"고 대답했다는 태종 연간의 일화가 나옵니다. 사실 사사로이 노비를 부린 건 고려 말 권문세족 발호 후부터의 폐습이며 딱히 이걸 두고 사림을 욕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여튼 청신한 기풍을 내세웠다는 사림 주도의 사회에서 오히려 노비의 비중이 증가했다는 건 문제입니다.

가장 문제인 게, 사림은 이른바 "열녀"라는 왜곡된 여성상을 만들어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 노예적 삶을 동시대 여성에게 강요하고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근래 여성계 주도로 "고려 때만 해도 자녀 균분 상속 등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으나 조선 들어 사림의 교조적 사회 개조 움직임이 크게 일며 남존여비의 사회 풍조가 지배했다"는 주장이 크게 대두하는 것과도 맥이 통합니다. ㅎㅎ

향약을 통해 사림들은 향촌 사회를 확고히 장악했는데 이른바 惡籍을 통해 일종의 블랙리스트를 만든 점도 특이합니다. 저자는 조지 오웰의 말을 빌려 "모두가 평등하지만 조금 더 평등한 사람"들의 명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군요. 오웰의 저 문장은 참 아무리 생각해도 명언입니다. 여튼 "당동벌이"의 배타성은 조선을 대외적이건 대내적이건 지극히 폐쇄적인 사회로 만들었고 국력은 날로 침체하여 결국 중국에 사대하고 왜에 뒤떨어지는 희망 없는 실패 국가로 전락하게 된 게 사실입니다.

사림이 오랜 기간 동안 소인배로 낙인 찍은 탓에 수백 년 후의 우리들도 그리 알고 있는 남곤(공교롭게도 북에서 부수상까지 지낸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도 남곤 심정이가 소인배라는 말이 나옵니다)은,

"인심이 순박하지 못하여 교사한 마음이 날로 늘어나 공도로 과거를 설치하였는데도 폐단이 생겼는데 하물며 천거의 공정을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p147)"

현량과의 실시를 반대하며 저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 누가 이런 주장을 하면 20대 청년들이 아마 열화와 같이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사실 성리학이 태동했던 시기인 송대에도 道學이 오래 세력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저자는 주장하기를 송을 정복한 몽골의 원나라가 상업과 국제무역을 활성화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시장과 자본을 발전시켰다(그래서 성리학이 설 땅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 남송도 강남을 적극 개발하여 물산을 폭발적으로 늘렸고 상업의 번성함은 비할 바가 없어서 금나라의 그 거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경제력 하나로 버텼던 것입니다.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완전히 자리한 국가는 따지고 보면 조선이 유일한 셈입니다. 덕천 막부도 시늉만 하다 결국관두고 중상주의로 갔으니 말이죠. 물론 사농공상의 확고한 신분질서와 성리학 체계를 바로 동시할 수는 없습니다만.

중종 때 속고내(束古乃)라는 여진족 추장의 처리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합니다. 역시 <임꺽정>에 중요한, 아주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이장곤이 선제적 정벌의 찬성론자였고, 이에 반대하던 게 조광조 등 기유사림이었습니다. 결론은 조광조 등의 의견을 수용하여 여진족에게 강경책을 쓰지 않았고(이전 세종~세조 연간과는 반대로), 그 결과 백 년 뒤 여진족은 엄청난 세력을 이뤄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겼다는 겁니다. 이 사실은 근래 재주목되어 비단 이 책 저자분뿐 아니라 요즘 신진 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이것저것 다 떠나 p173에 길게 인용된 조광조의 변론은 매우 유려하고 (많이 배운 사람 특유의) 품위를 풍깁니다. 그 담은 내용이 비록 국가 시책의 패착을 부른 어리석은 것이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사림은 결과적으로 우민화 정책을 폈다고 봐도 되는데 책 p192에는 "백성이 상공업에 종사하면 간사해진다"는 말도 나옵니다. 반면 중국은 오천 년 역사 동안 말만 사농공상이지 상인 세력이 배후에서 힘을 휘두르지 않은 역사가 없습니다. 원도 교초의 남발 때문에 유통 질서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교조화한 유림은 대개 상인 세력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 이는 민생의 피폐로 귀결합니다. 저자는 586 특유의 반기업정서를 이와 연관 짓는 듯합니다.

저자는 광해군의 중립 외교에 대해 "전장 최전선에서 직접 전쟁을 겪어 본 그였기에 남다른 현실 감각으로 힘의 향방을 판단했을 것"이라 말합니다. 또 병자호란 당시의 한심한 혼란상을 길게 설명합니다. 척화파 주화파 사이의 대립을 마치 구질서 집착 - 신질서 적응 사이의 대립으로 치환시켜 친미는 죽을 길이고 새로 떠오르는 중국과 친해야 그게 실용주의라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도 대략 십 년 전쯤에 있었습니다.

책에는 다양한 역사 기사가 인용되며 이를 읽는 재미만으로도 책을 고른 보람이 충분합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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