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맛 ㅣ 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1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평점 :
영미문학의 진수 중 하나는 깔끔한 구성의 맛을 자랑하는 단편소설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워싱턴 어빙, O 헨리, 조셉 콘래드, E M 포스터, 그리고 한국에는 아동물 작가로 더 잘 알려진 로알드 달이 있겠네요.
이 책 표지에는 The Man from South라는 문구가 (표제작 외에) 마치 디자인의 일부처럼 나와 있습니다. 이 작품의 번역 제목은 <남쪽 남자>이며, 처음 보는 청년에게 웬 점잖은(그렇게 보이는) 노인이 접근하여 내기를 권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1인칭 화자의 이야기입니다. 과거에는 라이터 성능이 그리 좋지 못하여 몇 번을 돌려야 점화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지금이야 나이트클럽에서 나눠 주는 싸구려라 해도 불발되는 게 흔치 않죠. 열 번 아니라 스무 번 연속이라 해도 성공할 겁니다.
이 책에 실린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한 단편 대부분이 그렇지만, 결말이 씁쓸하면서도 의외의 충격을 안겨 줍니다. 전 이 작품을 <마니아를 위한 세계 미스테리 걸작선>에서 처음 접했는데, 당시에는 "남쪽에서 온 사나이"로 제목이 붙었더랬습니다. 저 책은 정영목, 정태원 두 분이 공동번역했는데 개별 작품이 각각 누구의 옮김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제 이 책을 통해 정영목씨 솜씨라는 걸 알게 되었네요. 어렸을 때는 이 작품이, 아내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이기적인 남성의 저주 받은 습성에 초점을 둔 공포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 다시 읽어 보니 거의 목숨을 건 "사랑"이 주제이더군요. "남쪽 출신"인 불 같은 기질의 여성이라야 가능한, 그런 사랑, 슬픈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1권 맨처음에 나오는 <목사의 기쁨>은 어수룩한 시골 사람들을 놓고 사기를 치려는 가짜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꼭 로알드 달의 작품이 아니라도, 이런 이야기는 주인공 버프를 받는 악인이 제법 치밀한 계획을 세워 자기 목적을 슬금슬금 달성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또 이런 단편들의 공통점은, 막판에 가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사필귀정의 결말이 찾아온다는 거죠. 비슷한 예로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No comebacks> 같은 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결말이 예측 가능하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로알드 달만의 특징은, 그 결말에 애잔한 페이소스가 곁든다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남쪽 남자>도 그렇죠.
<손님>은 꽤 길어서 이 정도 분량에 단편 고유의 반전을 담기는 어렵지 않겠나 싶었는데 마지막에 큰 웃음과 큰 충격을 독자에게 선물합니다. 콧구멍의 색깔(?)과 특유의 화술 덕에 중년의 나이에도 여성을 자유자재로 꼬실 수 있는 어느 호색한의 회고인데, 원본은 상당히 길며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공개되면 사회적으로 큰 물의가 일까봐 단 한 편만 출판한다는 게 작품의 액자 부분에서 떨고 있는 너스레입니다. 그 한 편도 (앞서 말했듯) (단편소설치고는) 긴 편입니다. 저는 읽으면서 원제인 the visitor를 구태여 "손님"으로 옮겨야 했을까 약간 의문이 들었는데, 다 읽고 나서 그 이상 적절한 옮김은 없겠다 싶더군요.
