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행복
김미원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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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안고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삶은 살아갈 만하다." 석가모니는 네 개의 큰 괴로움에 대해 말했는데 그 중 하나가 "태어남"이었습니다. 아프고, 늙고, 죽는 건 괴로움이라 할 만하지만, 만인의 축복을 받고 세상에 나오는 과정인 "태어남"이 왜 괴로움이어야 하는지는 정말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은 태어날 때부터 불확실성의 연속입니다. 모든 것이 우연한 확률에 의해 좌우되기에 우리는 근원에서부터 불안을 안고 살게 됩니다. 근원적으로 불안을 떨칠 수가 없기에 우리는 삶에 대해 자칫 절망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 만하다." 독자인 저는 이렇게 이 책의 결론을 해석했습니다.

p22에는 "늙음의 초라함"애 대해 작가님의 긴 상념이 등장합니다. 예이츠, 마르케스, 그리고 괴테의 의도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데, 정말 그렇지 싶습니다. 파우스트는 무슨 큰 욕심이 있었거나 결정적인 영적 타락을 겪어서가 아니라, "타인이 내 늙음을 보는 게 두려워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게 작가님 말입니다. 사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처럼 많은 지식을 쌓고 교양을 완성한 분이, 고작 "젊음이 주는 쾌락"이 탐 나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을 리 없습니다. 아마도요. 그의 동기는 이처럼 아주 단순하고,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 할 만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p22에 인용되는 예이츠의 <비잔티움의 항해> 일부가 있는데, 이 시의 서두가 바로 어느 미국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인 "노인을 위한 나라(가 전혀 아니다)"라는 구절입니다.

사실은 저도 요즘 "양치질을 했나? 방금 쓰레기를 버리고 왔나?" 같은 게 깜빡깜빡할 때가 있었는데요. 이 책에도 p45에 작가님의 모친께서 기억이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다르다고 하신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정신의 기능이 감퇴하는 경향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건 또 아닙니다. 작가님은 바로 뒤 페이지에 "이번 생일 용돈을 슬쩍 안 드리고 넘어가려 한 딸의 계산을 정확히 알아채고 지적하는 엄마의 놀라운 계산 능력"에 감탄합니다. 이렇게 손익을 정확히 계량하는 분이 설마 치매이겠는가 이거죠. 쓴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 안심이 되고,... 이게 바로 자녀의 심리이고 안도입니다. 우리 독자 모두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공감할 수 있는 대목 아니겠습니까.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헤어스타일도, 얼굴도, 표정도 변한다(p106)." 마음에 안 드는 이유는 바로 "늙어서"입니다.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데, "내가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정확히 사실을 전달하는" 사진은 나의 육신과 겉모습이 얼마나 늙었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사진에 찍힌 대상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수잔 손택의 명언으로 책 p108에 나옵니다. 같은 페이지에는 16년 동안 단골로 지내 온 사진관의 아저씨가 페암에 걸려 마침내 가게 문을 닫게 된 사연도 나옵니다. 사멸해 가는 모든 것의 슬픈 운명을 어쩌면 파수꾼처럼 지켜 온 사진사, 그도 자신의 노쇠와 사망이라는 필연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결론에 독자로서 참 슬퍼지더군요. 책에는 몇 년 전 타계한 명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스토커>라는 영화의 줄거리 일부가 소개도 되는데, 참 특이한 내용이라서 나중에 따로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님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신지 책 곳곳에는 깊은 묵상의 결과일 듯한 여러 심오한 깨달음의 문장이라든가 성경 구절의 인용도 나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데 백 년이라는 세월을 쏟습니다만 마지막 7일, 즉 홍수가 실제 닥치기 직전 7일 동안은 적지 않은 회의에 싸이기도 했겠다는 말씀(p118)을 하시네요. 백 년도 참고 그 노고를 기울였는데 고작 7일을 못 참겠나 싶지만, 인간이란 본래 다 된 죽에 주저않고 콧물을 빠뜨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숙함과 인내, 침착함, 감정을 통제하는 이성이 두루 필요합니다.

p177에는 원초적 욕구 충족을 위해 언제든 동기까지 배신할 수 있는 인간의 이기심을 꼬집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한 구절이 나옵니다. 작가님은 탈북민을 위해 봉사도 하신다는데, ㅎㅎ 탈북 청소년이라고 하면 으레 못 먹고 못 입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거칠어진 피부 등을 떠올리겠으나 김 작가님이 만난 청소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답니다. 그런가 하면, 음식을 권하는 작가님한테 저들은 살 찔 것 같다며 사양하더랍니다. 여기서 우리 독자들이 좀 느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작가님 말은, 탈북자 하면 이러려니 하던 선입견이 자신의 내면에도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확인하는 스스로가 몹시 부끄럽더라는 겁니다. 독자로서 저는, 채 그런 느낌(부끄러움)도 갖지 못하고 "그 청소년들 (탈북자면서) 별나네" 비슷하게 여겼을 뿐이었습니다(처음에는 말이죠). 아니 왜, 탈북 청소년들은 다이어트에 신경 쓰면 안 되겠습니까? 별날 게 애초에 뭐가 있습니까? 작가님따라 저도, 좀 부끄러워할 줄 아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았네요. 무슨 권리로, 제가 그들에게 선입견을 갖는다는 건지 원. 에휴.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는 지난 시대 특정 세대에서 필독서로 꼽혔으나 오늘날의 우리가 읽어도 훌륭한 고전임은 변함 없는 사실입니다. 그 책에 보면, 저도 기억이 나는데 "위선보다는 위악이 낫다"는 말이 나오죠. 작가님은 p201에서 "그 말에 반대하지만, 주인공 니나 부슈만의 (그) 냉소가 좋아서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고 하시네요. 그리고는 작가님의 지인인 S라는 분에 대한 개인적 회고가 이어집니다. 어쩌면 루이제 린저도, 자신의 주변에 S님 같은 지인이 있어 캐릭터의 창조에 많은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의 영혼에는 커다란 난로가 있다."로 시작되는 가상의 상황에서 던지는 질문은 바로 고흐 자신이 쓴 서간문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대 불우하게 살다 치열한 삶을 마감한 고흐를 우리는 주저 없이 아낌없이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가 혹 지금 내 곁에 살고 있는, 소외되고 광인 취급 받는 가난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작가님처럼, 우리 스스로가 별 의심 없이 쏟아내곤 하는 고상한 감정의 인위적 폭발에 대해, 그 진정성이 사실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의심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의 매 순간 스스로에게 정직해지는 시간이 늘어날수록(적립될수록), 우리가 존재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도 쉽게 청산될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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