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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버스 ㅣ 특서 청소년문학 20
고정욱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5월
평점 :
작가 고정욱 선생은 그간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로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 작가죠. 간만에 선생의 신작을 읽게 되어 무척 즐거웠습니다.
사실 외국인의 이름은 발음만 들어서는 쉬 짐작하기가 힘듭니다. p39에서 지강이는 영어 교사 크리스틴을 검색하는데 그야말로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격입니다. K인지 Ch인지도 헷갈리는데 이건 학생이라서라거나 영어가 서툴러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겠습니다. 그래도 "Mc이라는 성을 보니 아일랜드계임"을 아는데 정말 유식하네요. McGee라는 이름은 미드 NCIS의 고정 캐릭터이기도 하므로 "맥기"라는 발음이 한국인에게도 익숙할 듯합니다. 강세가 뒤에 있죠.
p41에서 아이들은 합창부 선생님에게 "이런 오래된 팝송 구리다"며 아우성을 칩니다. 그 노래는 "마더 오브 마인"인데 아마 작가 고 선생님이 어렸을 무렵 많이 학교에서 가르친 노래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오래된 게 문제가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강조하는 주제는 좋지만, 선율이 너무 축 처지고 궁상맞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명곡이긴 하죠.
지강이는 미국에 건너간 엄마를 그리워하는데 그 이름은 이민정, 영어 이름은 제니퍼 리 하트입니다. 요즘은 결혼 전 성씨를 미들네임처럼 쓰곤 하죠. 하트라는 서네임이 저리 붙었다는 건 재혼을 눈치챌 수 있는, 그것도 미국인과의 재혼이 이미 이뤄졌음을 알 수 있는 단서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지강이는 아빠가 화가 나서 마구 떠드는 말(p55)을 듣고서야 비로소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지강이하고 사귀는 공인커플인(p7) 은지 역시 가정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는 엄마를 찾아가는 건 아빠가 싫어서입니다. 지강이는 은지와 헤어지며 "아빠한테 맞지 말고"라고 격려하는데 이 부분은 처음에 저는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몰랐습니다. 바로 앞에 지강이가 자기 아빠한테 맞는 장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강이한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객관적으로 봐서 지강이 엄마가 남편을 배신한 건 맞아 보입니다. 가뜩이나 사장한테 공사대금도 떼어서 형편이 어려운 아빠로서는 많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아들을 때리거나 폭언을 하는 건(말이 너무 심합니다) 잘못입니다. 아니 자신의 아들이 ㄱXX이면 자신은 그럼 뭐가 된다는 뜻인가요. 어른이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죠.
둘이서 황금연휴를 맞아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는데 도중에 비 때문에 도로가 유실되어 고속버스에 갇혀 있다시피합니다. p73에 군인들이 도로를 복구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뜬금없지만 군인들의 노고에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강이 아버지도 건설업 하는 분인데 도중에 도로 부실공사를 성토하며 승객들이 건설업 하는 이들을 싸잡아 비난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도 건설업 한다며 전체를 매도 말라고 항변합니다.
여기서 이분, 즉 말솜씨 구수한 34번 승객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겠다며 마이크를 잡습니다. 지금부터 1983년 사우디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하던 김상복이라는 분의 사연이 시작되는데, 이 책 제목이 "스토리텔링 버스"라고 붙은 이유를 p77까지 읽고서야 비로소 저는 알았습니다. 저는 책을 펴 읽기 전까지 이 책이 소설 작법을 가르쳐 주는 책으로 사실 착각을 했더랬습니다.
