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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 자본주의의 배신 - 주주 최우선주의는 왜 모두에게 해로운가
린 스타우트 지음, 우희진 옮김 / 북돋움coop / 2021년 4월
평점 :
자본주의의 시스템적 취약점을 지적하는 논의는 심지어 마르크스 이전에도 있었고 그때마다 시스템은 허술한 곳을 보완하며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셰어홀더가 아니라 스테이크홀더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가 기업에도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주장도 꽤 오래 전부터 있었고 故 린 스타우트 교수의 이 저작도 9년 전에 출판되어 큰 반향을 불렀던 바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강수돌 고대 교수 같은 분이 이 주장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p31에는 딥워터호라이즌의 파멸적 사고(事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 이 책이 나올 무렵에는 없었겠으나 그 후 이 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도 만들어졌고 요즘도 케이블 채널에서 자주 방영하는 편입니다(같은 제목). 또, 요즘(특히 요 몇 달)은 한국 조선 해양주가 아주 잘나가는 편이지만 한때 아주 긴 암흑기가 있었는데 조선 해양업의 불황 요인 말고도 한국 조선업계가 해양 플랜트 제조에 운명을 걸고 엄청난 투자를 했으나 저 딥워터호라이즌 사고 때문에 치명타를 맞았습니다. 해양플랜트로 앞으로 수십 년 먹거리를 마련하려던 비전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거죠. 당시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은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갔고 정몽준 씨도 정치적 실책 외에 이게 큰 영향을 끼쳤더랬습니다.
이 한국어판에서는 셰어홀더 밸류((shareholder value. 이 책 원제의 일부이기도 한)를 "주주가치"라고 번역합니다. "주주의 부를 극대화하는 것", "인센티브(p34)의 망령" 때문에 기업은 여러 무리수를 두게 되고 구제기관과 입법의원들에게 로비하여 "CDS, 기타 여러 고위험 파생상품에 회사가 투기하게 하여 단기에 고소득을 올리(p34)"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로비에 든 금액의 본전을 뽑고도 남는 거죠. 이런 사고방식은 "주주 최우선주의"라 불렸는데 저자는 이 용어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합니다. 왜? 주주 절대주의, 혹은 주주 독재주의라 부르는 게 더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군요. 주주 최우선주의의 원어는 "셰어홀더 프라이머시(shareholder primacy)"입니다(p36).
그래서 저자는 셰어홀더 밸류가 아닌, 스테이크홀더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 필요(p36)하다는 것인데 물론 故 린 스타우트 교수가 당시에 최초 주장한 건 아니고 저자 역시 "일부 학자와 사회 운동가의 주장"이라며 유보하고 있습니다. 일부 사회 운동가만이 옹호하는 게 아니라,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잭 웰치 같은 사람도 "주주가치는 가장 멍청한 개념"이라며 비판한 적 있다고 합니다. 마치 1차 대전이 끝난 후 역전의 명장들이 "전쟁이야말로 인류가 벌이는 가장 멍청한 짓"이라며 깊이 회의적 태도를 표현한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전쟁이다 투기적 기업행위이다 등으로부터 가장 이익을 크게 보고 실제 능력을 발휘한 사람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까 설득력이 더하죠.
여튼, '일부 학자와 사회 운동가의 주장"은 이 책에서 저자의 주장으로 구체화, 체계화, 종합화되며 p127에 일부가 요약되고 이후 책 2부에 상세히 펼쳐집니다. p127을 여기 잠시만 요약하면
1) 주주가치 지상주의는 주주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다.
2) 통념과 달리 기업은 실재(實在) 단위이며, 오히려 주주가 허구이다.
3) 주주의 이해, 관심은 통일되지 않으며 실증적 데이터로부터 오히려 이쪽을 예외가 아닌 정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저자는 "이제는, 주주 가치적 사고가 심지어 주주 자신들에게조차도 피해를 입힐 수 있다(p42)."는 가능성에 주목하자고 합니다. 일단 단일한 주주 개념조차도 의문이 있습니다. 책에 나오듯 어떤 사람은 단기 차익을 노리고 해당 주식을 보유하며, 어떤 사람은 장기 투자 목적입니다. 과연 수많은 주주들 중 누구의 이익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마치 정치인들이 "국민의 목소리 대변"을 내세우지만 국민도 의견이 천차만별인데 대체 누굴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가 모호하듯 말입니다.
저자는 이어 저 딥워터 호라이즌 사고 같은 것은 어떤 특정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그러면 그 사람에게만 민형사 책임을 물리면 됩니다). 잘못된 사고(思考. idea)의 책임(p46)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회 통념이 잘못된 채 계속 머물러 있으면 같은 사고가 (설령 누구한테 호되게 책임을 물린다 해도)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왜 주주가치 절대의 사상이 이처럼 만연하게 되었는가? 20세기 초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사회 이념 중 하나로 대두하면서입니다. 대주주를 겸한 경영자는 이익 창출 외에 기업 지배 구조 강화, 혹은 비자금 형성, 은닉 등 다른 목적(p58)에 신경 쓴다면 이는 대리인 비용을 발생시켜 결국 기업을 부실화하고 투자자에게 배임이 된다는 건데 어느 경제학 교과서에도 다 나올 만큼 유명한 이론입니다.
