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봄을 믿어야 해요
최대환 지음 / 파람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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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현재 천주교 의정부교구에 소속, 봉직 중이신 최대환 신부님입니다. 언제나 계절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고, 깊은 밤 후 아침이 다시 찾아오듯 사방천지를 환히 밝히며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믿음이 약한 우리들은 혹한 중 과연 신춘을 다시 맞을 수 있을지 불신을 가득 품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봄은 반드시 돌아오며, 봄을 다시 맞으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진짜 신비한 것은 정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모두 드러내기 마련이지요."(p25) 이 구절은 체스터튼이 창조한 캐릭터 브라운 신부의 말이라며 저자 최 신부님이 인용하는데 브라운 신부는 명탐정으로 유명하며 이 외에도 주옥 같은 명언을 여럿 남긴, 추리물 팬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매력덩어리죠. 제가 기억하는 그의 명언은 "당신은 이성을 비난했는데, 그것은 아주 천박한 신학입니다(진지한 성직자라면 결코 이성을 매도하지 않는다는 뜻)."라며 가짜 신부 노릇을 한 대도 플랑보의 정체를 드러내며 한 말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 나오는 프로스페로는 위트 있고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사실 그는 과거의 아픈 경험 때문에 깊은 원한을 품음직도 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마음에서 우러나온 용서만이 자신의 삶에 참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 현명하게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최 신부님은 셰익스피어의 이 작품에서 "용서야말로 궁극의 해법"이라는 오랜 진리와 결론을 다시 확인합니다. 잘 알려진 주제의식이긴 하나 역시 고전을 읽는 독자가 선제적으로 이런 공감을 지니고 있어야 해당 명대사가 눈에 더 잘 띄일 것입니다.

종교학자들은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라는 구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p20). 사실, 원시 종교와 고등종교라는 명명법을 너무 쉽게 구사하면, 그것은 무속 신앙 종사자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형식적으로는 대형교회나 성당, 사찰 등에 등록되었지만, 영혼과 내세에의 깊은 성찰 없이 그저 현세에서의 기복을 구하는 데 그친다면, 그런 이들은 결코 고등종교 신도라 불릴 자격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해당 종교에서는 "묵상"의 습관화를 강조하곤 하죠. 저자는 이를 두고 "머무름의 체험 기회(p21)"라 부릅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어느 누구라도 한 자리에 오래 "머문다"는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찰나의 통과만 일삼는 우리의 행태가 내면에 남기는 흔적이라곤 고작 "공허와 불안, 허무감"일 뿐입니다.

p77에는 베토벤의 서한 몇 구절이 인용됩니다. "Muss es sein? Es muss sein!" 여기서 es는 별 뜻 없는 비인칭에 가깝고, 영어로 옮기면 Must it be?이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 그래야만 한다! 대체 베토벤은 무엇이 그래야만 한다고 외치는 걸까요? 그런 음악적 천재의 귀와 눈에 무엇이 보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플라톤이 궁극의 이상을 간파하고 세속의 둔재들에게 "이데아"를 설파했듯, 베토벤도 "그래야만 하는 그 무엇"을 혼자 발견하고는, 약해지는 자신의 의지를 다잡으려 저리 외친 듯도 보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결단이 모여서 다져진 신앙인의 삶 안에서, 주님과의 만남은 필연"이라 정리합니다. 만해 한용운에게 "님"은 불법(佛法)과 조국이었듯, 베토벤에게 있어 "주님"은 음악의 완성과 인생의 진리 터득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들 모두도, 각자의 생에서 소중히 간직하고 성취하고 싶은 자신만의 주님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 여부와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유가에서는 "위인지학이 아니라 위기지학"을 강조합니다. 남 보라고 행하는 효행이나 공부, 독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알차게 다지고 가꾸는 수행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p93 이하에서 "단식의 참된 의미"에 대해 논합니다. 마침 요즘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사순 주간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사야 예언자가 단식의 의미를 사회적 차원으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외쳤다"면서, 종교에서 강조하는 덕행이나 수련은 결코 개인적 만족의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남 보란 듯이 단식과 고행을 행한 일부 율법학자와 바리새파들을 두고 "회칠한 무덤"이라 비판하며 그들의 위선을 호되게 질타했습니다.

p119에서 저자는 계속하여 신앙인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합니다.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사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이 청빈의 미덕을 강조하고 실천에 옮겼으며, 가톨릭은 내, 외부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물질적 타락과 부패를 경계하는 열렬한 움직임이 일어난 바 있었습니다. 이런 숭고한 운동은 무엇보다 내부의 모순과 불의에 각별한 경계를 두어야 하겠으며, 어떤 불순한 정치적 목적이나 위선적 행태에 악용되는 일이 결코 없어야만 그 본지를 달성할 수 있을 듯합니다. 표리부동한 인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운동의 목표는 역효과와 일탈로 엇나가기 일쑤 아니겠습니까.

사순 주간이니만치, 닭이 울기 전에 자신의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일화가 묵상의 소재를 더욱 우리 곁에 가깝게 가져다 주는 듯합니다. 서슬 퍼런 공권력이 자신들 같은 신흥 세력에 대해 높은 적대감을 갖고 한밤중에 몰려와 스승을 나포해 가는 공포의 순간, 제아무리 혈기 왕성한 이였다고 해도 감연히 저항하거나 떳떳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겁니다(복음서에 따라, 베드로가 한 군인의 귀를 잘랐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를 치유하는 기적을 베풀었다는 기술이 있습니다). 독자를 가슴 아프게 하는 대목은, 그가 자신의 잘못을 바로 깨닫고 통회와 부끄러움이 담긴 눈물을 흘리는 장면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모두의 약함, 불신, 비겁함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기에, 신앙인들이 두고두고 읽으며 자신을 추스르는 교본으로 삼기에 충분합니다.

"성모의 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이렇게 시작하는 성가가 있을 정도로 가롤릭에서는 5월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합니다. 저자는 p228에서 프란츠 베르펠의 <벨라뎃다의 노래>를 인용하는데, 이분은 2차 대전 말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 스페인 국경의 루르드를 찾아 그 유명한 성모 발현의 기적을 떠올리며 여태 거리가 멀었던 신앙에 대해 눈을 뜨는 체험을 책에 담았다고 합니다. "시대의 어둠과 천박함을 이기는 가장 큰 힘!". 사실 우리는 매 순간 사악한 유혹과 나 자신의 탐욕 때문에 온갖 불순하고 위험한 충동 앞에 굴복하고 이를 합리화하는 타락에 빠집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인 봄에, 정작 나의 영혼과 정신만큼은 더럽고 차가운 흙탕물 안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도 없겠습니다. 신은 그를 끝 없이 갈구하고 만나려는 굶주리고 가난한 영혼 앞에 좁은 문을 열어 보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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