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들은 페미니스트로 자랄 것이다
오렐리아 블랑 지음, 허원 옮김 / 브.레드(b.read)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래도 페미니즘의 원조는 프랑스입니다. 파리고등사범에서 차석을 차지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당대 지성인들과 대중에 큰 지적 충격을 안겼습니다. 이 책의 저자 오렐리아 블랑이 많은 기고를 한 저널 <코제트>는 "프랑스 여성 간행물의 법칙을 바꾸었"으며 "프랑스 페미니즘의 르네상스"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이 책 책날개).

어떤 사내애라고 해도 어머니의 따뜻한 보호를 받고 자랍니다. 그러나 일정 연령이 되면 부모의 보살핌보다는 또래 집단으로부터 더 압도적인 사회화의 세례를 받기 마련인데, 이때 사내아이들은 여성에 대해 때로는 끔찍한 편견, 왜곡된 지배욕이 묻어나는 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이게 그저 멋있어 보이려고 과시성 심리로부터 배설된 생각 없는 멘트이건, 혹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주워들은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이건 간에, 이런 말을 듣는 어머니의 마음은 매우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남성 지배의 실체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한다(p12)." 그러므로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 해도 그가 페미니스트로 거듭난다, 혹은 새로이 각성한다는 건 전혀 언어적 모순이 아닙니다. 어떤 성이 다른 성을 합리적 이유 없이 "지배하려 드는 것"은 분명한 폭거이며, 그런 독재, 전근대의 폐습은 마땅히 극복되어야 하죠. 이런 세계관에서는 모든 이가 페미니스트로 거듭나야 세상이 깨끗한 모습으로 정화됩니다. 물론 이는 모든 이를 위한 정의이며 평등이어야지, 비뚤어진 또다른 지배욕을 관철하고 현실화하기 위한 정치적 책동이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제발 남자답게 행동해라. 강하고 거칠어져라(p16)." 이런 식의, 비뚤어지고 위험천만한 사회화가, 무방비상태에 놓인 사내아이들을 향해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사실 나쁜 짓은 남성들로부터만 행해지는 건 아니어서, 폭력적이고 무책임하며 선동적이고 사회를 분열로 이끄는 언행은 놀랍지만 여성으로부터도 생산되며 매우 유해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들 역시 어찌보면 남성 중심 차별적 사회 구조의 희생양으로서, 크게 보아 남성들이 일단 원죄 의식을 갖고 문제해결에 전향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죠.

요즘은 한국에서도, 초음파검사를 하고 나서 오히려 아빠들이 "딸"이란 소식에 안도하며, 몇십 년 전처럼 성감별을 통해 여아를 중절하는 한심한 풍조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 책 저자는 검사 결과 태아의 성별이 "남"임을 눈치 채고 오히려 실망했다고 합니다. 만약 딸이라면 앞으로 어떤 세계관을 전수하고, 무엇을 공유하고... 등에 대한 계산이 섰었는데, "아들"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맞이할 생각을 하니 막연했다는 겁니다. 하긴 한국에도 요즘은 유독 아들 키우기를 힘들어하는 엄마들이 있습니다. 그런 엄마들이 이 책 저자처럼 철두철미한 페미니스트라는 보장이야 물론 없으나, 아마도 이 책 저자와 이론적인 면 외에 많은 대목을 공감하거나,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까도 짐작해 봅니다.

"지나치게 페미니스트적인 방법으로 양육하는 걸 두려워한 나머지, (결국) 충분히 페미니스트적인 방법으로 양육하지 못했음(p40)"을 후회하는 게 카미유 마스클레 같은 이들이 분석한, 전 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입니다. 그러니 마스클레나 이 책 저자 같은 분들은 이른바 "세컨드 웨이브 활동가"에 속합니다. 그들 전세대 활동가들은 일단 "여전히 이 사회는, 가부장제라는 안락한 담요를 마련하여 남자아이들에게 들어가라(p41)"고 부추기고 있다는 현실을 개탄하고 또한 자책합니다. 이들이 이런 반성 하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 키울지에 치열한 고민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돼지"는 아주 예전, 거의 2차대전 당시까지로 거슬러올라가면 파시스트들에게 즐겨 붙던 멸칭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이 욕설이, 2017년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운동을 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성범죄자 하비 와인스틴에게 붙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반복 사용된다고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남자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p46)"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붐이 일었는데 여기서 전혀 달리 시작한 두 흐름이 서로 만나는 셈입니다. 와인스틴 같은 "돼지"에게 적어도 공감하거나 방조하는 추한 범죄 진영으로부터는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2016년 파리사클레 대학교의 과학자들은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는데 "남자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여자아기들의 그것에 비해 날카롭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더 불편하며, 따라서 더 즉시 달래주어야 한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연구결과는 이런 통념이 사실에 반함을 규명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남아, 여아에게 어린 시절부터 (차별적인) 사회화가 암암리에 이뤄지는 건 상식에 속하나, 이처럼 심지어 갓난아기 시절부터 근거 없는 차별적 인식이 아이들을 떠나지 않고 배회한다는 건 섬뜩한 면마저 있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남자>는 지난세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고 한국에서도 많은 청춘남녀가 즐겨 읽었다고 하죠. 저자는 저 책을 쓴 존 그레이가 성차별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의 차이를 매우 과장하여 기술했다"고 비판합니다. 보통 우리는 중학생 정도만 지나도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이는 이른바 신경 가소성과 관련 있는 문제라고들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는 15년 전 카트린 비달의 연구를 통해 상당 부분 근거가 무너졌고, 저자는 특히 이 연구 결과를 "대단한 발견"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결론은, 개체의 특성과 "능력"은 일생을 두고 변한다는 것이며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거죠. 또 성 호르몬의 분비 여부가, 여성의, 또는 남성의 어떠한 특성을 현저히 감소시킨다는 식의 허황된 연구도 근래 와서 대부분 반박되거나 철회되었다고 하네요. 이런 연구 결과는, 어떤 고정된 성별 특성이 있다기보다, 개인 간의 이런저런 편차가 훨씬 유의미하고 주목될 필요성이 크다는 쪽으로 결론이 이어집니다(간성 이슈라든가).

