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왜 무너지는가 - 특권과 반칙 극복할 돌파구, 신뢰와 법치에 대하여
정병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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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가뜩이나 전염병 때문에 뒤숭숭한데다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는 듯한 징후도 곳곳에서 눈에 띄고 아예 국가의 방향성과 장기 지표에 대해 근본적인 이견이 불거지는 등 총체적인 혼란상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신뢰감이 크지 않다... 세월호 비극에 국민이 분노한 것은 해양경찰을 비롯한 국가 기관이 이들의 구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은 데에 있다...(p111)" 이 책에도 나오지만 우리 국민은 대개 해외에 나가도 재외공관의 역할에 대해 큰 불신을 갖습니다. 전화를 걸어도 불친절하고 성의 없는 답을 듣는 게 보통인데 이미 민간 서비스가 어느 수준에 달한 상황에서 이런 대접을 그것도 같은 한국인에게 받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재외공관 직원들(외교관 포함)에게 일반 국민이 그런 요구를 해도 그걸 무리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운용되는 기관이 아닙니까? 친절해야 하고,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월호 문제는 이 책 p63 이하에서도 다시 다뤄집니다. 당연히 이 사건이 정파적 이슈가 아니며, 많은 국민들이 시스템의 근본 문제로 인식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특히 미국에서, 해외로 나가 싸우던 군인이 전사하면 반드시유해(remains)를 운구해 오고 이를 정중한 예식에 맞추어 만인이 보는 앞에서 거행하는 관습을 지적합니다. 이러니 미국인들은 내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어도 저런 합당한 대우를 받겠구나, 내 남겨진 가족들은 배려를 받겠구나 같은 안심을 하고 싸워도 싸우게 됩니다. 물론 우리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은 그런 게 없어도 충천하는 애국심으로, 혹 전쟁이라도 터지면 바로 총 들고 나가서 싸울 겁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가 이제 버젓한 국가의 꼴을 갖추게 되었으면 제발 좀 저런 걸 따라해서 위신과 자부심을 좀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에 저도 읽은 책인데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과 논문으로 유명해진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p75)는 1990년대 초반에 <트러스트>라는 책을 써서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당시 한국어로는 제목 번역을 하지 않고 그대로 "트러스트"라는 타이틀을 달았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특히 한국 재벌문화의 병폐를 지적하며 전문경영인에게 전권을 주지 않는 등 가족경영의 후진적인 잔재를 비판하기도 했다고 이 책에 나옵니다.

요즘 부쩍 심해진 층간소음 문제도, 이웃 간에 불신에서 비롯한 바가 큽니다. 층간 소음을 내도 된다는 게 아니라, 에이 뭐 애가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 먹고사느라 늦게 퇴근해서 밤에 세탁기를 안 돌리면 다음 날 출근도 힘들 텐데... 같은 배려가 잘 아는 사람 같으면 가능하다는 겁니다. 또 아 밑에 사는 형님 피곤할 텐데 세탁기는 일요일에 돌리고 나는 대충 씻고 자야겠다 같은 마음도, 모르는 사람한테라면 잘 생길 마음이 아니긴 합니다. 그러나, 현대 도시 생활은 2차적 관계가 대부분이므로 기본적으로 매너를 갖춰야 하는 게 맞습니다. 아는 사이든 모르는 사이든 간에요. 문제는, 이런 신뢰 형성의 2차 관계 실태가 한국에서는 매우 부족하다는 거죠.

아마 영미 문화의 가장 자부심 가질 만한 패턴이, 이른바 개인의 자의적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 즉 룰 오브 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빌 클린턴 시절에 재닛 리노 법무장관이 불법 입국자를 가사도우미로 고용한 것 때문에 비판을 받았는데 그때 언론은 "룰 오브 리노"라며 날이면 날마다 신랄히 비꼬았습니다. 법의 지배, 즉 법치에는 예외가 없고, 통치자건 그 누구건 간에(p158) 동일한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게 이 원칙의 요체입니다.

