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 조종사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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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야코브 야콥센은 이름이 우스운(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성 언어학자입니다. 이름이 우습다는 건... 저 이름은 예컨대 고골의 <외투>에 나오는 불쌍한 하급 공무원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이름과 같은 구조이기 때문이죠. 야콥브의 아들 야코브, 아카키의 아들 아카키... 여튼, 소설은 이제 60대에 접어든 그가 자신의 인생 중 중요 국면을 회고하며, 2인칭 청자를 앙네스로 삼아 보내는 편지 형식입니다. "앙네스"라는 이름은 물론 노르웨이식이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다른 나라의 여성 이름인) 아그네스, 아녜스 등과 같은 계열입니다. 도쿄식 발음으로 "도쿠가와"는 "도쿠앙와" 등으로 불리듯, [ng]는 [g]와 의외로 서로 자주 교체, 혹은 유사시되는 자음입니다.

그는 유독 자주 장례식장을 찾아다닙니다. 머리도 좋은 편인 그는 고인과의 각별한 연을 추모객이나 유가족들 앞에서 자세히, 혹은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이렇게까지 고인들과의 연을 섬세하게 회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유가족들에게 각별한 환영을 받을 만도 한데, 독자인 우리가 밖에서 보기로는 분위기가 왠지 좀 이상합니다. 환영을 받는 게 아니라 미심쩍인 시선 정도를 받으며 경원되는 듯도 합니다. 1인칭의 주관적인 담화를 떠나, "혹시 진상은 이러이러한 게 아닐까"하며 우리 나름대로 재구성을 해야 할 듯한 기분도 듭니다.

우리가 당혹스럽게 느끼는 건 야콥센의 장황한 언사뿐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만난 젊은 여성 윌바의 매너도 마찬가지입니다. 윌바는 아주 똑똑하고 주관이 강합니다. 언어학에 대해 자신만의 확고한 관점을 갖고 있어서, 장례식장을 찾은 손님인 야코브에게 면박을 주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원래 그런 아이이니 이해를 하세요." 야코브 씨는 성정이 본래 순한지, 아니면 어떤 다른 사정이 있는지, 현장에서 바로 윌바에게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는 객관과 학문의 세계로 곧바로 침잠하며, 이런  게 모순과 적의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가 대처하는 방식인 듯합니다.

히틀러는 2차 대전 당시 노르웨이를 사정 없이 유린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코카서스 인종의 아득한 한 분파의 순혈을 간직한 북유럽인들에 대해 경외심을 품었다고도 합니다. 책에도 간간이 언급이 있지만 노르웨이인들은 2차 대전 당시에도 영웅적인 게릴라 활동이나 사보타지를 전개했고,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엔 스웨덴, 덴마크 등으로부터 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승리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건, 그저 추운 나라, 어업국, 노벨 평화상 시상 주체 정도로 알고 있던 수백만 인구의 국가가 이처럼이나 강한, 그러면서도 이지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었나 하는 점이겠습니다.

우리는 학부 시절 스펙 쌓기나 입사 시험 통과를 위해 영어 어휘책을 열심히 공부합니다. 이런 학습서는 대부분 암기의 편의를 위해 어원을 제시하고 연관된 단어들을 한 데 묶어 설명하는데, 언어학자인 야코브 씨는 소설(아니, 편지) 속에서 아주 뭐 어원 실력을 유감 없이 과시합니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어휘 설명 상당수는 노르웨이어를 출발점으로 삼지만, 그 중 또 상당수는 라틴어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거나, 현대에 와서 세계어가 된 영어 어휘를 차용한 것이라서 영어(역시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어휘와도 매우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ㅎㅎ 학창 시절 영어 공부 열심히 했던 우리 한국 독자는 별 위화감 없이 읽을 수가 있죠.

p57에 보면 reg- 관련 어휘가 주르르 나오는데 대부분은 우리들도 익숙한 것들입니다. 본문에는 없습니다만 royal도 마찬가지이며 g와 y가 서로 통한다는 게 여기서도 확인됩니다. 그런데 저는 erection(발기)도 같은 어원인 줄은 이 소설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이 단어는 예의 그 윌바가 야코브 선생 앞에서 또 태연하게 거론하는데 너무 솔직한 것도 문제는 문제입니다. 물론 노르웨이어라서 Ereksjon이라고 책에는 나옵니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건 독일어를 포함 명사(고유명사가 아닌데도)를 그리 쓰는 게 저쪽 동네의 전통이죠. 아무튼 윌바나 야코브 씨나 이 분야에서 다들 선수들인지라 급수 겨루기 중 서로 피를 튀깁니다.

