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동 204호 아파트 교회 - 도시 목회의 대안 아파트 교회 개척 이야기
이동복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저자 이동복 목사님은 현재 인천 청라 좋은밭교회 담임목사로 재직중인 분입니다(책 앞날개). 게시된 경력을 보니 수영로 교회 부목사 사항도 있는데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 아주 가깝게 위치한,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로 꼽히던(현재도 같습니다) 곳이라서 반가웠습니다.

책 제목에서도 우리가 눈치챌 수 있듯 저자께서는 "현장 목회에 탁월한 교회 개척자(p4. 앙현표 총신대 교수의 추천사 중)"이십니다. "개척"이란 말은 일상에서 흔히 쓰긴 하나 이를 (어느 분야가 되었건 간에) 실천에 옮기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특히 교회의 개척은, 과거와는 달리 한국에 반(反) 개신교 풍조가 상당히 퍼진 작금에 있어서는 더욱 힘든 과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특정 종교를 반대한다는 게 아니라, 그 중에는 교회가 반드시 경청해야 할 사항도 있는 만큼 목회자의 사명감 고양과 자질 향상은 더욱 어려운 과제가 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간판도 없고, 새벽기도회도 없고, (심지어) 전도도 없는, 아파트 103동 204호 교회를, 인근도 아닌 부산, 강릉 등지에서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역시, 추천사인 p5 이한수 명예교수의 말 중에서 인용했습니다. 비(非) 개신교 신자 중 해당 종교에 대해 대뜸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 "극성스러운 전도"이겠습니다. 물론 요즘은 꼭 그렇지는 않으며, 비정상이라 할 만큼 열을 올리는 전도는 종파 불문 종교 불문의 일반적인(그래서 우려스러운) 현상이 되었습니다.

여튼, 어떤 교회가 전도도 없이, 그처럼 알음알음으로 주목 받고, 외부에서조차 절로 찾아오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된 비결이 참으로 궁금합니다. 다시, 책 추천사 같은 페이지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자면, "말씀 앞에 자신의 온갖 우상들을 내려놓고, 깨지고 부서지면서 새로 거듭나기를 갈망하는 저자의 기도가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가능"했다는 게 이 명예교수님의 평가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떡, 뛰어내릴 것, 세상의 부귀영화(p44)." 저자는 이를 다시 다른 말로 바꿉니다. "정욕, 권세, 돈" 복음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며,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역시 이를 대심문관의 에피소드로 변형하여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에서 "과연 신의 영감을 받아 쓰인 이야기"라며 무신론자인 이반의 입을 빌려 격찬하고 있습니다. 책의 다음 페이지에서 "예수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다:"는 말이 나오니다.

독자인 저는 예전에 찰스 셸던의 소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기란 참 쉽습니다. 남들 듣기 그럴싸한 아름다운 격언, 근엄한 충고를 남한테 폼 잡고 떠드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매 순간, 내 머리 속에(가슴이 아닌) 기억된 예수의 이런저런 가르침을 기준 삼아, 내가 맞닥뜨린 모든 상황에다 그대로 대입해 보고 정말 실천에까지 옮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저 셸던의 소설은 문자 그대로 그런 상황을 상정하고 픽션화한 작품이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저는 아직도 이 가르침을, 가장 낮고 작은 스케일에서조차 실행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분명 그게 바른 길이요 선택인데도 말입니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는 사도라고도 불리며, 원래는 경건함이나 성스러움, 심지어 지혜로움과도 별반 상관 없는 삶을 살던, 지극히 평범한 위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소명을 주어,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든 이가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제자로서 사는 삶"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로만 가톨릭이 세상을 덮었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다.(p64)" 여기서 저자께서 말하는 종교개혁이란 아마도 후스와 위클리프가 일으킨 선구적인 움직임까지 모두 포함하는 맥락일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유럽을 온통 로마 교황의 권위가 뒤덮고 짓누를 시절이었겠으니요. 저자의 말은 이어집니다. "지금은 자유주의 신학이 세상을 덮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종교개혁으로 돌아가기보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은 물론 숭엄한 움직임이었고 그 결과도 찬란히 맺었으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최종의 목적지("땅끝")는 어디까지나 예수의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장 목회와 교회 개척의 달인이시라고 합니다만 저자에게도 엄연히 시련과 실패가 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 단 한 번의 주춤거림과 넘어짐 없이 쾌속 급행 질주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참으로 진솔한 고백과 그로부터의 깨달음이 이어지기에 더욱 큰 진정성과 설득력으로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말씀은 리얼 판타지이다."

