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답게 나답게
안셀름 그륀.안드레아 라슨 지음, 안미라 옮김 / 챕터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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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영성". 공저자 중 한 분인 안셀름 그륀에게 붙은 호칭 중 하나입니다. 두 분의 공저자들 중 다른 한 분은 안드레아 라슨이며, 수도사인 그륀 박사의 여동생의 딸, 즉 외조카입니다.

나답다는 건 무엇일까요? 또, 너답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의 궁극 과제를 오직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도 있겠으며, 참다운 나를 찾은 사람은 이미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분이 가톨릭 수도사이니 가톨릭적인 세계관에 합당한 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특히 가톨릭에서 성직자는 평신도, 나아가 일반인들의 모범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분이 규정하고 제시하는 "나다움, 너다움"의 해답은 결코 특정 종교의 (제한된) 이상상에만 부합하는 게 아닙니다.

조카인 안드레아 라슨은 외삼촌에게 묻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남동생은 자전거 타기에 빠져 있습니다. (중략) 아시다피시 저는 달리기를 좋아한답니다.(하략)"(p45) 이 말을 하면서 안드레아 라슨은 "우리는 이처럼,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의 영혼을 또한 공유하기도 합니다."라며, 어느 순간은 이런 모습, 또 어느 순간은 저런 모습을 띠는 우리들이, 과연 어떤 양태의 참모습을 지니는 건지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집니다.

독자인 저는 이 대목이 몹시도 흥미롭더군요. 보통 자전거타기라든가, 혹은 이런저런 취미활동을 누리는 이들이, 물론 동질감과 공감대를 형성하긴 하지만, 그를 넘어 영혼의 빛깔까지 서로 같다고 여기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습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내 영혼이 어떤 모습일까?"라는 궁금함 자체를 갖지 않는 게 보통일 겁니다. 안드레아 라슨은 이미 그 어머니와 함께 몇 권의 저술 활동에 참여할 만큼 성숙한 어른입니다만, 또 이미 아이들의 부모가 된 처지(p109)입니다만, 이런 질문을 던질 때는 마치 어린이처럼 천진무구한 어투를 보입니다. "삼촌, 이건 뭐라고 부르나요? 또 저건 뭐죠?" 질문이 끊이지 않으며 정원을 노니는 꼬마와도 같습니다.

이 와중에 그녀가 심각하게 묻는 건, 궁금해하는 건, "역할의 의의"입니다. 내가 이런 처지에도 놓여 보고, 저런 상황에도 처할 수 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일시적인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처지가 바뀌어 봄으로 해서 사람은 타인의 입장에 공감도 해 보고, 전에는 채 보지 못하던 어떤 지평까지 엿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넓혀진 인식이나 깨달음 중 어떤 것이 나다운 것이며, 어떤 것을 영혼에 과연 덧입혀 옳은지, 그녀는 오랜 수도사 생활을 거친 외삼촌에게 진지하게 답을 구하는 중입니다.

p108에서 조카는 다시 "자아"에 대해 묻습니다. 물론 타 종교인 불교에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논합니다만 여튼 이분들은 비교적 자신에게 가깝거나 평생을 서원한 종교의 틀 안에서 해답을 찾는 게 또한 자연스럽습니다. 이에 대해 외삼촌은 성경 복음서를 인용하며 답을 제안하는데, 원문에서 예수 역시 매우 간략하게 답을 주었듯, 그 역시 짧으면서도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이라는 것이며, 이는 루카의 복음서가 그 출전입니다.

영성의 삶은, 예를 들면 매일 하루를 고된 육체 노동에 시달리다 저녁이면 귀가하여 지쳐 잠드는 노동자의 삶과 다를까요? 그륀 박사의 결론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종이 제 할 일을 애써 마쳐도 주인은, 혹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애써 칭찬하지 않습니다. 영성으로 가득하여 날마다 고상한 주제로 묵상에 잠기는 사람은 남의 칭찬을 받아야 할까요? 이 역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연의 영성으로 돌아가 청정 상태에 들어가는 건 그저 자연의 섭리만큼이나 자연스러울 뿐입니다. 이를 두고 "칭찬과 평판"을 기대함은, 마치 예수가 복음서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을 두고 "회칠한 무덤, 위선자"라 맹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의, 어떤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거죠.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이를 일부 계승한 기독교에서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랑을 논한다는 점, 우리도 고교 교과 과정에서 배운 바 있습니다. 조카인 안드레아 라슨은 이 중 내면의 사랑이 반드시 내면에만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를 표하면서, 진정한 사랑은 내면에 머무르지만 않고 반드시 그 외적인 발현을 동반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특히 수도원 안에서의 청순한 사랑 형태만 지켜야 하는 상황과 모순되지는 않냐고 묻는 듯합니다. 또한 안드레아 라슨은 자신이 부모의 입장이기도 한 만큼, 부부가 서로에게 품는 사랑은 어떤 양태가 이상적인지에 대해서도 묻습니다.

수도사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만약 흔들린다면, 이것은 이른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간 후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을 외쳤다는 지족선사의 일화와 다를 바가 없죠. 그륀 박사는 이에 대해 그 충동의 존재를 구태여 부인하지 않으며, 그러나 이는 "신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데 하나의 영감을 제공할 뿐"이라고 합니다(p154).

우리는 누구나 일상에 치여 거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러면서도 물욕과 애욕을 놓지 않고 세속의 게임에서 작은 포인트라도 하나 더 따는 방식에 대해 일종의 자부심마저 느낍니다. 그러나 성직자의 청신(淸新)한 삶은, 이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가 어린이의 무구한 마음으로 복귀해야만 천국과 평화로 가는 입구가 열릴 것이라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면서부터 성인(成人)이 된 사람은 없고, 어린 시절을 다 겪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흔하고 공통된 초심에의 회귀가 세상에서 가장어려운 과제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날마다 나의 양심이 다친 바 없는지 자성하고, 참다운 내 모습이 과연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끊임 없이 살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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