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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1 ㅣ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평점 :
사람이 지은 문명이란 덧없고도 위대합니다. 그런 문명의 과거와 현재, 또 본질과 속성을, 어느 영리한 고양이의 눈으로 지켜 보는 체험은 매우 흥미롭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고양이 바스테트인데, 그녀(암고양이이므로)는 마치 사람처럼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부심이 강하며 깊이 있는 사고...도 가능합니다. 고양이들은 대개 무리를 지어 지내는 편이 아니지만, 주인공은 남친 피타고라스를 비롯해 여러 명과 친분이 두터우며, 인간 집사들하고도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그녀의 행동과 말을 지켜 보면 좀 별나다 싶긴 한데, 그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습니다(2권 p158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네요).
1권에서 고양이와 인간이 함께 누리는 어느 공동체는 무서운 쥐떼들의 습격을 받습니다. 1980년대 어느 B급 호러 무비에서는 엄청난 쥐떼들이 몰려와 사람 사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설정이 있었는데 그 우두머리는 온몸이 흰빛인 쥐였습니다. 혹시 작가 베르베르도 그 영화를 본 적이 있었을까요? 이 소설에서는 티무르 랑, 영어로는 타멀레인(크리스토퍼 말로 원작의 희곡도 있습니다)이라 부르는 14세기 정복자의 이름을 딴 어느 쥐가 나와 파라다이스라는 곳을 포위합니다.
"포위", 즉 siege는 인류 역사를 바꿔 놓은 엄청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이 책 1권에도 p120에 카이사르 관련하여 알레시아 포위가 나오고, 한반도의 고구려나 조선도 안시성 싸움, 남한산성 포위라는 대사건이 있었으며, 유럽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빈 포위가 있었고, 15세기에는 알탄 칸의 북경 포위가 있었습니다. 이런 포위는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는데 전염병 때문에 질서와 평온이 무너진 (이 책 중의) 세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그까짓 쥐 따위가 아무리 많이 몰려온들 뭐가 겁날 게 있겠나 싶지만 티무르는 인간의 실험 때문에 능력이 특별해진 상태입니다. 또 전염병 때문에 인간들은 종전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파라다이스는 포위되고 주인공들은 빠져나가 구원을 요청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때 기발한 꾀를 내는데 열기구를 이용해 하늘로 길을 내어 포위를 뚫는 방법입니다. 작가 베르베르는 세계 최초로 열기구를 발명한 프랑스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이 발동했을 법도 하고, 뭐 사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다른 뾰족한 묘안이 없기도 합니다.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 백과사전 여러 항목이 중간중간 인용됩니다. 정복자 티무르는 우리가 중고교 세계사 시간에 배워서 익히 아는 인물이지만 이렇게 로망 웰즈(사실은 베르베르 자신?)의 버전으로 다시 바라보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행적을 남긴 인물임이 재확인되네요.
p134에서는 "모순적인 인간들이 지도자로서 지지를 받는다"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는 신뢰성 있는 인물이 아니라, 나중에 책임도 못 질 장밋빛 공약을 남발하는 선동가들이 오히려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어 나라를 망치곤 하는 현실을 잘 짚은 한마디 같습니다. p144에서 주인공은 인간들더러 "저렇게 감정을 숨기는데 어떻게 소통이 가능한지 궁금"하다고 합니다. 고양이는 그렇지 않고, 특히 이 소설 앞부분에서 암고양이인 주인공은 자신이 얼마나 관능적으로 수컷을 유혹할 수 있는지 매우 현란한 말솜씨를 뽐내며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바스테트가 좀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이라면) 사람들도 만만치 않거든요? 고양이로서의 한계 때문에 아마 집사들의 화려한 스킬을 감지 못 한 것 같습니다.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으면 그 박학다식 덕분에 상식을 배우는 게 많아지는 우리 독자들입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건 양력 외에도 여러 물리작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데, 이 1권에는 고양이가 높은 데서 추락해도 왜 대체로 안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저도 혹시 나중에 고층 건물에서 추락할 일이 있으면 (이 1권에서 설명된 대로) 사지를 쫙 펴고 마지막에 네 팔다리로 충격을 최대한 흡수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뭐 어차피 밑져야본전 아니겠습니까.
p241에는 파툼, 즉 숙명, 운명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어느 트롯 가수의 노래 제목 "아모르 파티"에서 fati도 바로 이 단어의 속격(=소유격, 2격) 형태이죠. 한 페이지 뒤에 막카리 고살라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그는 "어차피 인간은 숙명대로 흘러가며 자연히 해탈에 도달한다"는 가르침을 폈습니다. 이 역시 심오한 결론이나, 우리 귀에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설법, 즉 사소한 행동도 인과 연의 교란을 부른다는 자유의지 중시의 관점이 더 울림 깊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불교가 수천 년을 살아남은 고등종교가 아닐까 생각도 해 봅니다. 사람이 그저 운명에 종속되는 존재라면 그 존엄이 덜해지는 결과 아니겠습니까. (코를 곯다x 코를 골다o p275)
p66에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어원이 파리시 종족에서 왔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저술가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그 기원이라고 했는데 우연의 일치로 철자가 같습니다만 근거 없는 이야기였죠. p311에는 felix와 feles가 발음, 철자 모두 비슷한 우연 때문에 felicity로 말장난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로 고양이와 행운은 라틴어에서 어원이 다릅니다(서로 무관). 베르베르의 소설은 (거듭 말하지만) 이런 좋은 상식이 늘어서 유익하기도 합니다. p317에는 동아프리카 차보에서 식인 사자가 출몰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1998년에 마이클 더글라스, 발 킬머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p314의 거울 뉴런 이야기는 역시 베르베르다운 이지적인 통찰이 돋보입니다.
p46에는 서(鼠)해전술이라는 말이 있고, p136에는 안하무묘(猫)라는 말이 나오는데 인해전술, 안하무인 등의 사자성어를 재미있게 비튼 것입니다. 번역의 묘가 돋보였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