"복음이 우리를, 말씀이신 하나님께 인도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우리를 교만케 하고 면죄부 역할을 했다. 마치 산돌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벽돌에 역청을 만들어 우리 이름을 내려는 바벨탑을 닮았다.(p105)" 우리는 죄악이라는 결과에 빠진 우리 자신에 충격을 받고 자기연민에 곧잘 빠집니다. 그럴 때마다 무엇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며 눈물을 떨구고 용서를 청합니다. 그러나 이런 뉘우침의 순간에마저 우리는 남 탓, 상황 탓, 사탄의 탓을 일삼지 않습니까? 나쁜 짓을 한 건 엄연히 우리의 욕정, 탐욕, 오만이었으며, 이 순간의 사탄의 대변인, 육화 노릇을 우리들 자신이 저질렀는데 대체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교회에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 작자들이 16세기 유럽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거짓 눈물과 기도로 양심의 짐을 그때그때 덜려 잔꾀를 부리는 우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저자는 아주 솔직한 분입니다. 목사님이시면서도 송도에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할 때, 노후대책도 겸하여 어디가 과연 가격이 잘 오를 유망한 곳인지를 물색하는 재미가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 되면 나의 하나님은 송도의 32평 아파트가 아니었을까?(p128)" 살면서 한 번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의 윗자리에 물질과 황금을 둔 적 없는 인물이 모세 이래 과연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스스로도 부끄럼 없이 내면화한 철의 규율로 제네바를 다스린 장 칼뱅 정도 아니었을까요? 이 책은 이처럼 목사이신 저자께서 너무도 솔직히 자신의 지난 여정, 오류와 불신과 욕심으로 적잖이 점철된 이력을 털어 놓고 계셔서 더욱 감동적이고 흥미로웠습니다.

베드로의 본명은 게바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을 가리키는 헬라어이며(p150), 게바는 아람어인데 아람어는 당시 서아시아 일대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작동했습니다. 게바는 바울에게서 큰 책망을 받았는데, 본심은 (폐쇄적인) 유대인으로 살면서 그 "외식"만을 그리스도인으로 꾸민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같은 페이지). 배드로가 대체 누구였습니까? 제자 중 으뜸가는 이였으며, 반면 바울은 오히려 초기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로마 당국에 넘기는, 그리스도의 길과 정반대 대척점에 서 온, "유대인 중의 유대인(p152)"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마저도 미진한 면이 있어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으니, 하물며 가장 부족하고 가장 죄 속에 크게 빠져 영혼을 더럽히는 우리들이, 올바른 길을 찾고 복음을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오히려 선민 의식에 빠져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기니 이보다 더 걱정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파트 6에는 성도들의 간증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참 별 일이 다 있어서, 어떤 심방은 한 번 요청하는 데 천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책에는 "이걸 예수 굿이라고 하는거야"라는 말도 나오는데, 예수깨서 직접 보시기라도 했다면 "내 아버지의 집을 돈놀이로 더럽혔다!"며 불호령을 내리셨을 법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된지 백 년이 훨씬 넘었으나, 오히려 토속의 못된 풍속과 접합하여 이처럼 병든 행태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게 굿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욥은 한때 남부러울 바 없이 윤택한(세상의 기준에서) 삶을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영혼의 갈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거짓말처럼 온갖 악운이 그에게 닥쳐 옵니다. 사탄의 장난과도 같은 매일이 이어졌으나, 욥은 이 모두가 주님의 역사라 여기고 절대적으로 섭리 앞에 겸손하며 순명하는데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세상에서 남들 누리는 복락을 고루 누리며 살게 해 달라고 빌어대는 비천한 단계를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참된 길이 무엇인지, 이를 한눈에 직시하는 방법이 의외로 간단하다는 사실이 알고 보면 더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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