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꾼들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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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이 생긴 지 몇 년 안 되었을 무렵에도, 홈페이지에서 베스트셀러라고 맨 앞에 내세운 책들은 언제나 관심을 모으곤 했습니다. 그 중의 한 권이 바로 이 제프리 유제니디스가 쓴 <미들섹스>였는데 지중해 특유의 기후와 풍토 때문에 발성하는 간성인들을 소재로 하여 젠더 이슈를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는 다른 작가가 생각도 못한 소재를 골라잡아 희한한, 기발한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막판에 의외의 감동을 주고 마무리짓는 실력이 있는데 이 신작도 마차가지였습니다.

자그마한 사람의 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체액이 담겨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미스테리물에서 자상을 입은 사람 몸에서 끝도 없이, 또 맹렬한 기세로 솟구치는 피, 피를 생생하게 묘사한 대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멋진 작품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의 몸은 비록 자그마하지만 어떤 우주와도 같습니다. 병에 걸린 몸이라면 더욱더, 병균이나 바이러스 등 온갖 미생물을 다 품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대체 언제, 자신의 장기와 피부와 조직으로부터의 그 내밀한 느낌에 익숙해질까요? 아플 때입니다. 그때는 내부의 온갖 장기가 보내는 신호와 외침과 호소에 하나하나 개별 반응이 가능해집니다.

사람은 갈데까지 가서 바닥을 보는 순간이 있습니다. 물론 인생에 있어 한 번도 이런 순간을 안 거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제 가진 모든 것을 잃고 허름한 여관방으로 도피하여 남은 날을, 남은 몇 푼의 돈을 세는 사람, 과연 이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남았겠습니까? 그러나 벼랑 끝에 매달려서도 한 떨기 열매를 핥으며 최후의 도약과 기적을 꿈꾸는 게 우리들 못난 인간의 심리입니다.

성(性)은 무의식의 영역이자 원초적 본능이 똬리를 튼 본진입니다. 학계에서 오늘 각광 받던 이론도 내일 차가운 뒷방에 묻힐 수 있으며, 한 문명이나 사회에서 두루 통하는 원리도 다른 경우에 일반화할 경로가 차단당할 수 있습니다. 학자는 끝내 자신의 이론을 굽히지 못하고, 다시 학계로 화려히 복귀하게 도와 줄 논거를 찾아 부족 사회로 향합니다. 그들과 소통하며, 혹은 갈등하며 그가 마주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남과 여가 만날 때 마주하는 보람은 그저 성적 쾌락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설계하며 현재의 자신들이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하늘 끝까지 솟은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젊은 커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허나 험난한 세파는 그들을 순수한 처음의 모습으로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결혼은 현실"이라고들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밀려오는 환멸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이 마지막 전투는 공동으로 치러야 할까요, 아니면 각자의 몫으로 남겨야 할까요?

순수한 야망과 성실함을 과시하며 죽어도 살아도 조직과 운명을 함께하리라는 각오가 신입 시절에는 누구나 있습니다. 아니면, 그저 호구지책이나 마련하자는 안일한 생각에 잠시 몸 좀 담자는 생각으로 회사에 들어오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겁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도시의 화려한 삶은 많은 지출로 누구나를 유혹합니다. 때로는 절실한 소용도 있겠으나 욕심의 편차는 끝에 가서 비슷한 지점으로 수렴합니다. 아무 야욕 없이 순치되어 살다가도 "언제까지 푼돈에 목매며 비루한 삶을 살아야 하나?"며 울컥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누구나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어이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의 모습이기만 할까요?

이 책에는 모두 열 편의 단편이 실렸습니다. 유제니디스답게 내러티브는 기괴하면서도 솔직하고, 읽다 보면 아니 이게 과연 누구 이야기일까 싶게 무서운 템포로 독자를 주인공들에 공감시킵니다. 희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내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작품 속의 인물을 통해 미리 백신을 맞히고 현실에서의 사고를 예방하는 것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외에 또다른 보람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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