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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시민들
백민석 지음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표지 사진은 마치 한국의 따스한 한 봄날의 풍경을 담은 듯한 느낌입니다. 그림자의 길이라든가 하늘빛, 혹은 왠지 사진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대기의 안온함 등이 그 근거입니다. 물론 이 모습은 한국이 아닌 러시아가 배경이며, 사진에는 두 소년 소녀가 담겼습니다. 약간 우스꽝스러운 아저씨 패션을 한 남자아이, 얌전하게 학생 룩을 차려 입고 손에는 엄마 심부름인지 비닐백에 뭘 채워 든 여자아이가 우리를 봅니다.
"러시아는 초행이지만 설렘도 걱정도 없다." (p21) 예전부터 서구화와 개혁 개방의 대명사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행이라서 그러시다는 건지, 아니면 러시아 전체에 대해 원래 그런 느낌이라는 건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워낙 중국이 인구가 많고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서도 중국말, 중국인을 마주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운하가 많아서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부른다.(p22)" 러시아, 또 표트르 1세가 계획 건설한 그곳은 분명 고위도이며 또 우랄 산맥 이서는 유럽에 속하지만 이곳이 북유럽이었나 하는 생경함이 잠시 머리를 스칩니다. 논리적으로는 타당하지만 말입니다. 이곳은 저자의 말에 의하면 노상의 주정뱅이도 종종 관찰될 만큼 자유로운 도시입니다. 반면 모스크바는 단정한 사람들이 많다는군요.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900일간이나 나치의 포위를 견뎌낸 이력이 있기도 하죠.
"사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 성당에서 찍은 것이다."(p38) 카잔은 2018 피파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멋진 승리를 거둔 곳이기도 하지만 여기는 거기가 아니라 성당(정교회) 이름만 카잔이니 독자들 중 오해하는 분은 없어야겠습니다. 그 앞 앞 페이지에 보면 역시 이곳 시민들 중 한 여성이 귀엽게 웃으며 브이자를 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뭐 여느 서유럽, 혹은 미국에서 찍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 사는 풋풋함과 온기, 자연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배어납니다. 저자는 "오랜 동안 공산주의가 지배했지만 종교가 살아남았다."고 말합니다. 러시아는 사실 그들만의 독실한 종교, 서북부 유럽의 프로테스탄트나 로마 가톨릭과 선명히 구분되는 정교회를 오랜 동안 신실히 믿어 온 나라죠. 공산주의 70년의 지배로는 그 뿌리를 걷여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p39에는 "가톨릭은 세속적 가치에 밀려 신도를 잃었으나 정교회는 주말이면 신도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합니다. 더 폭 넓은 자유가 도시를 감싸고, 더 풍요로운 물자와 자원이 오가는 공동체에서라면 종교가 설 땅이 좁아지고, 그래서 약간 미개한 이런 곳에서나 여전히 종교의 힘이 유지되는 걸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그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사람 손에 물질이 쥐어지면 자신의 통제력, 주도권이라는 걸 실감하고, 그래서 절대자에의 의존이 어리석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반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문화와 풍토에 따라 다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도 "세속적 가치에 밀려" 정도로 정리하는 것 아닌지. 세속에는 그런데 과연 "가치"라는 게 있었나요? 순간의 쾌락과 만족 말고 말입니다.
"구글 맵에서는 보통 공원 같은 녹지가 초록색으로 표시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회색으로 표시된 곳도 가 보면 녹지인 곳이 많다." (p58) 아마도 행정조사가 불철저하면 구글에서도 참고할 만한 자료가 적어 모호한 회색으로 처리했을 법합니다. 한국에서는 군사 보호 시설 등이 모호하게 처리되곤 하는데 이것은 당국의 의도적인 정보 비공개 때문입니다. 녹지가 많다는 건 여튼 반갑습니다. 우리도 경기도 일원이나 서울 변두리에 거주민 빼고는 잘 모르는 근린 공원(물론 구글이나 네이버 맵에는 잘만 표시되죠)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게 아니라 번잡한 도시에서 참 고마운 존재이며, 여기 상트페레트부르크에서는 "관광객들을 피해 현지인들이 차분히 쉬는 곳"이라 합니다. 그럼 구글의 미흡한 표기는 혹 시 당국에서 의도한 결과일까요? ㅎ 그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옆 페이지 사진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생수통 하나를 옆에 두고 약간은 뻘쭘한 미소를 짓습니다. 사는 모습이 참 우리네랑 비슷합니다.
한국의 기차역은 딱히 위험한 환경... 같은 곳은 아니지만 노숙자가 진을 치고들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저자는 미국이나 서유럽 등의 위험한 역 몇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이곳 러시아는 그에 대조하여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합니다. 심지어 "문제에 휘말리거나 위협을 받으면 근처의 지하철역이나 기차역으로 뛰어들면 된다"고도 합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는 미국의 전철역은 우범지대의 대표격인데도 말입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저 둘의 중간쯤인듯 합니다. 미국 역보다는 러시아의 그것에 가깝겠지만.
