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 - 나를 잃지 않고 나와 마주하는 경계의 감정
이창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4월
평점 :
사람이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그게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맹자도 수오지심을 4단(p260) 중 하나로 꼽았으며, 칸트 역시 구부러진 재목(=타락한 인간성)으로부터 올곧은 제품(=덕행)이 나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를 보면 사람이 아닌 동물, 예를 들어 반려견 등도 부끄러운 감정(아무리 원시적인 것이라지만)을 표현하는 걸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사람이 느끼는 수치심은 특별히 어떤 게 다른지, 또 수치심이 결여된 "괴물의 마음"이란 또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책을 읽게 되었네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않을 텐데... 책에서는 일단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을 부끄러운 존재가 되게 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 증거로 시도때도 없이 무엇인가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증오하는 행태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말하네요(p60. 이 서두는 책 저 뒤 p355에서 발전적으로 마무리됩니다). 이어서 저자는 "수줍음은 일차적 감정"이며, 이 수줍음에서 발전한 게 부끄러움이란 감정이라고 합니다(p61). p63에는 "부끄러움은 보다 복잡하고 고등한 감정"이라 말하며 다시 "수줍음"과 구별 짓습니다. 이들 감정은 우리 인간성의 기본 바탕이 되는 동물성에도 기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이것 관련해서는 이 책 4부에 자세히 나옵니다).
수줍음의 기본적인 신체 표현은 "얼굴 붉힘"입니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귀 이(耳)와 마음 심(心)이 합해진 글자가 부끄러울 치(恥)라고 합니다. 또 우리말의 "부끄러움"도 그 어원이 "붉어지다"에 있다고 하네요. 여기서 저자는 다윈의 견해를 원용하며,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공통점이 있긴 하나 상당히 다른 감정이고, 그 증거로 수줍음에는 방어 자세가 수반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p79에는 다시 맹자의 말이 나오는데 그 유명한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입니다. 저희가 고교생일 때에는 (ㄷ, ㅈ 앞에 오는 不은 "부"라 읽고, 그 외에도 부실기업 등 몇 가지 예외가 있다) "불"의 독음을 저리 배웠는데 책에서는 부불작어인이라고 여튼 나옵니다. 고교생일 때 저 말을 배운 이유가 물론 한문 시간을 통해서이기도 했지만, 이 책에도 나오는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연관이 바로 지어지는 명구라는 점을 국어 시간에 배웠기 때문이었죠(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저 뒤 p304 이하 참조). 이어서 책에는 부끄럽다는 愧(괴)라는 글자가 기원이 매우 오랜 <시경>에 이미 등장하며, 그 외에도 <강희자전>의 용례를 파고듭니다. 부끄러움의 먼 연원이 이토록 깊은 것임을 비로소 알았으며, 인문서를 읽는 보람이 바로 이런 데에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영화에 나오는 대사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에서 나오듯 일본어 "가오" 역시 부끄러움과 연관되며 "顔"을 읽는 일본식 독음에서 연유했습니다. 바로 앞 페이지에는 우리말 속어 "쪽팔리다"에 대한 분석도 있습니다. 얼굴이 팔려나간다라는 뜻인데 이것이 확실히 부끄러움의 원초적 표현인 건 분명해 보이네요.
"쑥스럽다"는 이 책 p88에 "숙맥불변"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숙스럽다, 즉 숙(=쑥)과 비슷하다, 이 정도로 어원이 설명되는 셈이겠네요. 바로 뒤에는 "면구스럽다"의 어원이 나오는데 이것도 요즘은 매우 드물게 쓰일 뿐이죠. 제가 어떤 분께 이 말을, 제 나름 예의를 갖추느라 썼는데 그분은 "나이가 몇인데..."라며 의아해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ㅎㅎ 이렇게 역효과가 난다면 제가 말을 잘못 쓴 셈이라 당시의 저의 실수가 참 면구스럽네요. 여튼 이 책에서는 좀처럼 학자들이 시도하지 않는 "면구스럽다"의 어원까지 설명해 주는데, 그 기원을 "면괴"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읽으면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선비를 대접하지 않으면 사회적 기강이 확립되지 않아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뜻이 <조선왕조실록(중 태종실록)>에도 나오는데 이것을 예의염치, 즉 사유(四維)라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본디 염치는 "청렴함과 부끄러움을 모두 일컬었던 말"이라 다시 자세히 설명합니다(p83). 그러니 이 단어에는 그저 원초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라, 물욕을 절제하고 그를 통해 행동거지를 바로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선비의 복합적인 행동 규범(과 그를 뒷받침하는 심성) 규정이 다 담겼다고 하겠습니다.