p80을 보면 또 g와 y(반자음으로서 w도 비슷)가 서로 통하는 예가 나오는데 독일어의 gelb(노란)와 영어의 yellow가 어원이 같다는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현재 이 각국어로는 발음도 판이하고 철자도 보다시피 저렇게나 다르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죠. 저도 고1 때 제2외국어로 독어를 배웠고 gelb 같은 건 필수 어휘였지만 yellow와 통한다고는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여기서 황금이라는 뜻의 gold 등도 나왔다고 합니다.

p80의 이 "썰"을 누구한테 푸는가 하면, 여성 택시기사 안드리네라는 분을 상대로 삼았습니다. 어.. 이분도 나중에 가면 돌아가시는데, 이분 장례식에도 야코브 씨가 참여하며 여기서 또 (이번에는) 고인의 조카뻘 되는 윌바를 만납니다. 야코브 씨는 (젊었을 때) 여성들한테 인기가 있던 타입일까요? 소설 중반에는 그의 학생 시절이 회고되는데, 인기는 고사하고 "독특한 습관"으로 말미암아 왕따, 심지어는 폭행의 타겟이 되기까지 했다는 게...

현재는 혼자지만 야코브 씨는 한때 아내가 있었고 레이둔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아내는 인문적 소양이 다소 부족한 듯하지만 열정적인 성품이었고 한때 야코브를 뜨겁게 사랑했었으나... 펠레 스크린도라는 어느 사내(?)와 야코브 씨의 친밀한 관계를 못 견뎌서 결국은 헤어졌다고 하네요. 펠레 스크린도는 어렸을 때부터 야코브씨, 아니 야코브 군 옆에 바짝 붙어다녔는데... 아내뿐 아니라 어렸을 때 그 부친마저도 이 펠레를 무지 싫어했다고 합니다.

p75에는 어느날 펠레의 존재를 알게 된 아내 레이둔과의 끔찍한 다툼이 서술되며, 이때의 충돌이 야코브 씨에게는 몹시도 큰 충격이었는지 책에서는 p223, p297 등에서 계속 회고됩니다. p108에서 윌바는 자신의 사촌에게 야코브 씨를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고 평가하며(등 뒤에서 들으라는 듯 크게 떠듭니다), p216에는 "뻔뻔스러움"에 대한 야코브 씨의 몇 마디가 나옵니다. 사실 독자가 어지간히 둔하지 않다면 소설 중반까지만 읽어도 이 펠레 씨의 "정체"가 뭔지는 눈치챌 수 있습니다. p378에서는 드디어 펠레 씨(?)와 야코브가 대판 싸우는데 놀랍게도 펠레는 야코브더러 참으로 뻔뻔하다며 비난하고, 야코브는 다시 충격을 받습니다. 아니, 뻔뻔한 건 펠레 자신이 아닌가? 사실 둘 다 맞는 말을 하는 중이며, 자세한 건 스포일러라서 여기 적진 않겠습니다.

p290에 보면 페다고그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우리 한국인들도 학부 시절 동아리 세미나 같은 걸 할 때 페다고지라는 말 많이 들어 봤을 겁니다. 책에도 설명이 있지만 이때의 ped-는 "소년, 아이"라는 어근인데, 저 앞 p169에 보면 ped- 어근에 "발"이란 뜻이 있다고 또 나오죠. 아니 "발"과 "소년"이 동의어인가? 예전에, 제가 좋아하는 고 이윤기 선생은 그의 그리스신화 해설에서 인문적(아니, 프로이트적?ㅋ)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둘의 연관성을 논한 적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는 사실 무근입니다. 적어도 언어학적으로는 말입니다(이게 사실이었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요). 여튼 그래도 저는 이윤기 선생의 우아한 문장이 참 좋았고 그 원대한 사고의 폭을 여전히 존경합니다. p288에도 참 재미있는 설명이 나오는데 본문에는 없지만 독일어 명사 Bewegung도 마찬가지로 저 예에 해당합니다. p278의 러시아어 "고로드, 그라드"가 영어 "가든"과 통한다는 설명은 얼마나 황홀합니까. p349에는 생선 대구에 관한 어휘 설명이 나오는데 마치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한 대목을 읽는 듯합니다.

한 지방, 혹은 한 나라의 언중이 두 개 층의 언어를 사용하는 현상을 두고 diglossia라고 합니다. 이 대표적인 예는 방언과 꾸란 아랍어를 다 구사하는 아랍인들, 또 보크말과 니노르스크 두 가지 언어를 쓰는 노르웨이인들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마치 언어학 개념을 현장 학습이나 시켜 주듯 야코브 씨는 그만의 소속감 혼동, 갈등을 절절히 털어 놓습니다. "나는 어디 속한 사람인가?" 이런 존재적 긴장을 생의 매 순간 느끼는 주인공으로서 그리스인 조르바, 아니 노르웨이인 야코브만큼 적절한 세팅도 아마 없지 싶습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한 리뷰를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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