볼가 강은 문예나 노래 등에서 워낙 자주 등장하기에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지명입니다. p115에서 작가님은 볼사야 거리를 걸으며, 어느새 발길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볼가 강변을 걸으며 "상상 속에서 일리야 레핀의 그림을 보고 돈 코사크 합창단의 노래를 들었을 뿐"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아마 저 장소에서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겠습니다. 유튜브를 듣고 짬짬이 구글 검색을 하며 말입니다.
p124에는 책 표지에 나왔던 그 두 어린이를 담았던 똑같은 사진이 다시 나옵니다. 배경이 된 옴스크는 책을 읽어 보면 빈민가 비슷한 곳이라고 해서 약간 놀랐습니다. 남자애 패션이 촌스러워서 시골인가 생각은 했었지만 말입니다. 이 책에 실린 사진 중 유일하게 등장인물의 미소가 없는 작품이라고 작가는 말하네요. 가난에 시달려서 미소를 지을 여유도 없는 걸까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애들이라서 그런지 자기들 나름대로는 웃고 있는 듯하기도 합니다.
현지에 가 보고 직접 체험해야만 얻을 수 있는 팁들이 많죠. 여행뿐 아니라 세상사 모두가 마찬자기라서 책에서 배우는 건 극히 일부분입니다. p136 이하에서 저자는 자신만의 러시아 여행 팁을 소개해 줍니다. "3등차는 값이 싸지만 복도에까지 2층 침대가 설치되어 있고 칸막이가 없이 개방되어 있다." 그게 안 좋은 거겠죠. 혹은, 열린 여행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장점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외의 정보를 작가님한테 듣게 됩니다. 비싼 카메라와 다량의 현금을 들고 다녔는데도 전혀 신변의 위험을 못 느꼈다는 겁니다. 물론 이는 작가님한테 특유한 케이스일 수 있고 국외는 물론 심지어 한국 내 여행이라고 해도 언제나 조심은 해야 합니다만 말이죠. 여튼 작가님은 이런저런 범죄에 신경 쓸 필요 없는 여행이었다고 하는데, 반대로 그나마 러시아에서는 개방되고 발전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인종 차별 비슷한 적대감까지 간혹 느꼈다고 합니다. 서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이건 과연 뭘 의미하겠습니까? 어설프게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곳에서, 특히 하층민 중심으로 이방인에 대해 터무니없는 적개심을 띠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거죠. 작가는 "경찰국가" 개념도 거론하는데 여행자 입장에서 안심하고 다닐 수 있다면 나쁠 것도 없다고 합니다. 물론 의미를 더 비약해서 해석할 건 아니고, 그저 소박한 여행객 입장에서 이해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독자로서 저는 "과연 자유의 의미가 무엇일까?" 를 좀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정부의 통제가 강하고 다소 빈곤한 지역일수록 사람들의 선한 마음은 더 잘 지켜진다? 그럼 중국은 어떻습니까? 모를 일입니다.
참 특히 코카서스 인종이 사는 권역에서, 유대인과 그 사당이 없는 지역은 거의 없다시피한 것 같습니다. 대단합니다(비꼬는 의미가 아니라). p172에는 입장시 반드시 겉옷을 벗어 맡겨야 하는 곳이 꽤 되는데, 작가님은 그 안에 내복만 입고 있는 터라 그럴 수 없어서 약간의 웃지 못할 실랑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여행자라면 이럴 일이 드물겠으나 여튼 우리도 좀 참고해야 할 듯합니다(난방은 잘 된다고 합니다). p178에는 어느 예술품의 사진이 있는데 두 분의 행위자가 참여한 작품이고 잘 보면(잘 안 봐도) 여성들이라서 약간 당황스럽습니다. 물론 가릴 부분은 어느 정도 가려져 있습니다. p165에 다시 화가 일리야 레핀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도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의 수렴, 획일화를 위해 예술가들이 여전히 탄압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뭐 당연하죠.
도스토옙스키 본인도 그곳에서 살았고, <죄와 벌>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배경이었다고 합니다. "왜 그의 동상은 언제나 구부정한가?" 정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스토옙스키와 그 명작을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존재 가치가 있겠습니다. 저도 꼭 가 보고 싶어요. p202의 저자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사랑하는 팬들이 만든 (거대한) 문학적 게임에 (겨우) 계정 하나를 등록한 느낌이었지만 잊지 못할 느낌이었다." 이 말 듣고 보니 저도 꼭 가서 계정(?) 만들고 싶네요 ㅎㅎ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2019년작 <안나>를 자주 틀어주는 편인데, 작가님은 러시아의 음험한 스파이 묘사로 그 이미지가 많이 왜곡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지에 가서 보면 크렘림과 붉은 광장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관광지가 된 지 오래라고 합니다(p241). 제 생각에 이 두 사실은 서로 모순이 아니며, 러시아가 스파이전에서는 자유 진영을 압도할 만큼 놀라운 실력(?)을 보인 건 팩트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실력이 좋아서 불과 몇 주 전에 미국 주요 시설을 해킹으로 다 털어 먹었죠. <솔트>의 졸리, 또 <레드 스패로> 같은 영화를 언급하시는데 올가 쿠릴리엔코도 러시아 태생(정확하게는 우크라이나 혈통에 프랑스 국적이지만), 스파이 액션 자주 출현, 본드걸 역임 커리어 등 빼놓을 수 없는 배우입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황석영의 기행문 제목이 생각나기도 하는 이 한 문장으로 독후감을 요약하고 싶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민족, 국민에 대한 선입견은 대체로 뚜렷한 근거가 없습니다. 가서 실제로 만나 보고 살을 (가능하다면) 부대껴 봐야 그들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풍경도 아름답고 사람들 사는 모습은 더 아름다운 나라 러시아. 저도 꼭 가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