가부장제는 앞서 p41 같은 곳에서 마치 남자들에게 유리한 어떤 보장 장치처럼 받아들여진다고 했으나, 이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다고 저자는 다시 주의를 환기시킵니다(p70). 마치 범죄집단처럼,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이나 이로부터 탈퇴할 자유가 없으며, 혹 이런 위치에서 벗어나면 "추락, 퇴보"의 낙인이 찍힌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들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핑크색 옷을 입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혹은 인형을 갖고 놀아도 별 주의를 주지 않게 가르치라는 겁니다. 저 같은 경우는 초4 때 만화가 아닌 소설판 <캔디>가 출판되어서 무척 읽고 싶었는데 그걸 부모님이 한사코 못하게 하시더군요. ㅎㅎ 그렇다고 지금 딱히 (못해본 걸 하고 싶어서) 그 책(구할 수도 없습니다)을 읽고 싶다거나, 애니판을 정주행하고 싶다거나 하는 욕구는 없습니다.

집안일을 함께하고, 식탁에 발을 올려놓는다거나 하는 권위적이고 무례한 제스처를 하지 못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KBS 드라마인 <사랑과 전쟁> 아이돌 특집편 중 하나를 보면 젊은 남편이 회사에서 권고사직 당하고 집에서 앞치마를 입고 살림을 하자 그 모친(시어머니)가 질겁, 아니 절망을 하고선 며느리에 대고 호통, 아니 절규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사자가 아니면 이런 상황의 심각성을 잘 모릅니다. 드라마를 보면서는 "저건 좀 심하군" 같은 반응을 보이다가도, 막상 자신의 아들이 그러고 있으면 대부분의 모친들이 손사래를 칠 겁니다.

"남성성을 새로이 규정하여, 타고난 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유를 찾아 주자(p113. 또 p137)." 사실 이는 성교육, 젠더 교육의 주제도 되겠지만 애초에 성 역할 말고도 개인, 자신의 개성, 진정한 욕구, 적성(허황된 에고나 막연한 질투심, 주제파악 못하고 과장하는 폭주가 아니라) 등을 찾아주고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쌓아올리는 교육과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라진 믿음의 망령(p124)" 이는 막스 베버가 한 말입니다. 물론 베버의 말을 장자크 쿠르틴, 마이클 키멀 등이 재해석한 것이고요. 사내아이들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입회식 등의 자리에서 오줌 받아내기, 지독한 모욕 참아내기 등의 의식을 거쳐야 하는데 이 역시 왜곡된 남성성의 오랜 유산 중 하나라고 합니다. 또 지금 이 순간 역시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군인, 배와 함께 침몰하는 선장 등 영웅적인 죽음을 맞고 또 맞이해야 하는 갖가지 허상을 주입 받는데 이 역시 생존과 쾌락과 안온을 추구하는 생명체의 본성에 반하는, 생각하면 할수록 개인이 괴로워지는 망령에 가깝다는 겁니다.

"소년에게 울 자유를 줘라." "남성성은 남자 수만큼 다양하다" 유해한 남성성을 타파하고 새롭고 유연한 남성성을 세우는 건 성차별로부터 여성을 해방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남성들을 편히 살게 해 주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또 기사도보다는 예의를 갖추게 가르치자며, 기사도는 일방적인 여성 모시기이므로 본질적으로 성차별일 뿐 아니라 그 이면에는 "로맨스, 결혼" 등 어떤 불측한 대가의 요구가 숨어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 매너, 예의는 사람 사이의 관계 기술일 뿐 그에 반드시 애정 관계의 개시가 수반되는 게 아니죠.

포르노물의 범람, 성폭력 역시 왜곡된 성역할, 성의식, 성차별의 산물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아이한테 뽀뽀를 하는 건 애정의 표현이라며 합리화하기 쉬우나 애정을 받고 안 받고는 아이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도 어른들이 명심해야 하며 아이들에게도 그리 가르쳐야 한다고 합니다.

p40에도 그런 말이 나왔지만 p206에도 역시, 활동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자신의 아이를 별나게 키우지 않는지 하는 망설임과 확신 부족입니다. 그러나 성역할에 대해 고정된 인식을 버린 아이가, 성역할뿐 아니라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훨씬 유연하고 창의적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지적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어쩌다 남자까지 차별 철폐를 외치게 되었나?" p221에는 쥘리앵 바이우라는 활동가가 나오는데 이분은 남성입니다. 또 토마 랑슬로비아네라는 분도 나오는데 그는 사적인 영역에서조차도 과감히 차별의식을 타파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투쟁가"로 규정합니다.

활동가들이나 동조자들은 결코 남녀평등이라는 지점이 "도달 못 할 유토피아"라 여기지 말고, 1세대 운동가들의 성취를 긍정 평가하면서 전향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게 저자의 말입니다. 이 책은 운동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평가적 시선으로 운동의 자리매김을 시도하는 입체적인 시도를 하는 듯 보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