미국도 현재 공화 민주 양 진영 사이에 대화와 타협이 없고 죽일 듯 극한으로 몰고가며 싸우는 풍조가 일반화되었지만 한국은 사실 올바른 민주정치 풍토가 항상, 상시적으로 정치판을 지배해 왔습니다. 저자는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붕당을 짓고 서로를 "사문난적"이라 규정하며 절멸의 투쟁을 펼치던 상황을 지적합니다. 이태준 교수님이 "붕당정치"를 개념화하여 일제가 의식적으로 주입하던 "당쟁"의 컨셉을 대체했고 상당부분이 타당하기는 하나, 특히 숙종 대에 이르러 더 이상 순화와 공존이 불가능할 만큼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던 것도 분명합니다. 이인좌의 난이 만에 하나 성공했으면 노론은 아마 씨가 마를 만큼 철저한 숙청을 당했겠는데, 그렇게 되면 악이 패배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결과였겠습니까? 나는 절대선이고 상대가 절대악이라고 상정하는 자체가 초등학생에게나 어울리는 미숙한 사고의 발로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 영국, 프랑스도 별 차이가 없으니 뭘 보고 배워야할지 모르겠네요. ㅋ 애초에 누굴 따라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성숙해지고 모범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영국 신사"라는 말이 유행하고 널리 인정 받았으나 1980년대 전반에 축구장에서 훌리건들의 큰 난동이 벌어진 이래 이런 이미지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죠. 제국주의의 위선이니 뭐니 하는 말은 좀 다른 평면에서 논의되어야 하겠으므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경우에 맞지도 않는 조건 반사 행태를 보일 게 아니라,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이 "지난 시대의 관습"을 조명하자면, 확실히 영국이라는 나라가 지리적, 인구학적 핸디캡을 극복하고 번영과 풍요를 누린 건 절제와 포용, 이성적인 문제 대처, 침착하고 계산적인 접근 방법 등이 큰 기여를 한 게 분명합니다. 그 중에는 새뮤얼 스마일즈 류의 검약론 같은 것도 있습니다.

이 책에는 또 1990년대 한창 인기를 모았던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p105)도 나옵니다. 물론 실존 가문이며, 숱한 명문가가 부침을 거듭할 때 홀로 지역에서 4백년 동안 평판을 유지한 그 비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죠. 과연 그 유구한 명문가의 품격은 변함이 없어서 일제 강점기에는 백범 김 구 선생에게 독립 운동 자금까지 보냈다고 하니 만인의 사표가 될 만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의 공식 모토 중 하나가 "사농공상"이었을 만큼 상공업을 천시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반대로 산업 자본가라야 돈을 모으고 사회에서 행세깨나 하는 분위기이니 격세지감이죠. 이 책에는 "크게 부자가 되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위기를 겪는 경우가 다 있었다(p45)"는 말도 나오는데, 실제로 특정 정파가 정변이라도 일으키거나, 반대로 모함이라도 받으면 평소에 스폰서 노릇을 했던 거상(巨商)이 함께 변을 당하여 멸문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우리나라 사람들 잘 하는 말이 "그만큼 해먹었으니..." 같은 건데 실제로 해당 부자가 해먹어서 그런 재산을 모았는지, 남달리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그렇게 되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무작정 나보다 나은 사람은 시기하고 보는 못되고 비생산적인 마인드로는 사회가 발전이라는 걸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지난 원한을 갚고자 칼을 갈고, 자신이 못 하면 자식 대에서라도 분을 풀고자 마음을 먹으면 뭐 끝이 없습니다. 세상이 아주 절멸할 때까지 죽이고 피를 흘려야 합니다. 간디는 "눈에는 눈"이란 원칙을 끝까지 관철하면 우리 모두는 눈이 멀 수밖에 없다고도 했습니다. 넬슨 만델라(p126)는 본인도 많은 피해를 입은 처지였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 가해자에게도 관용을 베풀었고 이런 화해의 정신 덕분에 오늘날 "그나마" 남아공이 생지옥으로 바뀌지 않고 최소한의 나라꼴이나 유지가 되는 거죠. 인간사 지혜는 이런 벤테타를 멈추고 적정 선에서 공존을 도모하는 건데, 감정으로 치달으면 결국 너도 죽고 나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어 속담에 live and let live라는 게 있는데, 한국 역시 성공적으로 번영과 공존을 도모하려면 화해와 포용의 정신, 그리고 과거보다는 미래를 향해 같은 지점을 바라보는 성숙함이 더욱 필요해지는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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