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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개인주의자가 된다 - 각자도생의 시대를 견뎌내기 위한 인간다운 삶의 조건
박상용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4월
평점 :
개인주의란 참 어려운 개념입니다. 만약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모두 파편화하여 공동체의 목표에는 전혀 관심도 쏟지 않고 가장 원초적인 개인, 가정의 이익에만 골몰한다면 이는 문명이 아니라 야만 상태에 가까우며, 이런 사회에서는 부정부패가 판을 칠 겁니다. 물론 이런 건 개인주의의 개념에 포섭되지 않고, 오히려 극복, 지양되어야 할 단계에 속합니다.
반대로 사회의 기율은 잘 지키고 일사분란하게들 움직이지만 개인의 판단 재량이나 자유가 없고 어떤 명령에만 복종하는 식이라면, 이 역시 미개의 소치입니다. 이런 사회는 전체주의라 불려 마땅한데 상황이 이렇다면 일응 능률적인 외양을 갖추어도 결국 참된 진보가 이뤄지기 어려울 겁니다. 현재의 북한이나 러시아, 혹은 아마도 조선 시대 농촌 공동체 역시 이 비슷한 모습이었을지 모릅니다.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린 시절 일부를 독일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아주 획일적이고 자율성이 부족한 사회 풍조를 겪으며 "후진적"이라는 느낌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개인의 재량이 상대적으로 덜 용인되고 개성의 발현이 억제되는는 사회는 "선진적"이란 느낌을 잘 주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회사나 각종 조직에서 개별 성원의 목소리가 존중되어야 그게 정상으로 여겨지며, 자격도 없는 자가 뭘 가르치겠답시고 혼자 목소리를 크게 낸다면 이미 삼류 사류 조직으로 평가절하당해 마땅하다고들 여깁니다.
이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개인과 시민의 자율성"은 존중되어 마땅하다고들 여겼습니다. 서양의 문화가 이처럼 자유롭고 창의를 존중하는 아테네 도시 문명을 고전으로 삼고 발전했기에,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시민 문화가 이 정도씩이나 꽃을 피울 수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라고 해도) 시민과 인간이 (누구에게서 어떤 권한을 부여 받지 않고) 그 자체로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p66)."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부인권, 불가양의 권리 등은 근대 계몽주의가 싹튼 이후에나 공유하게 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 민주주의, 휴머니즘"은 런던 왕립학회가 확립한 체계에 따르면 "삼위일체"로서 존재한다고 합니다(p64). 삼위일체는 그저 수식어구나 클리셰로 흔히 쓰는 어구가 아니라,. 신학에서 쓰이는 개념 그대로 "셋은 하나요, 하나는 곧 셋이며, 어느 하나 없이는 나머지 둘도 존립할 수 없다."란 뜻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휴머니즘 역시 민주주의 없이는 현대 국가에서 현실화하기 힘들며, 이 모든 것은 개인주의를 출발점, 기초로 삼습니다.
근대적인 개인의 탄생은 아무래도 (시대를 앞서간) 문학 작품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문학은 아득한 고대에도 이미 여러 형태로 존재했으나, 돈키호테, 햄릿, 로빈슨 크루소 처럼 어떤 정형과 천편일률에서 벗어난, 입체적이고 개성 뚜렷한 개인들은 근대 이후의 우수한 문학 고전에서부터 등장하죠. 저자는 밀란 쿤데라 역시 개인을 논했음을 환기하는데, 쿤데라의 경우 오랜 동안 전체주의 사회의 획일적인 억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온 작가라서 그 논의가 더욱 실감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은 그저 예술가이기만 했던 게 아니라 과학자, 기술자, 군사전략가이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특히 만능인이고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꼽힙니다만, 저자는 이를 놓고서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개인상"을 처음으로, 또 자신의 일생을 통해 직접적으로 증명해 보인 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의 시조"로 꼽습니다. 이들 개인은 공동체의 후원이나 편입이 아니라도 자립할 수있었고, 군주의 은혜에 의해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군주가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게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추적 역할을 보였습니다.
트렌드. 우리는 적든 크든 트렌드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편입니다. 트렌드는 젊은 세대들만 민감해하는 게 아니라, 나이 든 사람들도 그들 그룹 안에서 세련되고 멋있게 보이려고 온갖 유행을 참고합니다. 이런 트렌드도, 무엇이 아름다움이고 또 그것의 표준인지 정하는 문화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결정되는 바 다분히 있습니다. 이를 두고 일찍이 사회학자 뒤르켐은 "집단성의 또다른 이름"이라 규정한 바 있다고 합니다(p179). 예전에 왜 머리를 빨간색으로 염색하냐고 묻자 "개성 있잖아요?"라고 대답한 어느 X세대 소녀가 있었는데, 머리를 그리 물들이는 것 역시 또래 집단 안의 유행에 불과했던 걸 그리 포장해서 말하는 게 우습기도 했죠. 참된 개성은 트렌드, 혹은 일체의 집단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난 후에 발현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경제의 민주화", "바람직한 민주사회의 기초"로까지 논의릃 확장(p216)시킵니다. 본시 개인주의는 이천 수백년 전의 소크라테스(회의주의를 극복한 진취적 합리적 개인주의의 제창)에서 "익명의 택배기사들(p11)"에 이르기까지 그 맥이 이어진다고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들을 일상에서 혹은 구조(독점 자본의 그것 포함)에서 억압하는 모든 사회적 병폐와 모순 역시, 레닌이나 스탈린식의 작위적이고 폭압적인 기제가 아니라, 개인개인의 가식 없고 자연스러운 각성과 의견 표명(의 자유)을 통해 이뤄질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