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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 격변하는 현대 사회의 다섯 가지 위기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오노 가즈모토 엮음, 김윤경 옮김 / 타인의사유 / 2021년 4월
평점 :
절판
"무엇이 진실인가, 애초에 진실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가" 이미 지난 시기에 이 진실이라는 가치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며, 아예 무엇인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정도의 진지함마저 부정해 버리고 모든 것을 무의미로 무장시킨 사조가 포스트모더니즘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반동, 극복, 지양을 표명한 게 뉴 리얼리즘인데 그 거두 중 한 명이 1980년생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며 그의 입장 여럿을 잘 정리하여 마치 오늘의 시국을 특별히 진단하는 듯 오노 가즈모토 씨가 편집하여 낸 책이 이 저서입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기조와 사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이들 중 하나가 오노 선생이므로 인터뷰의 기록인데도 저자 본인이 직접 책의 체제를 기획하고 저술한 듯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되었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본문 중에 독일인인 니체의 용어 "위버멘쉬" 같은 것도 "슈퍼맨, 오버맨" 등으로 표현됩니다. 단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은 책이지만 인터뷰 형식은 아니고 가브리엘 박사의 단일한 내러티브로 진행되는 듯한 양상입니다.
책에 실린 목소리 자체는 전부 마르쿠스 가브리엘 본인의 것입니다. 그는 우선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을 비판하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내용이 잘못되었다(p82)"고까지 말합니다. 그 가장 큰 논거는, 자본주의 vs 공산주의 라는 전쟁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으며, 마치 프로레슬링의 태그매치처럼 지금은 전쟁의 바턴을 중국이 이어받아 계속 수행 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전쟁이건 역사건 아직 "종언, 종말"을 맞지 않았다는 거죠. "전선이 달라졌을 뿐 냉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p83)."
사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최근의 저서 <존중받지 못하는...>( https://blog.naver.com/gloria045/221955039953 )에서 많은 입장을 수정했습니다. 저자 가브리엘 마르쿠스는 그 점까지 "까고" 있습니다. 후쿠야마 교수가 "공산주의의 입장을 받아들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변절자"라고 저자는 맹비판합니다. "하나의 스토리에서 전혀 다른 스토리로 옮겨갔"으며, "(헤겔적 의미에서) 어떤 프로그램에 따르는 무의식의 과정"으로 역사를 보는 시선 자체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초인을 이야기했고, 또 최후의 인간을 논했는데 (전자가 당연히 아니라) 후자가 바로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가브리엘 박사는 말합니다.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죽음은 그저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갖가지 방법으로 이를 회피하려는 발버둥 정도로 정의되는데, 이 역시 선배 격인 니체로부터 영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21세기를 사는 우리 모두는 니힐리즘에 빠져 있고, 참된 지향을 거부한 채 연명하듯 살아간다는 점에서, 이를 극복하자는 게 가브리엘 박사의 진영인 신실재론의 대전제입니다.
삶과 세계에 의미를 추구하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이 의미는 "도덕"으로 옮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길 마치 수학을 가르치듯 하자고 주장합니다. 어려서 수학을 안 배우면 나이 들어 수학적 소양을 한창 발휘해야 할 때에도 그의 실력은 비참할 수밖에 없듯, 도덕 역시 마찬가지로서 도덕적 소양이 필요한 시점에 무기력한 사회 성원들이 어려서부터의 교육 결핍으로 전혀 힘을 못 쓰고 사악한 흐름에 쓸려가는 사태를 막자고 주장합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고 전선만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저자이니, 혹시 소련의 소명을 이어받은 중국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기라도 할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단호히 반대하는 건,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는 그 모든 책동과 의지입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무엇인가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게 비민주적 사고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관점에서 트럼피즘 같은 것은 반민주의 대표 징후이겠습니다. 또 스타벅스, 맥도널드 등이 있으니 우리는 독재국가가 아니라고 아무도 안 속는 선전을 벌이는 중국 역시 반민주의 표상이며, 민주주의의 특징은 "결코 그런 거짓 선전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주 명쾌하고 후련합니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따르는 상식적인 독자들에게는 말입니다.
앞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가루가 되도록 깔 때에도 가브리엘 박사는 "문화 상대주의"라는 프레임도 들고 나와 그를 비판했습니다. 대개 한국의 중등 교과 과정에서는 어느 한 문화가 절대적 선험적 우월성을 가질 수 없다는 맥락에서 학생들에게 문화 상대주의를 가르치며, 우습지만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도 그의 작품 <알렉산더>에서 이 가치를 (어설프게) 설파한 적 있습니다.
p64에서 저자는 "현대인 대부분은 문화상대주의(의 가치)를 믿는다"고도 합니다. 정작 상대주의는 가치를 부정하는 경향에 가깝다는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입니다. p99 이하에서 저자는 "(무기력할 뿐 아니라 증오와 독선을 결과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상대성에서 다원성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이해하는 듯합니다. 상대성과 다원성의 차이는 "도덕의 보편성, 상식(common sense)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않고에 있다고 이해되네요.
자본주의에는 어떤 원천적인 사악함이 내재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그럼 "노동의 분담"을 포기하고 공산주의로 이행해야 하나? 이분이 그런 결론에 이를 리가 없고, 참치 요리를 먹으려면 일단 바다에 나가 참치를 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듯, 노동의 분담 포기가 불가능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제발 인정하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의 입장 중 중요 사항 하나는, 반민주 요소의 핵심 공통점이 바로 "명백한 팩트를 부정하고 든다"는 겁니다. 공산주의나 파쇼, 혹은 인종차별 모두 말이죠.
그는 사회적 연대를 "상호 면책"이라는 개념으로 바꿔, 지나치게 가혹한 책임을 사회적 약자에게까지 부담시키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수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이걸 가리켜 그는 "co-immunism(공면역주의)"으로 명명하는데 물론 communism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다른 말로 그는 이를 "윤리자본주의"라 부릅니다.
확실히 1980년대 말의 후쿠야마 교수는 "상대적 관점에서 역사(의 의미)의 종말"을 논한 게 맞으며, 그가 이 이론을 들고 나왔을 때 세계는 그 칼날 같은 설득력과 바로 눈 앞에서 보고 있는 현실의 엄연한 흐름 앞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좋아하는 인류는 그리 쉽게 오랜 습관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좋든 싫든 간에 이는 21세기의 1/5이 지난 지금 이미 엄연한 현실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지금처럼 세상이 온통 인종차별주의로 물든 적이 없었다(p75)." 의미 찾기 좋아하는 인간의 손에서 강제로 의미를 뺏으려 든 게, 1) 이것도 저것도 모두 옳거나 모두 틀렸다는 상대주의, 2) 옳고 그르고를 가리려 드는 자체가 그르며 의미 자체가 애초에 없다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사조 아닌 사조였습니다. p145에서 저자는 "새로운 거대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거대 이론 안에 모두가 공감하고 동의하는 건전한 상식을 채워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 바탕에는 "상대성 아닌 다원성"이 작동해야 하며 이것이 인류 최후의 가치인 민주주의 작동을 담보한다는 거죠. 참 맞는 말씀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