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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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무섭기도 하고, 세상에 정의는 살아 있다 싶기도 하고, 9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별로 변한 게 없다는 생각도 드는 그런 독서였습니다.

처음에 정체 모를, 체격 작고 소심한 중년 사내가 (약간 어이 없게도) "소년"에게 쫓기고 협박 당하는 장면을 봤을 때, 여튼 이 남자, 이름이 뭔지도 헷갈리게 하는 이 남자가 주인공이겠다고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곧 무대에서 퇴장하며, 이 중년 사내를 교묘한 술수를 써 죽음에 이르게 한(p369에 스스로 감탄한다 어쩐다 하는 내용이 각주로 나옵니다) 소년이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실상의 주인공입니다.

처음에 이름도 안 나오고 "소년"이라고만 지칭되는 이 무서운 인간이 과연 몇 살일까 궁금했습니다. 소설이 거의 1/6 가까이 간 p83에 가서야, 몰리 핑크라는 18세 여성을 통해 대충 저 나이 또래이겠다는 짐작이 가능해집니다. 다시 한참을 지나, p138에 진짜 나이 17세가 나오며, 그 "배우자"가 되는 로즈의 나이는 16세임이 밝혀집니다(p150). p216에는 "젖비린내 나는 기만적인 나이"라는 표현도 나오고요.

이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 역시 p50에서야 처음으로 핑키라는 이름이 나오고요. 그 철자는 p123에 가서야 Pinkie임이 나오고 성씨도 밝혀집니다. 이 핑키는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소년인데, "솜털"에 대한 묘사가 p16, p45, p94 등에 나옵니다. 특히 p191에는 "목덜미의 금빛 솜털"이란 묘사가 애인 로즈의 시선을 통해 나옵니다. p125에는 "면도를 해 본 적이 없는 매끈한 뺨"이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이는 p240의 "깨끗이 면도한 누르스름한 중년의 얼굴"이라는 표현으로 변호사 프리윗을 묘사할 때와 선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재미있는 건, p125에는 소년 핑키를 두고 "자존심이 강해서 외모 신경 안 쓴다"는 말이 나오는데, 보통 갱스터 무비에서 주인공들은 도를 넘는 자존심 때문에 무지 외모에 신경들을 쓰기 때문입니다. 하긴 미국과 영국(의 불량배 풍속)이 여기서 각각 달라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그럴 리가). 그의 유별난 자부심에 대해서는 p201에 한 번 더 언급이 있습니다.

여튼 이런 무시무시한 핑키에 의해 계속 죽음에의 협박을 받는 헤일은 어떤 사람인가, 아니 거의 나오자마자 죽었으므로, 어떤 사람이었나, 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그는 아이다, 예명 릴리라는 덩치 큰 여성에게 호감을 얻습니다. p32에는 "그녀에게서 비누와 와인 냄새가 났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마치 우리나라 소설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의 한 구절 같습니다. 물론 후자에서 언급하는 비누 냄새는 남성 주인공이 풍기는 것입니다만. p188에는 다른 맥락에서 "약간 비누 맛이 났다."는 문장도 나옵니다.

그는 아이다의 눈에 "신사이자, 진실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서는 애처로운 태도가 자주 보이는데 p35에서 "삶이 바로 여기 있는데 죽음과 놀아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할 때가 좋은 예입니다. "삶이 바로 여기 있다"고 한 건 아이다로부터 격려를 받고, 짧은 순간이나마 그녀에게 애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 헤일에게 "약한 마음만 먹지 않으면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라며 아이다는 재차 격려합니다. 제3자가 봐도 타당한 판단입니다.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헤일을 악착같이 쫓아다니며 목숨을 앗으려는 "주인공" 핑키는 어떤 인간인가. 그의 인상은 "젊은 동시에 늙은 얼굴(p51)"이며 거의 할아버지뻘인 콜레오니(조직 폭력배의 두목입니다)를 찾아가 대등한 자격에서 협상을 하려 드는 모습을 보면 소름이 끼칩니다. 처음에 콜레오니는 (누군지 모르지만 기존의 카이트 파를 인수하고 자신에 대항하는) 라이벌 조직의 두목이 보낸 급사쯤으로 착각까지 했죠. 소설 후반부에 자신을 배신하고 콜레오니 파에 자진 항복하러 찾아간 OO은 콜레오니가 아예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나중에 OO더러 핑키는 "콜레오니가 널 안 만나 준 모양이지?"라며 사정을 다 꿰뚫어 보고 조롱하는데(p379) 이런 걸 보면 머리는 날카롭게 돌아가는 면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나 콜레오니는 여전히 핑키에게 거대한 산 같은 존재입니다. 소년이 왜곡과잉자아에 기대어 아무리 현실을 무시하려 들어도 말입니다. p133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은 전부 콜레오니 씨의 것이었다"는 진술이 핑키 시선에서 행해지며, 비록 "늙수그레한 이탈리아계 얼굴, 개를 연상시키는 퇴폐적인 눈(p132)"을 하고 있으나 인근 경찰들까지도 다 장악한 무서운 실력자입니다. 참고로, 역자 후기에 보면 1938년 처음 발표 당시에는 이 부분이 "이탈리아계"가 아니라 "유대계"였다고 하며 다만 이후 2차대전이 끝나고 반유대주의 혐의를 벗기 위해 이 부분이 개작되었다고 합니다(그럼 이탈리아계에 대한 차별적 표현은 무방하다는 건지요?ㅎㅎ).