"아쌀라무 알리이쿰"은 한 명한테 건네는 인사도 문법적으로 복수형(=당신네들)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죽고 나서 만나야 할 두 명의 천사까지를 염두에 둔 이유(p86)라고 하는데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여튼 김상복씨에 대한 사연(액자 내 스토리)은 엄청 재미있는데(한편으로 슬프지만 말입니다)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더 재미있는 건 지강이와 은지가 34번 승객이 들려 준 이야기로부터 "남자(혹은 여자)는 평생 책임만 지다 끝나는 불쌍한 인생"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논쟁이 붙었다는 겁니다. 지강이는 <레미제라블>을, 은지는 <여자의 일생(모파상 作)>을 근거로 끄집어내는데 둘 다 문학적 소양이 보통 아닙니다. 우리들 같으면 여기서 고전 문학을 자신의 논거로 대뜸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p99에서는 군인들이 잠시 버스에 올라와 승객들에게 우유를 나눠 주는데 이건 뭐가 거꾸로된 것 같습니다. 아니 대민지원 수고를 하는 건 군인들이고 그들 역시 남의 집 귀한 자제들인데 대접을 받지는 못할망정 이런 수고까지 해야 하다니... p100에는 다행히 군인들의 노고를 고맙게 여기는 말들이 나오네요.
p102부터는 24번 승객의 이야기가 새로 펼쳐집니다. 하동구(예의 24번 승객의 이름인 듯)의 부친, 하태우, 하태은 이렇게 3형제가 1960년대를 산 이야기입니다. 1960년대에 어린이였던 하동구이니 지금 24번 승객의 나이가 대충 얼마일지 짐작이 되죠. 집안을 일으킬 수재로 기대를 모았던 둘째 삼촌이 ROTC 장교로 광주에서 복무하다 집안과 상의 없이 어느 여인과 살림을 차리고 아이까지 낳습니다. 큰형은 끝내 동생의 결정을 인정 않고 제수씨를 박대했나 봅니다. 그런 삼촌(하태우)이 얼마 전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작은어머니는 시가와 인연을 완전히 끊는데 그 입장이 이해는 됩니다. 다만 끝내 식은 못 올렸다고 하는데 서울대 출신 장교로서 안보 전문가였다면 이게 가정 형편 때문일 수는 없죠. 아마도...
여튼 여기서도 은지는 "그래도 그분은 자식들은 끝내 다 책임을 지고 잘 키웠는데 우리 아빠는 뭐냐"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지강이가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위로를 옆에서 해 주네요. ㅎㅎ
p113에는 김청강 작가라는 분이 19번 승객의 입을 빌린 스토리에 등장합니다. 장르는 다르지만 아마 고 선생님 본인도 모델이 되었음직한 캐릭터네요. 네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등장하는데 실존인물 희아님도 연상이 되죠? 중구삭금이라는 사자성어도 나옵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 데 모이면 안 이뤄질 일이 없습니다.
이어서 헌팅캡을 쓴 어느 카피라이터의 스토리가 나오네요. 다소 억울한 일을 당한 은행이 이 카피라이터에게 연줄(친구 복 과장)을 통해 호소문 집필을 의뢰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밥 한 끼"라는 말을 듣고 김 카피님은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를 혼동"했다면서 천만원을 고료로 안 주면 응하지 않겠다고 거절합니다. 결국 서류를 잔뜩 내고 계좌까지 개설한 후 5백을 받고 작성해 줬다는 이야기로 끝난 줄 알았는데... 반전이 있네요!
(사실 반전까지는 아니고... 세상사가 다 이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편하게 결과가 좋으면 다 좋겠거니 넘어가지만, 그 비하인드 스토리까지를 다 알면 심사가 결코 편하지 못하죠....)
여튼 비 때문에 끝내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지강과 은지는 어느 분의 호의를 얻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책임, 책임... 이 단어를 자꾸 되뇌는 걸로 봐서(또 작가 후기까지 보니!) 아무래도 두 청소년은 당일 어떤 일을 저지를 작정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결국 둘은 잘 판단했고... 어차피 콘도(p65)에 가서 아빠 신분증과 카드를 내밀어도 안 받아 줬을 겁니다. 여튼 잘 생각했고, 둘이 앞으로도 건전하게 미래를 설계하게 응원하고 싶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