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더브레 저택의 유령
루스 웨어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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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찐한 맛과 약간(?)의 자책감!


미스테리 장르물을 하도 많이 읽다 보니 웬만해선 작품의 1/7 정도만 읽어도 범인이 대충 누구겠다, 진상이 사실은 이런 쪽이었겠다 하는 게 짐작이 되는 편입니다(그랬었습니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었는데(그렇다고 착각했었는데) 주인공 여성(전 처음에 확신이 되지 않았으나 나중에 가서 "젊고 예쁜 여성"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의 다소 두서없는, 상당히 주관적인 1인칭 회고 형식 때문에 아주 마음을 정하고 말았더랬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약간은 뭔가 망설여졌던 게, "고작 그 정도라면 왜 이렇게 평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이유가 있더군요. 다 읽고 보니).

독자로서 처음에 저는 로완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아직 젊고 철이 없었을 때는 누구나 다, 어떤 횡재 같은 걸 꿈꿉니다. 뭐 그렇다고는 하나 조금만 더 신중하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그런 기막힌 운수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쯤 쉽게 깨달을 수도 있을 텐데, 스스로만 예외로 설정하는 그 자기중심성도 한심하고 솔직히 말해 경멸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것도 어렸을 때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나, 나이를 들 만큼 들었으면 주위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현실적인 감각을 갖춰야 하는 법이죠.

비정상적으로 보수가 후한, 뭔가 수상쩍기도 한 외딴 어느 부잣집에 아이를 돌보러 가는 줄거리의 미스테리물 중 가장 오랜 편에 속하는 건 도일 경의 <너도밤나무 집의 모험>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이올렛 선생은 대단히 침착하고 용기 있는 여성으로 설정되며, 도일 경이 이 캐릭터에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인 건 행여 독자들(20세기 초 대단히 보수적이거나 꽉 막힌 사고를 가졌을)이 "경솔한 처신을 한 여성" 정도로 오해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그 쌀쌀맞은 셜록 홈즈 입에서 바이올릿 선생에 대한 칭찬이 아낌없이 나오니 말입니다. 베이비시터는 아니고 호스피스 직원이긴 하지만 역시 까다로운 일자리로 평판이 자자한 데다 집에 유령까지 출몰한다는 소문이 난 집에 "용감하게" 자원하는 캐릭터로는 영화 <스켈리톤 키>의 캐롤라인 엘리스(케이트 헛슨 扮)가 있었죠.

베이비시터이니 고용주는 두 사람이죠. 빌 앤 샌드라 엘린코트 부부. 요구사항이 많기는 하지만 애들 엄마인 샌드라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처음에 그 피용인인 잭을 보고 애들 아빠인 줄 잘못 알아 크게 놀랐던 로완은, 시간이 좀 지난 뒤 드디어 빌을 보고 크게 실망합니다. 잭을 보고 놀라는 장면도 약간 이상했는데, 나중에 빌 엘린코트 씨에 대해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으며 간단한 안부조차 묻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며 비난하는 걸 보고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여튼 자신을 고용할 사람이고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한테 (굽신거리라는 게 아니라) 작은 정도의 리스펙도 베풀 여유가 없나? 오히려 본인이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에 가득한 게 아닌가?

조금 뒤에, 빌 엘린코트 씨가 로완에게 앤 해서웨이를 닮았다느니 뭐니 하며 지분거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 이런 일이 있긴 했구나, 소설이 회고 편지 형식이니 나중에 생긴 나쁜 감정이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앞 체험에 투영될 수 있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럼 뭐 독자인 제가 오해한 거죠. 잘못을 깨달았으면 즉각 시정을 해야 하는데 그냥 귀찮아서 놔뒀습니다.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진상을 안 뒤 큰 충격을 받았는데, 비록 가공의 캐릭터이긴 하나 로완에게 크게 미안해지더군요. 선입견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ㅠ 참고로 이 성희롱 미수 장면은 사건이 그토록 꼬이고 꼬이게 된 먼 이유 하나를 이루지만 뭐 그렇게 큰 역할은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중 적어도 두 명)도 말을 안 듣고 밤에는 이상한 유령 같은 게 출몰하는 듯 신경이 쓰인다거나,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든가 합니다만 로완은 꾹 참고 대우가 좋은 이 일을 계속 맡습니다. 이런 대저택에서 신참자인 주인공을 괴롭히는 또다른 가사사용인 캐릭터가 꼭 등장하는 게 일종의 클리셰인데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이 좋은 예죠. 이 작품에는 진 아주머니가 등장하는데 비중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만 작품 마지막에 이런 부분까지 다 일일이 마무리되는 게 또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 로완과는 달리 루스 웨어 작가님이 아주 똑똑하고 지성적인 분이어서인 것 같습니다. 허술하게 뭘 남겨두지를 않고 말입니다.