이런 독사 같은 핑키의 성격을 묘사할 때, 이 소설 중에서 가장 자주 쓰인 표현이 "혈관 속을 흐르는 독"입니다. 어느 정도 관용적인 표현인지 1990년작 영화 <대부 III>에도 돈 알토벨로의 대사 중에 "몸에서 venom(독)이 늙어서 다 빠져나갔다" 운운하는 게 있죠. 이 책에서는 p179에서 "혈관 속을 흐르는 독"이라든가, p312에서 "혈관 속의 독"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p262에는 로즈에게 말할 때 성수의 효력이 부족했는지 내 안의 악마가 안 빠져나갔다며 가톨릭 신자로서의 느낌을 털어놓는 장면이 있는데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어린애이며 아직 악인으로서 설익은(...) 면모도 그대로 노출합니다.

그레이엄 그린은 본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가톨릭 색채를 진하게 드러내는 작가죠. 이 장편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p106에서는 로즈, 핑키 모두 어렸을 때부터 가톨릭 신자였음이 대화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p72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나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같은 말도 나옵니다. 앞에서 p35의 아이다 대사, 즉 삶에 대한 특별한 집착을 표현한 게 있었는데 p72의 저 말도 그것과 연관지어 이해해야 합니다. p186에서는 아예 "넬슨플레이스는 모두 가톨릭"이란 말도 나오고, 이 넬슨플레이스란 지역에 대해 핑키는 자신이 무슨 대표자나 되는 양 의식하는 중임도 우리가 엿볼 수 있습니다.

로즈와 핑키는 도덕적이지도 않으면서 대죄 등 가톨릭 신앙의 관념에 몹시도 집착합니다. "대죄"라는 단어는 이 작품 전체를 통해 가장 자주 출현하는 단어인데 대표적인 곳만 꼽아도 p346, p351, p375, p400, p470 등이 있고 pp.234~235에서는 아예 둘이서 토론을 합니다. p423에서는 로즈가 "우리는 이미 저주 받았으니 대죄 몇 번을 더 저지른들 차이가 있냐"고 자탄하는데 그렇게 생각할 것 같으면 p305에서의 대화 같은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독자 입장에서 그들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댈로는 여기서 핑키 파의 중요 구성원입니다. p120에는 "무조건적인 충성심으로 복종시킨"이란 표현이 나오며 p200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p110에는 "사람을 잘 따르는 커다란 개가 웃는 모습"과 그가 비슷하다는 말까지 나오네요.