2부부터는 "수치의 아래쪽 감정, 즉 부정적 측면"을 고찰합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토픽이 아담과 그 처의 이야기입니다. 본디 부끄러움 같은 걸 모르고 낙원에서 교합을 이루며 잘 살았으나 악마의 꾐에 빠져 갑자기 수치를 알게 되었으며, 신의 명령에 불복종함을 이유로 낙원에서 축출당했다... 이는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완전함을 갈망하여 뱀의 유혹에 따라 선악과를 먹었으나, 돌아온 결과는 여전히 불완전한 자신들에 대한 각성. 또 그로 인한 부끄러움"이라고 합니다. "수치의 감정은 완전함에서 타락한 감정이지만, 타락의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야 하는 신호를 가리키기도 한다(p125)." 즉 수치심을 못 느끼는 사람은 계속 그런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이런 우화, 신화로 표현했다고 봐야죠. 혹은, 그런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수치심도 알고 다른 것도 알 수 있는 건강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인간의 실존(p128)입니다.
기독교의 신약성서에서 바울도 로마서 등에서 "의인"을 강조(p129)하는데 특히 프로테스탄트에서 이신칭의 등을 중요 교리로 삼는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겠습니다. 또 문학 작품 <실락원> 등에서 그 작가 밀턴은 "아담에게 수치가 없었던 게 아니라, 정욕을 인내하고 통제했기 때문에 수치가 발현되지 않았다(p137)"고 저자는 해석합니다. "열매를 따먹기 전에는 이런 관능적 쾌락을 탐하는 성관계를 나눠 본 적이 없었고...(p143)" 확실히 생식과 개체 복제가 아니라 순전히 쾌락을 위해 성교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수치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내면의 소란도 다룰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p147).
프로이트가 말한 리비도는 본디 "자신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합니다(p167). "리비도의 본능 충동이 개인의 문화적 이상(이에 대한 논의는 이 책 1부에 자세히 나왔습니다)와 충돌할 때 그 리비도적 충동이 병을 유발시키는 성질을 가진 병발성 억압으로 바뀐다(프로이트 <나르시시즘 서론>을 이 책 p169에서 재인용)"는 구절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승화가 리비도의 질적인 변형이라고 한다면, 이상화는 리비도를 제어하고 조절하는 것(p172)"이라며 승화와 이상화를 구별하며 특히 후자는 간접적 성격이라 합니다.
"건전한 나르시시즘은 인간에게 품위와 지위를 요구한다(p210)." 책에서는 가상의 인물 혜수 씨를 설정하여, 잘나가는 직장에 다니며 화려한 의상을 걸쳤지만 남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 (핏이 잘 사는 체형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며,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놓친 채 돈과 성공만 좇은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지기도 한다며 그녀의 이런 감정의 정체를 분석합니다. "자존감을 붇돋는 것은 타이밍과 강도만 맞으면 수치를 이기는 좋은 처방"이라고 합니다(p213). 이는, 말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으나 책을 읽어 보면 혜수 씨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특히 여성)에게 실용적인 충고가 될 듯하네요.
"과도한 수치심은 자기 파괴적 성격을 넘어서,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공격적 태도와 철면피로 확장된다(p216)." 이는 에릭 에릭슨의 8단계 이론과 관련하여 책에서 인용됩니다. 회피, 부정, 통제는 이런 수치심에 기반한 방어 기제들인데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생활에서 이런 식으로 방어기제를 발동하는지와 연결시키면 재미있는 분석, 혹은 자기 성찰이 가능할 것 같아요.
