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준비교육 20강 - 삶이 행복해지는 죽음이해, 돌봄에 대한 가르침
김옥라 외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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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후 지존의 자리에 올랐으나 죽음 앞에 무력함을 깨닫고 동남동녀를 보내 불로초를 구하려 들었습니다. 허나 그 시도는 무위로 끝났고 그의 제국은 2세 호해의 손에 들어간 후 오래지 않아 무너졌는데 이는 아마도 진시황의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대비가 매우 부실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는 기인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고대 제왕의 죽음도 이러할진대, 우리들 평범한 소시민의 경우야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얼마나 깔끔하고 대범하며 합리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준비하느냐에 따라, 우리들 인생이 얼마나 보람되었으며 알찬 유산을 남기는지가 결정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보통 대학교 학부 과정 강좌는 16강 정도가 한 학기를 구성합니다. 사실 "개론" 수준이라 해도 16강 정도로 과연 마스터가 가능할지는 언제나 의문이었습니다만, 이 역시 가르치는 분과 배우는 이의 마음가짐, 열의, 재능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강"으로 이뤄진 이 책은 어떠할까요? 저는 처음에 책을 받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체제나 구성, 내용이 마치 학창 시절 열독한 교과서와도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어려운 책은 아닐까?" 솔직히 그런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 혹은 제목에 끌려 책을 펴 든 독자가 염두에 둔 토픽 자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게 과연 만만한 과제입니까? 천하를 통일한 자마저도 끝내 정복하지 못하고, 혹은 성숙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서 패배한 대상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한다면서, 간단한 충고 몇 마디로 대신하려 들었다면 이는 죽음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보다 잘 준비하고 영접하려는 이들(그 시기에 차이는 있을망정)이라면, 이 정도 "교과서"는 수능준비하는 마음가짐으로 열독 정독하고 마음 속에 새길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로고테라피란 무엇입니까? 물론 이 용어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많은 다른 쓰임새들이 있겠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그 창안자인 오스트리아의 빅토르 프랑클(책에서의 표기는 "빅터 프랭클") 박사의 입장을 충실히 따릅니다. 이분은 정신분석학의 태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보다 약 반 세기 뒤의 인물인데, 역시 제국 시절, 혹은 그 직후 시기의 오스트리아는 의학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날 행해지는 심리치료의 이론적 바탕 대부분은 이분의 업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로고테라피에서 "로고"는 물론 의미라는 뜻(p64)입니다. 이 용어는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을 때의 바로 그 말씀, 로고스와 어원이 같기도 합니다. p60에서 인용되는 프랭클은 "죽음은 인생의 3대 비극이지만, 결단코 죽음은 삶의 비극에만 그치지 않고,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고, 나아가 삶을 완성하는 가장 강력한 자극"이라고 합니다.

우리들 인생은 그 끝이 있고 무한정이 아니기에, 우리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더 의미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며 주어진 시간의 귀함을 깨닫습니다. 끝도 없는 무한의 시간 안에서라면 인간은 그저 말초적 쾌락에 몰두하며 전혀 자신을 객관하거나 의미를 탐구하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타인을 배려하려 들지도 않고 함께 세상을 개선하려는 시도도 전무하겠으며 모두들 그저 하등동물처럼 제 본능에만 충실할 것입니다. 죽음은 이처럼, 인생과 존재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의 동기와 유인을 제공해 줍니다.

"로고테라피는 그저 치료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진정한 성장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다른 치료 행위와 달리) 그저 깨어진 균형을 회복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균형까지 깨뜨려 새로운 불균형까지 만들어 냄으로써 치료와 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한다.(p65)" 책의 이 문장을 잘 읽어 보십시오. 죽음을 상상하면 한 없는 불안과 슬픔이 몰려와서 이 책을 펼쳐 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은 아마 "정신의 균형, 안정이 깨어져 치료가 필요한" 분들일 겁니다.