그러니 대주주 겸 경영자(이른바 "오너")의 전횡을 막고 기업 자체의 내실을 다져 사회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전문 경영인" 제도를 도입하여 가문 경영의 악폐를 방지하고 성과만을 극대화하여 경쟁력을 높인다는 생각 역시 흠 잡을 데 없이 여겨졌고(책에는 1970년대 밀턴 프리드먼의 유명한 말도 인용됩니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기아자동차가 김선홍 회장에 의해 경영될 때 기적 같은 모범 풍조로 칭송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문 경영인 제도도 이른바 이해상충 대리인 이슈가 있죠(p144도 참조). 조금 뒤 p83에는 "주인-대리인 모델"에 의해서"도" 주주가치 절대주의는 잘못이라고 저자는 논증합니다. 이 논증은 pp.89~106인 제3장에서 아주 자세히 전개됩니다.
저자는 코넬 로스쿨 교수였는데 지금 이 주주가치 절대시 사조는 시카고 학파에서 주도해서 퍼뜨렸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이 무렵 크게 성행한 게 "법경제학"이었는데 이 학문으로 학위를 따 귀국한 교수님들은 지금도 꽤 보수적인 스탠스입니다. pp.64~65에서 저자는 "사실 1990년대~2000년대 초반 입법이나 학문적 태도는 이 주주가치 지상주의라는 걸 공식화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부분은 원문이 모호한 걸 역자가 맥락을 분명히해서 옮기고 있습니다. 한스만과 클락만의 글 <기업법 역사의 종말>은 p63, p87, p127(이 페이지는 뒤 색인에 빠져서 제가 추가합니다) , p163 등에서 여러 번 거론되고 때로는 일반의 "오해"를 (이 저자가) 바로잡는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세어홀더의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는 사상은 아주 최근의 것이 아닙니다. 닷지 대 포드 사건은 20세기 초반에 있었는데 법원은 주주인 닷지 형제의 이익을 더 중시하여 포드 사에 배당금 지급을 명령했습니다. 저자는 널리 인용되는 이 사건이 결코 주주이익 지상주의가 아님을 지적(p72)하며, 당시 포드는 비상장기업이었음을 환기합니다. 상장기업, 즉 공개기업은 이와는 전혀 다른 논리(첵에서는 전혀 다른 종[種]이라는 말도 나옵니다)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공개"기업이라야 그에 따른 사회적 이해(stake) 관계자가 (더 넓은 범위로) 있을 수 있겠죠. p76에는 유노컬 vs 메사페트롤리엄 사건을 거론하며 판결문에 "주주 외의 구성원에게 끼치는 영향 고려 가능"이라는 문구를 인용합니다. 이 구성원 개념에, 저자는 "어쩌면(p77)" 사회 공동체 전체를 포함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 주인 대리인 모델에서도 주주가치절대주의는 틀렸는가? 첫째 주주는 기업 자체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아주 제한된 권리인 주식 몇 주를 소유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블랙 앤 숄즈 모형은 주주와 채권자의 관계가, 옵션(풋 앤 콜)을 사고팔 뿐이라는 점을 논증하여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 이론의 함의를 저자는 "주주가 독점적으로 기업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채권자도 그 유사의 권리가 있다"로 해석합니다.
둘째로 주주를 "잔여재산 청구권자"로 정의하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반대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사회가 지급을 결의해야 주주가 돈을 받을 수 있는데 당연히 무제한의 청구권 같은 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핵심은 "잔여재산" 즉 최후순위라는 것인데 저자가 너무 "청구권"에만 초점을 두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독자로서 조금 듭니다.
셋째로 의결권, 소송권, 주식 처분권은 아주 제한된 권리일 뿐이므로 이걸 가지고 "주주는 주인, 이사회는 대리인"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선관주의 의무(fiduciary duty) 위반을 소인으로 한 소송권 역시 그리 적용 범위가 크지는 않다고 합니다. 일반 투자자는 그저 합리적 무관심(p117)에 빠져 있기에 주주 행동주의(p101)는 더욱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물론 책에서 논의되는 기술적 설명은 모두 타당하지만 그것만으로 주인 - 대리인 관계가 간단히 부정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게 독자로서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 또 앞의 둘째 논거에서도 그러했으나, 저자는 어차피 이 역시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는 "이사회"의 권능과 자격에 대해 좀 과대평가하고 있지 않냐 하는 느낌을 저 개인적으로 지울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교수는 기업의 사외 이사로 의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겠으니 말입니다.