요즘 정인이 사건 때문에 아이들 괴롭히는 어른에 대해 특별한 분노가 치솟는 사회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인간 자격도 없는 양모에 대해서조차 분노를 퍼부을 자격마저 없는 사람도 사실 또 있기 마련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예전에 "층간소음 피해자일 때는 위층 사는 사람이 정말 미웠어요. 그런데 제가 엄마가 되고 보니, 애들은 원래 뛰는 거더라고요?" 라고 말하는 사람을 봤습니다. 피해자일 때는 별나게 과장하며 징징거리다가, 막상 가해의 위치에 서고 보면 상대가 이해해야 한다는 식으로 태도가 돌변하는 인격미숙자가, 무슨 소중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뻔뻔스럽게 억지를 쓰는 저런 태도, 극히 일부이긴 하나 이래서 "맘충" 소리가 나오나 싶었습니다.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위대하고 훌륭한 분들이지만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거지근성을 발휘하며 뭘 얻어먹을 때는 온갖 가식을 떨지만, 상황 끝나고 나면 입 싹 씻고 중산층 행세를 합니다. 중산층이란 단어 뜻이 뭔지나 알까요?

저는 로완이 애들을 향해 어떤 미운 감정을 보일 때, 속으로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결과는 이미 아는 거지만, 독자로서 "이래서 니가 감옥에 갇혔구나."하는 편견을 안 갖도록 기분을 조절하느라 말입니다. p278에서 "잠든 메디는 그저 유약한 어린아이일 뿐이었어요..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구요." 같은 말을 읽고선, 맞아, 니가 어른이라면 그래도 이 정도는 돼야지 라며 응원 아닌 응원을 보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부터 로완에 대해 주인공으로서 최소한의 정신적 예우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포일러라서 말은 못하지만 이 대목 근처에 있는 묘사가 사태의 진상에 대한 중대한 암시가 됩니다. 결말을 다 읽고 여기 다시 돌아와서 읽어 보면 작가가 얼마나 교활하게(?) 서술 트릭을 썼는지 실감할 수 있죠.

p339에 보면 매디가 말을 정확히 몰라서 애티크(다락방)과 앤티크(골동품)을 헷갈리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목도 한번 의미를 곱씹어 보십시오. 엘리는 처음부터로완을 좋아하고 어떤 동정 같은 걸 표현했는데 나중에 다시 읽어 보면 의미심장하죠. 리안논은 작품 중반부터 나오는데 처음에 로완을 보고 당황하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이것도 후반에 가서 뜻이 해명이 됩니다. 예민한 독자라면 이상하게 느낄 법한 대목들은 여튼 작품이 끝나기 전에 마무리가 되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작가분이 아주 꼼꼼하게 일일이 다 손을 쓰고 끝을 내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로완은 그리 똑똑한 편이 못 됩니다만 편지를 마치며 "아직 해명이 안 된 부분"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사실 현실의 로완 같은 이라면 구태여 이런 걸 의식도 못 하지 싶기 때문에, 아무리 변호사를 수신인으로 삼은 편지 속이라지만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물론 괜히 이런 소리를 할 이유는 없고, 진짜 반전을 예비하기 위한작가의 너스레였다는 게....). 해명을 채 기대하지 않은 대목에 대해서도 자세히 털어놓는데 출생의 비밀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정도의 한 방은 후반부에 마련되어야 어느 정도 플롯의 무게가 갖춰진다고 작가가 전략을 짜서였을까요?

이 작품에는 우리 시대를 반영한 갖가지 첨단 문명(과 그 부작용)이 등장합니다. SNS가 보편화된 세상에 신분 사칭이 쉽지 않다거나... 샌드라 아줌마가 평판 조회를 해 봤다고 했을 때 저는 특유의 촉으로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ㅎㅎ 말 많은 로완이 유독 그 대목에서는 자기 감정을 드러내거나 어떤 회고를 안 했기 때문이죠. 스마트는 개뿔!이라며 앱과 연동된 IoT 시스템에 불평을 늘어놓을 때 저는 아주 드물게도 로완에 공감했습니다.

결말이 참 충격적입니다. 정성껏 쓴 편지를 왜 로완은 끝내.... 그리고 교정직원이 발견했다는 또다른 편지는 무엇일까? 다시 강조하지만 팩트를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선입견 같은 건 좀 갖지 맙시다. 저는 다 읽고 나서 "레이첼"에게 너무 미안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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