그런데, "죽음준비교육"은 그런 분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죽음 같은 건 아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젊은이들, 혹은 현재 아무런 고통과 불편과 궁핍을 겪지 않기에 지극히 마음이 안정된 분들에게도, 오히려 이 책은 더 강력한 효용과 수요를 가집니다. 이런 분들은, 인생에서 여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곤궁(사람에 따라서 이런 위험이 아예 면제된, 축복 받은 이들도 물론 있습니다), 혹은 죽음에의 위협(이것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등을 비로소 겪을 때, 처음으로 정신적 안정이 깨어지며 극도의 불안정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백신도 건강할 때에서야 맞을 수 있듯이, 이런 분들일수록 오히려 평소에 죽음을 "정석에 맞추어" 대비해야 저런 갑작스러운 위험에 닥쳐서도 순조롭고 지혜롭게 극복해 낼 수 있겠습니다. 태평스럽게, 현재의 편안함과 안일함에 매몰되는 것도 여튼 균형이며,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균형은 빨리 깨뜨려버려야 참된 마음의 평화, 올바르고 단단한 (새로운) 균형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거죠.

"아빠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아빠는 지금 먼 여행을 떠나셨단다(p112)." 아직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 죽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무섭고도 아득한 미스테리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와 즐겁게 놀아 주던, 정서적으로 깊이 의존하던 어떤 거인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게, 그 어른의 부재라는 현실 자체도 견디기 어렵지만, "돌이킬 수 없는"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되는" 속성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이런 속성을 지닌 죽음이라는 게 너무도 두렵습니다. 이 책 6강에서는 이처럼 어린이들이 마주해야 할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해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비 교육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p122에 나오는 J. William Worden의 방식이 인상 깊었습니다. 세 가지 방법이 나오는데 또래들과 함께허는 집단 활동, 상담, 부모의 개입 등입니다. 이 중에는 미술(그림 그리기) 등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하는 방식이 포함됩니다.

"죽음 교육은 그 속성상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인 접근이 유용하다.(p142)" 이 문장은 물론 미국의 중학생들을 염두에 주로 둔 진술이지만, 어차피 죽음에 대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해도 별 차이는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배경을 지닌 교사(지도자)에게 배워야 하겠으며, 어차피 올바른 죽음관을 배양받고 습득하는 방식이 종합적이고 전체적이라야 하기에 이는 당연한 결론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들 학습자들도 이를 배울 때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학습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부 기능이나 국지적 지식을 배울 때와는 자세가 달라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과연 죽음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을까요? 이보다는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아직 삶의 기쁨도 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대체 "죽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던 경험을 먼저 떠올려 볼 만합니다. 난감한 건, 사실 우리 어른들도 이런 전문가들의 체계적 지식 앞에서, 그저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만 아직 모르는 게 아니라, 아예 "죽음"의 정확한 개념이 뭔지 모른다는 점은 어린이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나의 무지를 솔직히 인정하는 데에서 새롭고 참된 배움이 시작할 수 있죠.

이런 이치는 죽음이라고 다를 바 없어서, 기존의 피상적인 지식을 넘어서 우선 그 개념부터를 정확히 다시 이해하는 게 첫걸음입니다. p155에는 미국 법학도들의 필독서인 "블랙 법률 사전"의 정의가 인용됩니다. 우리도 1993년에 처음으로 의협에서 뇌사를 사망판정기준으로 삼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만 아직까지 그때로부터 큰 진전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늙음"에 대한 현명한 대처도 가능한데, p166 이하에 "에이징"에 대한 아주 유용한 정의, 대응 방법이 나옵니다.

p183 이하의 10강에서는 호스피스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호스피스 포함 요양병원은 요즘에서야 인식이 크게 확산되어, 부양해야 할 부모님을 "어디 갖다버리는 것" 정도로 부정적으로 여기던 단계에서 크게 현재는 벗어난 상태입니다. p194 이하에 자세히 나오지만 호스피스는 본디 완화치료 자체를 직접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책에서는 아예, "호스피스는 치료 개념이 아예 아니며, 따라서 병원보다는 가정에서 이뤄지는 활동"에 초점을 둘 것을 제안합니다. 물론 현실에서 호스피스는 "완화치료"와 병행되는 경우가 많겠으나, 치료 자체는 아니므로 의료, 의학상의 개념과는 (원칙적으로) 별개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하고 효과적인 호스피스가 이뤄질 수 있죠. p142의 문장 "죽음준비교육은 다(多)학문적이다"를 다시 한 번 새길 일입니다.

