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5
세라 해거홀트 지음, 김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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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은 저렇습니다만, 사실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또 마냥 "괜찮"지도 않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닥쳤다면, 몹시도 곤혹스럽고 혼란스러우며 또한 슬퍼할 만한, 그런 일이라고나 하겠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주변 사람들이 아닌 바로 본인의 감정이며 인격이고 자존감이며 미래이겠지만 말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저벨이며 애칭은 "이지"로 불립니다. 이저벨의 친구는 그레이스이며 둘은 가장 내밀한 사정도 서로에게 공유할 만큼 친한 사이입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나이가 들고 나면 이만큼 친한 친구를 만들기가 어렵죠) 여튼 이처럼 가족 외에 자신의 곤란한 사정을 다 들어 줄 좋은, 또 속 깊은 친구가 있다는 건 분명 축복 받은 겁니다. 샘 케너라는 멋진 또래 남자애가 있나 본데 얘한테는 그레이스가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번에 이저벨의 학교에서는 뮤지컬 공연을 하는데 유명한 히트작인 <아가씨와 건달들>이며, 공교롭게도 이 둘이 극중 연인인 세라 브라운과 스카이 매스터슨 역을 맡아 그레이스가 난처하게 됐습니다(이저벨이 더 난처하겠지만 말입니다). 


 

이저벨에게는 엄마 캐슬린이 있고, 남동생 제이미가 있고, 언니 메건이 있습니다. 동생은 아직 철이 없는 듯하고 언니 메건은 얼핏 보기에 성격이 까다롭고 감정적인 듯합니다. 그리고.... "아빠"가 있습니다. 아직 틴에이저이니 아빠와 함께 사는 게 당연하지만, 이 아빠가 좀 특별한 분이라서 상황이 아주 난감하고, 힘들어졌습니다. 그것도 어느날 갑자기(이저벨에게는)...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도 좀 당황하게 되는데, 거의 초두부터 아빠가 갑자기 커밍아웃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빠(대니얼 파머 씨. 이제 성별을 바꾸기에 대니엘 파머로 이름이 조금 변합니다)는 가족들 앞에서 자신아 트랜스젠더라고 밝힙니다. 그전부터 눈물이 많고 익살스러우며 다정다감하기는 했지만 아빠가 오늘부터 갑자기 여성으로 바뀐다니요? 남자가 어느날 선언만 하면 여자로 될 수 있는 걸까요? 엄마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건지 비교적 담담합니다. 하지만 언니 메건은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렸습니다(p51). 당연하죠. 우리 입장에서도 최대한 아빠를 이해하려고 애 쓰는 이저벨이 대건해 보이지, 메건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이저벨도 "그레이스 말고,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부터 대뜸 고민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드라마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저 많은 대사를 배우들이 어떻게 다 외울까 하는 점입니다. 배우들이 특별히 머리가 좋은 걸까요? 아니면 일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이 자연스럽게 그런 결과로 배우들을 이끄는 걸까요? 어느 쪽이든 쉬운 건 아닙니다. 키가 엄청나게 큰 샘은 그레이스를 "내려다보며(p79)"미소를 짓는데, 그레이스는 <아가씨와 건달들> DVD를 빌려 주겠다고 합니다. 극을 보면 대사 외우기가 쉬울 거라면서 말입니다. 그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라도 몇 번 반복해 봐도 대사 줄줄 외우기란 정말 어렵지 싶습니다.


 

그레이스는 이지에게 말합니다. "넌 적어도 아빠가 있잖아? 그리고 아빠가 어디 먼데로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거듭 말하지만 이지가 성숙해서 그렇지, 이 일이 어린 딸에게 얼마나 당혹스럽고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레이스는 어찌 보면 더 보편적이어서 덜 당황스러울, 평범한(?) 가정 불화를 겪는 중입니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이 자녀로서 더 괴롭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지도 그렇고 그레이스도 학교에서 제일 싫어하는 애가 루커스입니다. 아주 짓궂고 장난을 많이 치며 성격도 나쁩니다. 이런 애 귀에 "이저벨 아빠가 여자래!" 같은 말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학교 생활이 어떻게 바뀌겠습니까? 아마도 아빠에 대한 감정 정리, 배신감(?), 낯설어짐 같은 것보다 현실적으로는 이런 고민이 훨씬 더 클 것입니다.

