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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리 dele 1
혼다 다카요시 지음, 박정임 옮김 / 살림 / 2021년 4월
평점 :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일 뿐입니다. 그러나 교통 사고 등으로 생을 미처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죽게 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라도 이제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세상에 남게 될 자신의 흔적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생전에 이를 위해 크든 작든 노력을 합니다.
한국에도 물론 "디지털 장의사"라는 업종이 있다고 알려졌습니다만 지금 이 소설에서 다뤄지는, "의뢰인의 죽음이 명확히 확인 된 후 개시하는, 의뢰받은 데이터에 한해 원격 혹은 직접으로 삭제를 진행하는 사업"과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설령 이 소설 속의 그런 업종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연 작중의 케이시나 그 누나 마이(변호사)처럼 철두철미한 직업정신으로 수행하는 이들이 있을지는 극히 의문입니다.
일본에는 혹 자신만의 고집으로 세상을 사는 이들이 많아서 케이시 같은 타입이 실재할 수도 있겠으나, 한국이라면 본 수입보다 왠지 (어뷰징을 통한) 부수입이 더 클 것 같은 사무의 성격 때문에 오히려 예상치 않던 부작용만 커질 듯도 합니다. 이 소설 중에도 실제 그런 언급이 있고, 사생활 침해나 다른 범죄에의 악용 위험도 크기에 치안 당국에서 특별히 견제할 듯합니다.
유타로는 이른바 "스트리트 스마트" 타입으로서 아직은 경험도 적고 지식도 부족하지만 여튼 순간의 기지와 근성으로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는 유형이며, 나이가 어려서 여러 모로 서투르기는 하지만 이런저런 구린 잡일의 해결사 비슷하게 생계를 꾸립니다. 지금은 케이시가 운영하는 dele dot LIFE라는 회사에서 유일한 직원으로 일하는데, 이곳은 저 케이시 같은 아주 고지식하고 철두철미한 프로그래머가 운영하는 곳이라 범법 같은 것과 거리가 멉니다. 정해진 궤도에서 한 치도 이탈하지 않으려는 젊은 고용주 케이시 때문에 오히려 똑같은 일도 피곤하게 해 나가죠.
세상에는 아주 악질의 인간들이 많아서 노인 등 판단력이 어두운 이들을 골라 강매 사기를 치는 일도 빈발합니다. 이 시리즈에 실린거의 모든 이야기가 이런 식인데, 뭐냐면 처음에 (아직은 좀 서투른) 유타로가 "이 사건의 진상은 이러이러하다"고 추리하고, 따라가는 독자도 그런 줄로 이해하나, 마지막에 가서 케이시가 진짜 비밀을 밝혀 내는 식입니다. 예전 추리소설 고전 형성기에 간혹 나오던 "안락의자형 탐정"애 가까운데 실제로 케이시는 걷지를 못해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장애인입니다.
<첫 포옹>에서 케이시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 주는데, 저러 범죄조직에서 최말단의 행동대원들은 간혹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일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 사건의 진상도 그런 쪽으로 드러나는데 시리즈의 첫째 사연으로 아주 인상 깊은, 멋진 반전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시크릿 가든>은 유명한 북유럽 밴드의 이름이기도 한데 이 시리즈에는 좀 독특하게 음악 관련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생을 거의 마감하게 될 황혼의 인생에게도 불륜이란 가끔 찾아오는 굴곡이겠는데, 죽은 부친과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알고 있던 "누군가" 말고 전혀 엉뚱한 다른 여인이 구질구질한 목적으로 찾아왔다면 정말 황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유명인(연예인)을 대상으로 알지도 못하는 일반인이 일방적으로 혼인신고를 해서 큰 문제가 된 적 있었죠. 일본은 지금도 이런 제도상의 허점이 있나 본데 물론 대체로 사회적 신뢰라는 게 있어서 편의를 유지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이제는 시대가 바뀐 만큼 시정이 필요할 듯 보입니다. 또, 의외로 이 작품에는 젠더 이슈가 슬쩍 등장하는데 사람의 감정은 처지에 따라 다르지 않고 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 공감하게 하려는 의도 같았습니다.
<스토커 블루스>. 이번에도 유타로는 사건의 진상을 너무 거창하게 지레짐작하는데 사실은... 우리는 보통 히키고모리와 오타쿠를 같은 범주 안에 놓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둘은 엄연히 별개이죠. 히키고모리라고 해도 애니 같은 것에 전혀 관심 없을 수도 있습니다. 겹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히키고모리의 특징으로 지레짐작했던 "어떤 것"이, 사실은 당사자와 전혀 관계가 없었음을 알고 놀라게 되며, 또한 "정상인 나는 과연 타인(완전 타인은 아닙니다만)을 저 정도나 배려하고 살았던가?" 하는 생각에 속마음이 뜨끔해지기까지 합니다. 별 것 아닌 진상에 맥이 빠지기보다, 이 역시 반전의 묘가 돋보였다고 느꼈습니다.
<인형의 꿈>.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가장 좋았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유타로는 헛다리를 짚습니다. "폴더 안에는 ....였다! 따라서 의뢰인이 의도한 건, 영원히 그 남편이.... 였던 것이다!" 이 시나리오도 상당히 그럴싸하지만, 그게 사건 진상의 전부였다면 좀 허무합니다. 시리즈의 구조에 대해 눈치챘으니 당연히 다른 진상이 앞으로 케이시의 입을 통해 드러날 거라 예상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사실 이런 추정도 꽤 그럴싸했습니다. 이미 작품 초반에 힌트를 충분히, 충분히 주었는데, 우리들 독자들은 아이들 주변의 사정은 그냥 액세서리겠거니 여기고 무심히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가는 그 허점을 멋지게 찌른 것입니다. p214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거야말로 자기 만족입니다."라고 쏘아붙일 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유타로의 인생내공이 느껴집니다.
교육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가난 때문에 재능을 발휘 못 한다면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헌데 겉으로는 평온하고 바람직한 공부방의 외관 뒤 전혀 엉뚱한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면? 이 1권에는 모두 다섯 편의 에피소드가 실렸는데 케이시와 유타로가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만 같을 뿐 모두 서로 별개의 이야기들입니다. 못된 인간이 잔인하게 본성을 드러내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좀 더 깨끗한 영혼으로 생을 정리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더 자주들 보였으며, 어떤 충족되지 못한 정의감, 설욕의 의지를 품고 사는 인간답게 유타로도 정직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이 더 자주 드러납니다. 다들 별나다 싶을 만큼 자신만의 윤리관에 충실한데, 이런저런 비열한 술수를 사회에서 더 자주 목격하는 독자 입장에서 뭔가 뿌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