p263에는 서머싯 몸의 유명한 <사마라에서의 약속>에서 죽음의 신에 대한 우화가 인용됩니다. 이 우화는 2017년 1월 1일 한국의 KBS에서도 방영된 영국 드라마 <셜록> 시즌 4의 한 에피소드에도 나옵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정진홍의 저서 중 "살아 있는 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결국은 죽어야 한다"는 문장도 인용됩니다. 이 대목에서 저 우화는 죽음의 불가피성, 필연성의 부각 외에도, 죽음의 "일상성"을 일깨우기 위한 의도로도 인용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는 게 죽음이며, 삶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죽음이란 사실만 흔쾌히 받아들여도, 죽음 때문에 공포에 떨 이유는 상당히 줄어들겠습니다.

p266에는 "하나님 컴플렉스"가 나옵니다. 죽음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가지면, 이처럼 삶에 대해서도 올바르지 못한 인식, 행동, 그리고 나쁜 결과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책데는 다양한 영화에서 비뚤어진 세계관을 가진 빌런들이 예시되는데, 사실 이 책에 나온 캐릭터들 말고도 이런 컴플렉스에 시달리며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는 픽션상의 인물, 실제 역사의 악당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하게 된 동기 중 하나는 죽음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라는 점도 이 책을 통해 이해 가능하죠. 책에는 "죽음의 뒷면이 삶이요, 삶의 앞면이 죽음이다" 같은 문장도 있으며, 도원선사의 발언(p240)을 통해 삶과 죽음을 기(氣)의 응집 여부에 따라 구별하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죽음/삶으로 접근하므로 어떤 특정 종교 베이스에서 출발하지 않느냐는 의구심은 깔끔히 접어도 좋겠네요.

p300 이하에는 "애도 상담"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애도는 영어로 condolescences라고 하는데, -s라는 복수 접미사가 붙은 저 모습만 봐도 애도의 효과가 각별한 노력, 성의,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mourning. grieving, lamentation 등 다양한 단어도 등장하는데 이들 각각의 의미에 미묘한 차이가 있음도 책을 통해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인이 가장 흔히 접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바로 lamentation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310에는 저 위 p122에서(그 외에도 많습니다) 인용된 워든 박사의 다른 업적, 즉 과업이론이 자세히 설명됩니다.

"용서"는 결코 현실 도피의 값싼 감정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용서도 죄 지은 자가 준비가 되었을 때에나 가능하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용서는 그리 쉽게 행해지는 정신작용, 행위가 아니며, 이 대목에서 필자(공저자분들 중 박순 원장입니다)는 제임스 뉴튼 폴링 박사와의 만남을 회고하며, "상처는 그저 상처일 뿐, 무작정 잊으라고 강요하지 말라"고 외친 캐서린 후트의 시를 재인용합니다 맞는 말이죠. 가해자가 멀쩡히, 회개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데 무슨 피해자가 눈물을 떨구며 뒤에 숨어서 가해자를 용서하겠습니까. p328에는 "강요된 용서보다는 새로운 이야기의 재구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p364 이하에서는 장례와 기타 포괄적인 의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반성적 극복이 나옵니다. 이미 유교적 폐습과 가치관이 극복된지 오래지만, 개중에는 여전히 우리의 의식과 관습 중에 남아 음습한 악영향을 지속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개인들이 주관적으로 진취적이고 생산적인 의식만 각성한다고 될 일은 아니며, 사회적으로 반복 시행되는 리추얼과 루틴 중 개인의 각성, 극복, 재생 등을 방해하는 건 혹시 없는지 마땅히 돌아볼 일입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서 죽음 자체를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긴 하나 이는 다분히 자기기만적인 주문입니다. 그보다는, 그 속성을 이성적으로, 또 성숙한 감정으로 직시했을 때 "의외로,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니었음"을 바르게 깨닫는 게 더 중요합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소중하며, 죽음을 비통하지 않고 행복하게, 성숙하게 끌어안은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궁극의 깨달음을 얻고 죽은 것이라는 점에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동의한다면, 오히려 남은 삶의 날 하루하루가 기쁨과 보람으로 가득 차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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