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 폴리스 - 홍준성 장편소설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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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나(잘 모르겠지만 이 소설 속 세계에서 기적의 실종을 연호로 삼으니 그런가 봅니다), 애초에 그런 게 지상에 존재한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고서적 취미가 사라진 게 아니라 애당초 존재한 적도 없었(p12)"듯 말입니다.

우리 눈으로 잘 분간도 안 되지만 소중한 책, 책을 미세하게 갉아먹으며 마침내 지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책벌레가 있듯이, 사람 세상에는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칭할 수 없는 인간 벌레(p335)가 창궐하기 때문입니다. 이 가상의 비뫼 시(市)에서 지배층은 지배층대로 인간성과 양심을 오래 전에 잃은 벌레들이며, 재수 없으면 물소의 뒷다리에 걷어채여 하이에나의 먹이가 되는 암사자(p308)과도 같은 신세입니다. 난쟁이들을 위시한 하층민들도 "벌레"인 건 마찬가지인데 그 처첨한 빈곤상, 타락한 영혼, 거친 행동과 말버릇을 보면 이 시국(市國)의 상류층이 그나마 화려한 외관으로 일시 혐의를 비껴가는 것과는 달리 진정 벌레라는 멸시를 받아 마땅합니다.

음... 예를 들어 유리부인을 보면 p189에서 "배때기를 칼로..." 같은 험악한 말을 쓰는데 나쁜 정신에서 이런 못된 말이 나오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 배우자인 "남편(이 이름처럼 쓰입니다)"도 평생 해 온 일이라는 게 노가다질밖에 없는 무지렁이인데, 그래도 제 아내를 폭력적으로만 대하지는 않고 가끔 존댓말도 쓰는 게 귀여웠습니다. 그러나 성관계를 요구할 때에는 강압적인 말투가 가끔 나오네요. 혼백이 되어서도 비명횡사한 아내 불쌍한 줄을 아는 걸 보면 이 작품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p44 미주 27번에 나오는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제목이죠.

가시여왕은 뭐 두 말 할 것도 없이 광녀입니다. p63에서 부실공사를 통해 자기 배를 채우려는 검은 속셈을 보이는데 건축가, 차관 등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 "네 머리통을 뽑아 XX에 꽂아버린다" 등 아주 잔인하고 못된 소리를 서슴없이 씁니다. 이 표현은 그녀의 단골 멘트인데 저 뒤 p273에도 다시 나오더군요. 뭐 좋은 말이라고.

가시여왕이 이렇게 된 건 작중에서 여러 설명이 나오는데 정말 호르몬 투약의 부작용일 수도 있겠고 나쁜 환경(주정뱅이였던 부왕의 학대)에서 비롯한 정서적 영향일 수도 있겠으며 그냥 유전인자 자체가 잘못되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p207에서 부왕이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뒤틀린 영감을 받아 딸들을 아들로 바꿀 생각을 품는데 이 대목을 읽고 저 페르시아의 카자르 황녀(실존인물)가 왜 그렇게 콧수염이 나고 이상한 외모가 되었는지 하나의 설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p203:8에 "가시여왕이 → 가시여왕의" 오타 있습니다.

이 정권은 정통성에 딱히 문제도 없건만 정권 유지를 위한 기제가 아주 폭력적입니다. 네 뭐 기본적으로 이런 전근대 사회는 계급 모순 위에 서 있으니 당연한 생리다... 이 정도는 구태여 루이 알튀세한테 안 물어 봐도 알 수 있겠죠(미주에 그의 책이 자주 인용되는데 한국어로 번역된 그[오래 전에 죽은]의 저서가 그리 많이 출간된 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고문은 예술이라면서 이근안의 말도 변용되는데 실제로 비뫼 시가 민주화 이전 어느 나라와 교류가 있었는지 고춧가루를 이용한 고문(p228)도 행해집니다. 코로 흡입하는 설렁탕 문화는 혹 없는지 궁금합니다. 미주 134에는 미국에 대해 아주 준엄한 단죄도 이뤄지는데 읽으면서 그 날선 어조 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팩트 자체에는 동의합니다만.

p158에도 나오듯 소원을 빌 때는 신중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던 노숙자는 경솔한 입놀림 때문에 (어차피 별 가치도 없던) 생을 일찍 마감합니다. 신(혹은 섭리이든 무슨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은 이처럼 얼빠진 소리만큼은(p55) 결코 허투루 듣지 않고 칼같이 접수하는데 p204에서도 "꼭 이럴 때만큼은 손가락만 빨고 있지 않고 뭔가를 한다고" 통박당합니다. 물론 p204에서는 정의구현을 그 나름 한 것인데 그마저도 뭔가 일처리가 허술해서 또다른 부작용이 생깁니다. p245에도 또 신이 욕을 먹는데 "하늘은 잠잠했고 그 침묵은..." 이란 말이 나오네요.

책 미주 40번에는 이른바 공산주의 유머 중 하나로 스탈린 치하에서 어느 꼬마의 장래희망이 고아가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도 하나 생각난 게, 2010년작 미국 영화 <리전>을 보면 디스토피아에서 절망한 어느 가난한 젊은 미혼모가 "왜 신은 침묵하나요?"라는 아이의 질문에 "여태 지껄이던 개소리가 이제는 싫증났나 보지"라고 아주 시니컬한 대답을 해 주는 장면이...

