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저넌에게 꽃을 (아트 리커버 에디션) - 운명을 같이 했던 너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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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나서 독자의 가슴이 뭉클해지는, 참 멋진 소설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SF 장르를 떠나) 이미 고전의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이 작품을 안 읽어 본 사람도 그 줄거리는 익히 다 알 정도입니다. 낮은 지능을 갖고 태어난 어느 청년이 연구진의 시술 대상이 되며, 이 시도는 꽤 성공적이어서 짧은 시간 안에 평균 지능을 돌파한 후 세계적인 천재 수준으로 발돋움했다가, 시술의 효능이 종료되어 종전 같은 지적 장애인으로 퇴행한다는 줄거리입니다.

지능이 낮을 때에는 그 이유로 주위의 놀림감이 되던 청년은, 지능이 천재급으로 향상된 후에도 주변으로부터 정반대의 이유로 소외됩니다. 다시 원 지능으로 회귀한 후에는 물론 지적 장애인들이 보통 겪곤 하는 천대를 다시 받게 되고 말이죠. 문화권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미국에서는 지능이 박약한 찰리 고든에게도 (매우 쉬운) 일자리가 주어지긴 합니다. 일반인보다 현저히 능력이 떨어지는 그를 두고 온전한 성인 대접을 해 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 심각하게 부당한, 노골적인 학대를 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물론 내심으로야 그를 경멸하거나 우습게 여기겠지만 말입니다.

p287에는 이제 급 천재가 된 찰리 고든이, 어느 도로변 식당에서 급사 일을 하는, 약간 지능이 낮은 소년에 대한 모욕에 격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굿펠라스>의 한 씬이 기억나기도 했는데... 찰리 고든이 여기서 이토록 화를 낸 건 물론 소년과 과거의 자신을 동일시해서입니다. 여기서 그는 "사람들은 신체 장애가 있는 이를 두고서는 가혹한 착취나 모욕을 일삼지 않으면서, 유독 지적장애인에게는 저토록 모질게 군다"고 말합니다. 어떨까요? 한국에서도 이런 경향이 있을까요? 아마 신체장애로 고생하는 이들더러는, 그저 출생시에 지독히 운이 없었거나 교통 사고 등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의 탓이지, 개인의 자질 부족(게으름이나 성격 이상)으로 여기지 않지만, 지적장애는 이와 다른 취급을 하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이는 터무니없는 선입견이며,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사악한 생각의 결과물이기까지 합니다.

천재가 된 후에도 찰리 고든을 향한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찰리는 이제 높은 지능을 가졌으므로, 전에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지성의 거인(p150)으로 보였던 (이번 프로젝트의 주도자인) 니머 교수, 스트라우스 교수 등이 실제로는 평범한 재능만을 가졌으며, 사람들 앞에서 전문가이자 비범한 지성인 척 하는 사기꾼(p222)에 가깝다며 냉철한 판단을 내립니다.

니머와 스트라우스도 이를 알며, 특히 니머 교수는 찰리에게 "지능은 낮았으나 호감이 가는 젊은이였던 자네가, 이제는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반사회적이기까지 한 인간으로 변했"다며(p356) 부당하게 매도하기까지 합니다. 부당하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어서, 예를 들어 p401 같은 곳에서 찰리는 해당 분야 전공자인 스트라우스보다 프로이트적 개념(슈퍼에고, 에고 등)을 더 정확히 이해한 채 상대의 낮은 지적 수준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스트라우스가 느꼈을 모멸감은 상상이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 재능을 지녔다고 해도, 이를 이해 못 하거나 질시하는 평범한 이들이 천재를 모함하고 따돌리는 풍조는 매우 흔한 것이어서 차라리 이를 정상으로 여길 만도 합니다. 천재 입장에서 참으로 가당찮게 보일 만한 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 딴에는 어떤 어설픈 기준을 들이대며 그를 단죄하기도 한다는 건데, 물론 객관적 근거나 진지한 확신 따위는 조금도 없고 그저 시기심 같은 아주 저열한 동기에서 유발되었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p358 같은 곳에서 니머 교수의 부인 같은 이가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군요. 찰리 고든이 두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잖아요?" 그녀 같은 낮은 지능으로는 찰리 고든이 지금 무슨 맥락에서 하는 이야기인지 이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 앞 p225에 그녀가 악질의 성품을 가졌다는 평판이 잠시 나오기도 합니다.

니머 교수는 찰리에 대해 p293, p357 등에서 일종의 창조주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찰리도 이를 의식합니다. p227의 학회 장면에서는 "찰리 고든이라는 사람은 전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같은, 인격을 무시하는 발언도 나옵니다. 영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나치 부역자 세바스천이 매그니토 앞에서 군림하는 모습이 살짝 연상되기도 했으나 니머는 그 정도로 머리가 좋지는 못하며 또 그 정도로 악질도 아닙니다.

이드, 에고, 슈퍼에고는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정신분석 체계이지만 찰리 고든은 특히나 이를 예민히 스스로에게 분석틀로 삼았을 만합니다. 찰리 고든이라는 사람은 시술과 치료요법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자아가 생성되었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 억눌린 채 아직 보존되어 있고, 이를 평가하거나 적절히 회상, 정리할 능력은 부족했어도 여튼 잠재의식 속에 간직은 하고 있죠. 뿐만 아니라 대단히 미숙한 정신에 의해 거의 관리되지는 못했지만, 워렌 학교와 빵가게 등 그가 "소속"되었던 집단의 성원들이 찰리 고든이라는 사람과 객관적으로 함께한 세월과 체험이 엄연히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그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이해를 했기에, 내면의 갈등과 정서적 불안 등을 (특히나 자신에게 매우 적절하고 유효한) 프로이트 체계를 통해 다스리려 드는 것입니다.