(내용 누설 주의)
그냥 문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겠지만, 아지즈 씨가 일부러 주유소의 사기꾼과 짜고 오스왈드 코널리어스 씨를 자기 저택으로 끌어들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기술(?)이 좋은 여성이 병 때문에 이성을 못 만난다면, 그 욕구가 어느 정도나 임계점을 자주 넘었겠습니까. 어떤 분도 딸을 불쌍히 여겨 퇴계 이황의 후처로 넣었다는 말이 있듯, 불운한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는 심지어 그런 욕구까지도 안타깝게 보고는 저런 기괴한 배려를 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 경우, 떠나는 코널리어스 씨에게 구태여 그 사실을 말할 필요가 없지 않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호색한을 징벌하는 다른 목적도 달성하기 위해? 글쎄, 분위기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또, 사실 그날밤의 여성이 환자가 맞았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그 처 혹은 다른 딸일 수도 있죠. 단지 스카프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할 뿐. 여기서 코널리어스 씨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건 환자의 처소가 "같은 3층"이라는 사실뿐입니다. 물론 결벽증이 있는 그로서는 이 정도 암시만으로도 지옥에 빠지기에 충분하죠. 이 이야기를 읽고 저는 예전에 DJ의 가신이었던 동교동 대원로 권노갑 씨가 젊은 시절 조깅하며 겪었던 사연이 생각나더군요. 웃음의 포인트는 코널리어스 씨의 유별난 결벽증입니다. 결말을 읽고 나서야 왜 이 언급이 앞에서 이처럼 잦았냐는 게 해명이 되죠.
<맛> 역시 결말이 익히 예상되는 이야기입니다. 코비드 19이 완치된 후 어느 미식가가 그 감별력을 다 잃었다는 슬픈 뉴스도 나왔지만,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즐길 수 있는 큰 쾌감 중 하나는 바로 미식의 그것입니다. 바로 위의 <손님>에서도, 어둠 속의 여인이 누구인지 천하의 호색한이 가진 미각(?)으로도 분별이 어려웠다는 문장이 나오죠. 마이크 스코필드 씨는 돈 욕심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내기를 하는데, 미친 내기 이야기는 저 위에 언급한 <남쪽 남자>의 제재이기도 하합니다. 두 저택을 걸겠다는 제안에 경솔하게도 귀가 솔깃해지는 걸 보면 이 부친은 아무 일도 안 하는 딸의 부양이 거추장스러웠던 것도 같습니다. 화를 낼 자격도 없는...
<항해 거리>는 한편으로 코믹하기도 하지만 상황을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역시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돈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게 중국인뿐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도 됩니다. 단, 보티볼 씨는 아내를 끔찍히 사랑했고, 또 무서워하기도 했다는 동기를 다시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에 뛰어내릴 때에는 배가 혹시 먼저 닿아서는 안 된다는 상식(ㅋ)을 우리 독자들은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더 중요한 교훈은 돈 몇 푼에 목숨 걸지 말자는 거고요.
<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는 두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첫번째 반전은 그저 로알드 달의 작품 몇 편만 읽어도 예상이 가능하지만 두번째의 작은 반전은 반전이라기보다 로알드 달 식의 유머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전당표에 금전차입자의 이름을 안 적은 무기명증권인데, 이 트릭은 세트 제2권의 어느 작품에서도 다시 활용됩니다. 현대 한국에도 아직 전당포가 있을까요? 있고, 놀랍게도 저 강남 한복판 논현동 같은 곳에 있습니다. 누가 주로 이용하는지, 무엇을 맡기는지는 상상에 부칩니다.
과연 환생은 있는가? 그런 심오한 이치가 실재한다기보다, 워낙 심심하고 지루했던 나머지 그런 걸 생각해 낸 인간의 상상력이 더 대단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한번 죽으면 끝 아닌가? 이에 대한 로알드 달 식의 답은 3권의 어느 작품 중에 잠시 언급됩니다. 참고로 "그이"가 과연 에드워드 선생 손에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실제 프란츠 리스트도 살아생전 엽색 행각으로 상당수의 남편들에게 살의를 느끼게 했겠지만 말입니다.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은 있어도 정복자 에드워드 같은 건 없죠 뭐. 어디서 죽었는지 도망갔는지 알 바 아닙니다, 남자들에게는.
영단어 skin을 사전에서 찾아 보면 "목숨"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 유래가 무엇인지 어렴풋한 짐작을 하게 돕는 게 바로 이 책 마지막에 실린 단편 <피부>입니다. 내용 누설 위험 때문에 자세하게는 적지 않겠으나 역시 로알드 달 식의 블랙 유머가 일품인 명작입니다. 인생, 아니 목숨은 짧고, 예술, 아니 문신은 긴 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