앞에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노가다의 아내인 유리부인은 사고로 죽어가던 중 아이 하나를 세상에 내보내는데 박쥐를 고아먹은 부작용인지 박쥐를 닮은 아주 못생겼습니다. 이 아이는 고아원으로 보내져 42번이라는 번호를 부여받는데 벤허가 갤리선에서 수형 생활하며 41번으로만 불리듯 작품 안에서 내내 42번, 심지어 왕실에 대역으로 모셔진 후에도 그렇게만 불립니다.

42번은 나쁜 환경 때문에 중이염을 앓고 이 부작용으로 뇌의 특정 부위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지게 되는데 이 재능을 활용하여 무슨 이익을 얻을 생각은 않고 ㅋㅋ 자신만의 세상을 아주 아름답게 가꾸는 데에만 골몰합니다. 비슷한 영혼을 가진, 프린스 콘솔트인 "샌님"은 42번을 보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장면이 몹시 웃깁니다.

한편 "악곡 없는 간주곡" 파트에서 42번의 생모인 유리부인은 혼백이 되어 다시 나타나는데 얼굴에 철가면이 씌어 있건만 바로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는 이상하게 여기는 게, 1) 일단 아들은 아직 안 죽었다는 걸 알고, 2) 어디 철가면은 아무나 쓴답니까? 그런 비천한 신분은 쓰고 싶어도 못 쓰는... 이 의문은 뒤에 가서 밝혀집니다. 아니 이 독후감 저 위에서 제가 이미 스포일링을 해 버렸네요..

고아원의 P수도사는 p113의 설명(칸트 저서의 인용)에 따르면 "악을 마음 속 준칙으로 삼는 존재이지만 사실 그 악은 P수도사의 세계관에 의하면 선의 체계로 회칠되어 있습니다. 신(의 입장)이 모호하므로 그는 자신의 모든 악행을 신의 뜻으로 합리화할 수 있죠. p128에는 왜 성경이 시대를 초월한 걸작인지에 대해 "해석에 저항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오는데 이게 42번의 논리적 결론인지 혹은 딱히 출전이 없는 작가의 독창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p23에는 "추를 향한 이끌림에 대한 미학적 비평"이란 말이 나오는데 p186에는 꼽추를 향해 "너무 아름다워서 신의 미움을 샀나?"라는 비꼬는 멘트가 있고 이에 대해 꼽추는 "취향이 독특한가 보다"며 신의 악취미를 개탄합니다. 음, 움베르토 에코의 어느 책을 보며 의미를 궁구해 볼 일입니다. 미주 58번에는 "철학은 재앙에 선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작가님의 심오한 통찰과 더불어 약간의 자학이 엿보이네요.

p192에서 유리부인은 "사기꾼 난쟁이 약재상 녀석"을 다시 욕하고 배불뚝이는 박제상을 찾아가서 환불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p98 이하) 감옥에 가는데 p333에서 출소한 동일인에게 다시 습격을 당합니다. 박제상은 정말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데 배불뚝이가 놓고 간 송골매 박제를 알도 파스칼리노(그 아비 늠부를 목 잘라 죽인)에게 또 팔아먹기 때문입니다. "눈매가 날카롭더니만 그예 속네."

알도 파스칼리노는 사실 무정부주의자 수괴인 앗도와 검은 커넥션을 유지합니다. 무정부주의자들도 (그들의 신념에 반하는 아이러니이지만) 조직을 유지해야 하는데 정부의 사주, 청부가 있어야 자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영원한 적수는 부르주아지나 시대착오적 폭군이 아니라 바로 무정부주의자여서인지 여기서 다분히 필요 이상으로 욕을 먹고 있네요. p293에 "세상이 알기 쉽게 되어 있지 않은데 알기 쉬운 설명을 시도하는 자는 사기꾼이 아닌가?"라는 말이 있는데 이 지극히 타당한 말은 꼭 누구한테만 적용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 싶습니다.

이 작품에는 결정적인 순간 두 번에 가고일이 등장하여 흐름을 바꿔 놓는데 가고일은 아마도 작가님 또래가 유치원생이나 초등생 무렵 KBS 2TV에서 일요일 아침 8시께에 방영했던 <전사 골리앗>에도 나오는 종족이죠(물론 건축물 부속 조상이기도 하고).

(내용 누설 주의)
결국 42번은 이 이야기가 자신의 사연이 아님을 깨닫는데 애초에 유리부인이 낳은 고아와, 샌님-가시여왕 사이에 태어난 왕자가 같은 용모를 할 이유가 없기에(하긴, 이 책에는 우연이 겹친 게 필연이라는 명언도 나옵니다만) 이런 식으로 서사 밖으로 추방당할 수밖에 없었겠죠? 흠. 1984년작 미국 영화 <네버엔딩 스토리>는 서사 밖에서 책을 읽던 꼬마가 "이게 결국 내 얘기였어?"라며 각성하는 결말인데 이 잔혹동화는 그와 정반대 스탠스인 셈입니다.

미주와 번갈아가며 본문을 읽고 출전을 상기하는 재미, 이야기 속에 녹아 있는 풍자를 음미하는 재미가 고루 있었습니다. 시간이 나면 주해까지 올려져 있는 작가님 블로그도 구경하고 싶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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