"찰리는 이제 우리(찰리 고든 자신과 여자친구 페이)를 감시하지 않는다(p307)." "내 안에 있는 (겁 먹은) 찰리(p341)" 같은 데서 그는 뛰어난 지성을 활용하여, 가장 힘든 작업일 "자신에 대한 통찰과 분석"을 과감히 행합니다. p361 이하에는 마치 강점기 시절 조선의 천재 김해경처럼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p397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다 보게 된 "유리창에 뺨을 바싹 붙이고 자신을 노려보는 소년"은, 객관적으로는 아마 어느 지나가던 동네꼬마일 가능성이 크지만 유년 시절 한 시점에 갑자기 연속성이 끊어진 "어린 시절의 자아(즉 어린 찰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설 처음은,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게, 철자법과 띄어쓰기가 엉망인 누군가의 독백으로 채워집니다. 물론 지능이 현저히 낮은 찰리 고든의 일기라서 그렇습니다. 찰리는 그런데 p58 등에서, 영단어의 threw, through, enough 같은 예에서 보듯 철자법이라는 게 어떤 규칙이 없고 제멋대로인 점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외국어로서 영어를 배우는 한국인들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불규칙성(발음과 철자 사이에 어떤 규칙성이 현저히 부족함)에 당황해하는 게 오히려 상식적인 태도이죠.

특히 찰리는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헷갈려하는데 예를 들면 IQ 같은 약어(애크로님)을 어려워합니다. p22에서 IQ의 I와 눈을 뜻하는 eye가 같은 줄 알며, p210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합니다. p210의 실수는 천재가 이미 된 후, 무의식 속에서 과거의 장면을 꺼내는 중에 나오는 거고요.

찰리는 이런 자신의 과거 기억에 대해, 이것이 과연 진짜 생겨난 것인지, 당시의 자신에게 그렇게 보였던 것인지, 아니면 지어낸 건지를 두고 몹시 혼란스러워합니다(p128). 사실 독자에게도, 이게 그저 찰리 자신의 망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살짝 들긴 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이었을망정 지능이 높아진 건 분명하기에, 또 프로이트의 체계를 일단 신뢰한다면, 이는 찰리의 잠재의식 속에 (고통스럽게 매몰되었던) 진짜 기억이 맞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소설에서 찰리가 보여주는, 위대하고 감동적인 모습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머리가 좋아졌으면 이를 악용해 떳떳지 못한 이익을 취하려 들거나, 셀럽으로서 허영과 사치에 가득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으려 들고, 지적인 과제에 관심을 집중하여 인류의 공유 재산이 될 수 있는 좋은 결과물을 남기려 하며, 자신도 한때 취약한 위치에 있었음을 잊지 않고 불쌍한 이들을 도우려 노력합니다. 특히 그의 정신적 개성 중 주목할 것은 강한 도덕성입니다.

지적 성숙이 급히, 또는 남들보다 빨리 이뤄졌다고 해서 정신이 균형 잡힌 채 발달하는 건 아닌데,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도 해서 이 감정까지 함께 성장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찰리 고든이 받은 시술은 그저 지능만 향상되는 효과뿐이어서 나머지 과제는 찰리 혼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넘어지면서 완성해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이 정말 감동적이며, 그 주변에서 천재인 그를 돕거나 방해하는 이들은 알고 보면 다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뜨끔해지고 때로는 부끄러워집니다.

이 고전은 장르가 SF이기도 하기에, pp. 217~219에서는 어떤 과정으로 찰리 고든의 유년기에 지능이 낮아졌으며, 또 니머 교수 등은 어떤 원리(...)로 뇌의 단백질을 원상 복구하거나 기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는지 설명이 나오지만 ㅎㅎ 모두 열역학 제2법칙에 (아직까지는) 반하는 허황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대니얼 키스의 이 장편은 처음에는 단편으로 세상에 발표되었고, 이후 내용이 대폭 보강되어 이 같은 장편으로 재창작되었으며 단순히 "의학 치료에 의해 천재가 되었다가 다시 바보로 돌아간 청년의 사연" 외에도 이야깃거리가 엄청 많습니다. 그 중에는 이제 치매를 앓아 판단이 흐려진 어머니 로즈, 키 작고 뚱뚱한 소시민이자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버지 매트, 그리고 사려 깊고 아름다우며 어쩌면 이 작품 중 유일하게 맑은 영혼을 오랜 동안 유지하며 서사의 중심을 잡아 주는 여동생 노마 등과 만나는 장면 등은, 우리 독자에게 가족의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찰리의 영원한 친구이자 같은 실험대상(...)이었던 생쥐 앨저넌. 마치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에서처럼 앨저넌이 문제 해결 의욕을 잃고 저차원의 행동으로 회귀하거나 아예 생명체로서 존재를 중단할 때 자신도 똑같은 궤도를 밟는 모습은 참 슬픕니다. p130, p396 두 번에 걸쳐 언급되는 <Three Blind Mice>는 유명한 구전 동요이며 영국 첩보 영화 007 <Dr. No>의 서두에도 나오곤 하죠. 이 소설은 한국 드라마의 원작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김옥빈 등이 주연한 <안녕하세요 하느님>이 그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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