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고 발칙하게
원진주 지음 / 미래와사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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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송이건 간에 프로그램 말미에는 그 방송 제작에 기여한 이들의 이름이 죽 나옵니다. 이를 두고 크레딧 롤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우리 시청자들 중 이런 명단을 유심히 지켜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 같습니다. 때로는 별스러운 마음이 들어 눈여겨 챙기려고 해도(?) 하도 빨리 지나가는 통에, 이 롤을 꾸민 분도 역시 방송국 직원이실 텐데 너무 성의 없는, 혹은 너무 수줍거나 겸손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저자는 방송국 구성작가라고 하시네요. 구성작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도 이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서 이 직종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방송국 일은 참 편하지 않을까, 선망하던 연예인 얼굴도 실컷 구경하고 정말 재미있는 직업이겠다 착각하던 분들은 이 저자분의 표현 한 단어에 아마 흠칫 놀랄 수도 있겠습니다. "정글." 방송국은 정글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한국 사회가 짧은 시간 안에 엄청 풍요로워졌습니다만 먹고사는 문제는 여전히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경쟁이 워낙 치열해서 지금 간신히 지켜 온 자리를 유지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또, 영위하고 있는 직업도 갈수록 더 창의력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요구하기에 어떤 노련미로 승부하는 것도 점점 더 만만치 않은 일이 되어 갑니다. 어떤 직장이라도 마찬가지이며, 일도 일이지만 사람 상대하는 일도 정말 피곤합니다. 일보다 사람하고 부대끼는 과정이 더 피곤하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숙직실에서 잔다, 과거에는 사실 직급이 높아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지금은 이른바 워라밸이라고 해서 야근 자체가 금기시되는 풍조입니다. 야근을 당연히 여기는 직장은 결코 좋은 곳이 아닙니다. p30에는 저자가 숙직실에서 잘 때, 어느 PD와 겪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저자분이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작가분의 고충도 고충이겠으나, 이런 작가분과 일하는 PD분의 입장도 장난 아니겠다 싶은 게 독자로서 솔직한 느낌이었습니다.

교사 일도 그렇고 사실 우리 나라 직장은 메인 업무, 보조 업무, 원칙적으로 내가 할 필요가 없는 업무가 뒤섞여 어떤 선이 참으로 불분명하다는 게 아주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p20에는 이 "구성작가"라는 일이, 메인 업무 말고도 자잘하게 챙겨야 할 일이 아주 많으며, 잘 살펴 보면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이런 일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네요. "작가가 아니라 '잡가'다.(p21)" "출연진의 아침 기상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면?(p23)" 혹은 그날 비가 오기라도 한다면? 일정은 모두 취소되며 이런 일까지 일일이 체크하는 게 구성작가의 일 중 하나라고 합니다.

"내가 이러려고 작가가 되었나?" 그런데 사실 어지간히 일류직장이 아니고서야 한국에서 이런 잡무를 거부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비교할 대상이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택배 기사 화물 분류 문제도 현장에서 당연시되던 게 지나치게 과중해서 살고 죽는 이슈로까지 번지니까 이번에 저렇게 해결되었다고 하죠.

일을 하다 보면 고소장이 날아오기도 합니다 ㅎㅎ 한국이야 워낙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나라이니 이 정도야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죠. 그런데 이 책 저자분이 받은 고소장은 그런 게 아니라 말하자면 고용자 측에서 날아온 것입니다. 시청률 저하 때문에 해고가 되었는데(그러니까, 날아온 건 해고장[?]이 먼저였던...), 저자분을 비롯하여 여러 작가들이 단합하여 투쟁한 결과 해결이 되었고 단 사측에서 이 사실 자체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을 걸 종용했으나 외부에 결국 누출이 되었고, 이걸 놓고 "명예훼손"으로 다시 고소장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사태까지 잘 해결하고 "우리 작가들도 칼 한 번 뽑으면 제대로 썬다"고 하시는데 본래 약자들도 힘을 합치면 무서운 법이기는 하죠.

요즘 부쩍 "아픈 손가락"이란 말이 자주 들리던데 저도 얼마 전에 설거지 하다가 계란 껍질에 오른손 엄지 손톱 밑을 찔려서 고생좀 했습니다. 물론 그런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고, 저자는 자신에게 아픈 손가락이 "엄마"라고 하시네요. 아마 어렸을 때 이혼을 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낳아 주신 분을 아픈 손가락이라 부른다는 건, 아마 뒤에 참 아픈 사연이 깔려 있지 않을까 짐작이 되는데 학창 시절을 참 힘들게 보내셨다고 뒤에 나옵니다. 역시 이 책 작가님의 남다른 근성, 끈기, 의지 같은 게 그런 시련이 다 자양분이 되었던 게 아닌가 짐작하지만, 일이 잘 되고 난 후이거나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후라야 남들한테 그런 속 편한 소리도 나오기 마련이죠.

자연인은 MBN에서 론칭한 프로그램인데 이 프로그램이 히트를 치자 경쟁 종편, 또 지상파 방송에서도 비슷한 포멧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p179에는 어느 자연인(?) 할머니를 섭외해야 하는데 이장님한테까지 전화를 했건만 끝까지 실패했다고 하시네요. 그러다가 피붓과 전문의를 통해 간신히 통화에 성공했는데... 사실 사회 생활 하다보면 의외의 인맥이 있어서 내가 못 해 낼 일에 도움을 주곤 합니다. 인맥이라는 게 그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젊고 패기넘치는 저자의 좌충우돌 도전기 같지만 방송 관계 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일에는 학교에서 학과 문제 풀듯이 어떤 정해진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즉흥적으로 임기응변으로 닥치는 대로 해 내야 합니다. 이렇게 비포장도로에서 어찌하건 간에 목적지까지 운전해 내는 게 사회생활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정신으로 일에 임해야, 조직에서 욕 안 먹고 자리를 지켜 내며 마침내 나만의 보람도 뿌듯하게 찾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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