반면 브래드쇼 같은 이는 수치심이 악성 나르시시즘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는 경계선 성격 장애, 열등감, 완벽주의 등을 낳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는군요(p220). 그에게는 이것("수치심이란 곧 악마")이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었다(p221)고까지 저자는 단언합니다. "수치스러운 자신을 혐오해 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한다(p223)"라고도 하는데, 이런 예도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지만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에게 부여된 특별한 명분이나 정의를 자신이 대변하는 양 큰 착각에 빠져 폭주하죠. 옳고 그르고를 참 쉽고 간단하게도 척척 가르고 다니는데 가관도 아닙니다. 저 뒤 p330 이하에 브래드쇼의 개념이 다시 자세히 분석됩니다.
4부에서 "수치의 위쪽 얼굴"이 자세히 분석됩니다. 여기서는 다시 맹자의 유명한 언설들이 인용되며, 본래 동물성에 대한 혐오(즉 아래쪽 얼굴)에서 기인한 게, 이것이 변형되면서 인간성, 인간다움에 대한 강력한 옹호로 기능한다고도 합니다(p239). "호연지기는 집의(集義)의 기운이며, 마음에 흐뭇해야 위축되지 않는다." 여기서 "흐뭇하다"의 원 글자가 "겸(謙)"인데, 이 설명은 책 저 앞 p86에 자세히 이미 나왔더랬습니다. 이처럼 책이 동서양의 다양한 출전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지식의 바다를 누비는 것도 좋지만, 책의 모든 파트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서로가 서로를 살찌우고 깊이를 더하는 체제도 좋았습니다.
이런 부끄러움의 감정을 모르는 부류를 저자는 "미꾸라지"라 부르는데, 저자는 다시 세 종류로 나눕니다.
1) 의심스러운 개혁, 혁명론자
2) 반사회적 성격장애
3)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하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그 부족한 머리로 어설프게 이해한 걸 절대진리나 되는 양 폭주하는 인간이, 그 어러석음을 지적한 사람더러 사이코패스니 뭐니 떠드는 코미디가 다 있으니, 이런 상시적 정신착란에 빠진 인간에게는 미꾸라지라는 규정도 과합니다. 이런 부적응자들은 몸에 맞지 않는 외투의 어색함, 다듬어지지 않은 과격함을 "선비다움"으로 단단히 착각하는데, 지식의 구비가 물론 선비 처신의 본체는 아니겠으나 기초 인식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자가 무슨 선비를 참칭하겠습니까.
<논어> 양화편에는 "향원"이라는 무리가 단죄되는데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 율법학자를 호되게 나무란 것이나 비슷합니다. 공자는 이런 위선자들과 단호히 맞서 싸울 것을 권했고, 이것이 바로 수오의 양가성을 일찍부터 규정한 유가의 가르침 그 심오한 경지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입니다.
p288에는 그 유명한 "신기독야"가 나오는데 여기서 신(愼)은 물론 삼갈 신입니다. 저자는 재미있게도 "신(神)이 항상 있는데 어떻게 피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외면의 신이 문제가 아니라, 너를 바라보고 있는 내면의 신이 문제라는 건데, 마치 후한의 양진이 말한,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당신이 안다는 사지(四知)의 고사와도 통합니다.
책에서는 조리돌림, 신상털기(이른바 "독싱")에 대해서도 아주 자세히 분석합니다. 결국 이런 행동은 대상 하나를 잡아 톡톡히 망신을 주기 위한 방법인데, 저자는 "사이코패스 되기를 강제하는" 신자유주의 체체의 모순에서 이런 행태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왜 우리의 몫인가?" 사회는 수치를 아는 인간들이 일궈 나가야 발전이라는 게 가능합니다. 수치가 아래로만 향하면 부정적 효과에 그치지만, 다행히도 이 수치는 위로 향한 얼굴도 동시에 가집니다. 신의 의도된 계획인지, 진화의 산물로 우리 인간이 영리하게 발전시킨 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이 수치 덕분에 우리 사는 세상이 얼마든지 살 만한 곳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광신도들이나 짐승들이 폭주하는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