이런 댈로를 막판에 찾아가 진실의 편에 서라고 과감하게 충고(p487)하는 아이다는 정말 당차고 용기 있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p162에서도 "자신에게 친구가 많음"을, 현지 공권력 담지자인 경위에게 강조하며, p261에서도 로즈를 찾아가 "내겐 친구들이 있어"라고 말하고, p478에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p90에서는 "난 옳고 그름을 믿어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그 외에 또 무엇을 믿는 사람일까요? 그녀는 만나는 누구에게라도 "자신이 특별한 육감을 가진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ㅎㅎ 재미있습니다. p339에서는 스스로를 "심령판에 의해 단련된 사람"이라 하고, p89에서는 크로 영감과 심령판을 놓고 일종의 계시를 받기도 하는데 우리 동아시아식이라면 주역의 점궤를 뽑는 것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심령판"은 p72에 위저보드라고 각주에 설명이 있습니다. 그녀는 p89에서 크로 영감과 함께 글귀의 뜻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데 "눈에는 눈"으로 밀고나가라는 계시라고 강변합니다. 뒤의 p155에도 "눈에는 눈"이란 말이 또 나오는데 그녀의 인생 신조인가 봅니다. 그런데 p89의 위저보드 계시(?)는, 이후 저 뒤 p503에서 sui란 단어의 뜻과 함께 다른 뜻으로 재해석되더군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핑키는 본격 악당이 되기에 아직은 너무도 부족한 어린애입니다. 역자후기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를 연상시킨다는 말도 있으나 이는 작품 발표 시기가 1938년임을 감안한 역사적 해석이며, 아마도 "젊은 독재자(p226)" 같은 표현이, 작가 그레이엄 그린 역시 시대상을 어느 정도 의식한 흔적일 수 있습니다. 시대상은 p131의 휴대용 딕터폰, p366 축음기 등의 묘사에서도 드러납니다. p206의 각주에는 "퍼블릭" 스쿨이 "사립" 학교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영국만의 독특한 용어사용이죠. 미국에서는 이렇지 않습니다. p433에는 변호사 프리윗이 일류 사립학교를 졸업했다며 자랑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배경이 영국이라 흑인은 p205에서 유일하게 등장합니다. 물론 현대 영국, 특히 런던에는 흑인이 많이 거주하는데 지난 세기 아프리카 대륙 1/3은 영국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핑키는 병적으로 성(性)에 대해 적대적이고 경멸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p184에는 "그의 내부에서 동정이 성욕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라는, 참으로 기괴한 문장이 다 있습니다. p209에는 "더블베드에서의 성적 친밀함은 늙는 만큼이나 구역질난다"고도 하고, p245에는 짐승 같은 어쩌고 하는 말도 나오는데 소년이 이런 이상한 태도를 갖게 된 배경은 소설 후반부에 설명됩니다. 그래도 한창 때 소년이라서인지 p189에는 정반대 표현도 등장합니다.

p342에는 "난 어렸을 때 사제가 되고 싶었어"라는 놀라운 고백도 나오는데 그의 이런 금욕적 태도를 감안했을 때 바른 심성만 어렸을 때 길러졌다면 아주 원칙을 잘 지키는 사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방어심리는 아주 병적일 정도인데 애초에 특별한 애정도 없던 로즈에게 청혼한 것도 "불리한 증언"을 막기 위한 의도였고, 자꾸 증인(?)이 늘어나자 "빌어먹을! 세상 사람을 다 없애?(p363)"라든가, "대량 살육(p416)"이라든가, "내가 왕창 다 죽여야 하는 거야?(p498)" 같은 황당한 말도 내뱉습니다. 자신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는 누구든 다 제거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원시적이고 유아적인 발상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그에게, 죽은 친구(..)의 원수를 갚겠다며 맞서는 아이다의 결기도 대단합니다. 핑키는 그야말로 임자를 만난 셈이죠. 로즈의 평가에 따르면 "세상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 웃음을 웃는 이, 다른 부류의 사람(p182)"입니다. p148에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러니 "복수는 아이다 아널드의 몫(p75)"일 수밖에요. 댈로는 "그녀의 말씨가 상류층이 아니(p332)"어서 안심하기도 합니다.

핑키는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았으니 당연히 무식합니다. p223에서 "메멘토 모리"의 뜻을 모르고, 그가 아는 라틴어구는 p344의 "크레도 인 우눔..."뿐입니다. 이 작품에서 세번째로 등장하는 라틴어구는 로즈가 마지막에 신부에게 고해할 때 그가 들려주는 "최선의 것이 타락하면..."이고 이 외에 라틴어 성구는 안 나옵니다.

세상은 참 요지경이죠. 책에 실제로 요지경이 등장하는 건 p12, p193 등 두 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사 패턴이나 인간성 같은 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닮은 데가 있는데, p409에는 "끝까지 깨물어 먹어 봐도 브라이턴 록이라는 글자가 나오는 사탕"을 두고 인간 본성의 섬뜩한 악함을 지적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p368, 또 p12 같은 곳이 그러하죠. 우리 사는 곳 어디라도 저 브라이턴 록 밀턴플레이스를 크게 벗어나지 않음이 또한 씁쓸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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