 

"이지, 갑자기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아빠는 39년만에 진짜 삶을 찾은 거야."
"그런데 아빠, 그럼 우리는 여태 아빠한테 가짜 인생이었어?"

 

그분의 선택은 물론 존중해야 마땅하겠으나, 이저벨의 저 질문에 대해 뭐라고 대답하실 지가 궁금해집니다. 젊은 시절에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셨다면, 아직 어린 자녀들을 덜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을까요? 보통 이런 경우 이성 배우자가 더 극심한 충격을 받고 상처를 달래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이는 지금까지 배우자로 살아온 이에게 결과적으로 못할 짓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닐까요? 

 

직장에서도 문제입니다. 여기서 고용주로 보이는 "마크 아저씨"는 상관 없다고 했답니다. 이해심 넓은 분입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고용주가 이분처럼 오픈된 마인드를 갖고 있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우리 주변 사람들의 평균적인 이해심과 아량과 도덕성, 성숙을 고려하고 행동해야만 합니다. 만일 이들의 우리 기대에 못 미친다면? 이 역시 주어진 조건이고 운명입니다. 온 세상더러 날 위해 바뀌어 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저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여튼 메건은 가장 큰언니(누나)인 만큼 계속 징징거리진 않습니다. 중요한 건 아빠(였던) 대니엘이 성별만 바꾸고 계속 같이 살 거니까, 이제 뭐라고 부를 거냐는 건데... 일단 이름도 D로 시작하고 대디라고 부르던 지난 십 년 동안의 버릇도 있고 약간 여성스럽기도 해서 "디"라고 부르면 어떨까라는 겁니다. 디! 하.... 대디가 아닌 디! 안타깝기도 하고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이것이 삼남매가 합의한 결과입니다. 사실 큰일이 닥친 건데(적어도 저에겐 그렇게 보입니다) 마치 별 일 아니라는 듯 의연하게 대처해 나가는 삼남매가 기특합니다. 


 

우리는 용어를 좀 조심할 필요가 있는데(매너의 문제죠), 일단 아빠, "디"인 대니엘을 포함해서 이제 주변 사람들은 "섹X"라고 써야 할 자리에 "젠더"라는 말을 씁니다. 물론 둘은 동의어가 원래 아니지만, 많은 경우 경계선상에 있을 때 젠더라는 말을 대신 써 주면 분위기가 더 부드러워지고 더 바람직한 용법이 되곤 합니다. 그레이스도 "섹X 체인지" 대신에 트랜지션이 맞다고 어디서 배워 와선 알려 줍니다. 

 

소설 중반쯤에 충격적 내용이 하나 나옵니다. 루커스 같은 녀석이 말썽을 피우는 건 뭐 그러려니 합니다. 무시하면 되죠. 그런데 이지가 충격을 받은 건.... O의 OO도 역시 OOOO이었다는 사실입니다!(스포라서 가렸습니다) 자 그런데 난감하게 된 건 그레이스입니다. 둘이 너무도 놀라운 팩트 하나 때문에 공감대가 생긴 것뿐인데 둘 사이를 오해한 거죠. 그렇다고 진실을 밝힐 수도 없고... 참 미칠 노릇입니다. 

 

하 그런데... 비밀 하나를 알게 되니 다른 비밀(인지 아닌지 모르지만)도 눈에 들어옵니다. 토머스 선생님은 이곳 출신이 아닌데 왜 여기서 교사 생활을 하는 걸까요? 고향을 멀리 떠날 사정이 있었던 걸까요? 왜 부인도 없고 자녀도 없는 걸까요? 알고 보면 세상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처지이기만 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뭔가 한 가지 이유 정도로는 비정상(?)인 겁니다. 비정상과 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여튼요. 

 

또 어려운 게 종교 문제입니다. 그레이스는 교회를 다니는데 이 교회의 담임인 존슨 목사(p247)는 대니엘 파머 같은, 혹은 O의 OO 같은 성전환자를 결코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런 종교 문제가 또 걸리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이중삼중으로 어려운 거죠. 

 

뮤지컬 공연은 성공입니다. 그리고 이지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너희 가족은 정말로 특별하구나. 그리고 너 이지, 네가 얼마나 특별한 아이인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설은 "큰 재앙이 닥친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끝났다"는 이지의 말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어디 그렇겠습니까? 이지 정도나 되니까 상황에 잘 대처하고 승리자로 남은 것입니다. 그 용기와 지혜에 박수를 보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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