IT 혁명으로 인해 종래의 정보 비대칭성 이슈는 상당 부분 변모를 겪었고 많은 이들이 종전보다 더 쉽게 증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정보 비대칭성 이론은 증시만을 설명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저자는 여전히, 특정 정보는 특정 이유로 인해 늦게, 불편한 채널로 전달된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여 차익거래(알비트리지)라는 게 현실에서 잘 실현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이번 비트코인 폭등 사태 때 왜 한국에서만 유독 프리미엄(이른바 김프)가 붙어 거래되었는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 행동금융학은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이유로 의사 결정을 하는 수많은 패턴을 보여 줍니다. 행동금융학은 일반 대중들도 잘 아는 행동경제학의 일부이죠.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표현도 p146에서 씁니다.
주식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주가는 기업의 미래 가치 반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바로 어닝 서프라이즈 발표가 나도 사람들이 해당 주식을 팔아치우기도 하며, 반대로 어닝 쇼크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그리 크게 떨어지지 않기도 하는 게 다 이 때문이죠. 이 때문에, 경영자는 단기 투자자(장기 투자자가 아닌)들과 매우 불건전한 공조를 형성(p150)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CEO가 단타쟁이들 좋은 일 시키려고 기업 내실을 다질 생각은 않고 회계 조작이나 이슈몰이를 통해 주가 부양에만 골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뭐 이 말도 맞는 게, 우리나라에서도 네티즌들이 네이버 일부 종토방 같은 데서 "저분은 사업은 안 하고 주식장사만 한다"며 비판하곤 하는 게 다 이런 걸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적어도 저자의 이 지적은 지극히 타당하며, "장기 투자자와 단기 투자자의 이해가 갈릴 경우 이는 다이너마이트를 미끼로 삼은 낚시와 같다(p116, p151)"는 멋진 말로 요약됩니다. 이 악영향이 거시 경제에의 손실로 이어진다고 저자는 덧붙입니다.
우리가 "락인(lock-in)"이라고 할 때 보통 한국 증권가에서는 기관투자가나 대주주의 보호예수물량만을 가리키지만 사실 이 말은 그보다 훨씬 뜻이 넓죠. 저자는 마거릿 M 블레어 교수를 인용(p157)하여 "투자자의 돈은 자유롭지가 않고 기업법인에 묶인(=락인)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마거릿 블레어 교수는 밴더빌트 로스쿨에 재직 중인 분입니다.
저자는 사후(ex post)의 결정이 사전(ex ante)와 동일하게끔, 마치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묶여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처럼, 일부 주주들이 초심을 지키며 다른 주주나 채권자, 일반 대중의 이해를 침훼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제6장에서 논합니다. 즉 저 앞 p101에서 거론된 주주의 3대 권리 중 주식 처분권을 제한하자는 거죠. 쉽게 말해서 일반 대중도 기관투자자나 대주주처럼 락인을 걸자는 겁니다. 이게 저 앞 p124에서 저자가 암시한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p103에서 저자는 적대적 인수합병 역시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었죠. 저명한 변호사인 마틴 립턴은 포이즌 필 창안자 중 한 사람이긴 하지만 이미 고령인데 "우버의 기업 변호사(p103, p146)"라는 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 이렇게 락인을 강화하면 증시 전체가 위축될 위험이 있고, 채권과 주식 사이의 제도적 구별이 모호해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채권도 거래 자체는 아주 자유롭죠.
대부분의 주주는 사이코패스도 아니고(p197) 하이드씨(p199)도 아닙니다. "실재하지도 않는 주주"의 허상에 갇힐 게 아니라, 선의를 가진 대다수의 주주와 이해관계자들이 협업하여 진정한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결과를 낳자는 게 저자의 제안인 듯합니다. p212에서는 나심 탈레브의 <블랙 스완>을 인용하여 "주주 가치라는 신화"를 다시 공박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일관되게, "기업은 실재하며 주주가 허상"이라고 하지만, p207에서는 리젯 대 리 판결에서 브랜다이스 판사가 "상장기업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라 부른 걸 두고는 거꾸로 주주 개념의 허상성을 지적한 걸로 해석하는 듯합니다.
"주주 가치 이데올로기는 주주를 가장 낮은 수준의 인간으로 취급한다(p213)." 즉 이 관념이 장기투자자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기회주의자, 단타쟁이에 더 초점을 두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하는 거죠. p223에서는 케인즈의 유명한 말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를 거론하는데 여기서도 저자는 "죽은 경제학자가 남긴 아이디어의 끈덕진 생명력"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인용하는 겁니다. 토드 부크홀츠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 책에는 SRI 펀드가 여러 번 거론되는데 원서 출간 연도가 2012년임을 감안해야겠습니다. 요즘 같으면 ESG펀드를 이야기했을 겁니다. 아무튼 이런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요즘 트렌드 중의 하나이니 일반 독자나 투자자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