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내의 손님 - 룹탑 불법체류자들
이재욱 지음 / 행복에너지 / 2020년 10월
평점 :
아내의 손님이라면 나 역시 반갑게 맞아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장인어른, 장모님은 부모와 같고, 처남 등 처가식구들은 당연히 가족처럼 대해야죠. 그런데 그런 범주가 아닌 "다른 손님"이라면? 어딘가 약간 불편한 느낌이 들 때도 있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어느새 이주 노동자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중국에서 온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붓색과 골격 등이 확연히 다른 동남아 분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을 근거 없이 불편하게 대하는 건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개중에는 이곳의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고 나쁜 행동을 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성실하게 제 직분을 다하는지 어떤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적대한다거나 심지어 경멸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건 바로 그 장본인이 경멸 받아 마땅하죠.
이 책에는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작가님의 말에 따르면 다큐라고 봐도 된다고 합니다. 연작들의 공통점이라면 부천의 어느 루프탑이 배경인데 수십 명의 필리피노, 혹은 필리피나 들이 동시에 회합할 만큼 넓고 옥탑방도 따로 있습니다. 이 소설들을 읽고서 우리 나라에 소위 조선족 아닌 동남아인, 그 중에도 필리핀인들이 그렇게나 많이 왔던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네요.
필리핀은 한때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고 미국의 원조도 많이 받은 나라였으며 그 나라 대통령이 한국의 국가원수를 살짝 무시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나라가 지금은 한국 노동자 급여의 1/10도 안 되는 환경에서 교사(선망의 직업이라고 합니다)가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학교 교사가 여기 와서 힘든 노동을 하는 이유는 급여가 열 배가 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적성에도 맞지 않고(아닌 경우도 있는데 이 책 두번째 이야기에 나옵니다) 몸도 힘든 일을 하러 이 먼 곳에 온 이들에게 별의별 기막힌 일들이 다 벌어지는데 제3자가 보기에도 기막힌 사연이 많았습니다.
첫번째 단편의 제목이 "아내의 손님"입니다. 아내의 손님이라면 뭐 같이 환대를 하면 되겠습니다만 전혀 생각지 못한 시간, 장소(!)에 그 손님이 있다, 이러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죠. 게다가... 그 손님이 이미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기까지 하다면! 후.... 주인공 아리엘은 원래 교사였습니다. 친구 비센테는 아리엘과 달리 진득하거나 성실한 성품이 못 되었고 말이죠. 아무리 선망하던 교직을 얻었다 해도 친구 비센테가 이미 바람을 넣은 터라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한국행, 코리안 드림을 아리엘은 이제 포기할 수 없고 그래서 한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열심히 일하던 중 외환위기가 터졌고(대략 20년 전이고 원 그때도 필리핀 노동자가 그렇게 많았나 싶었네요), 다행히 사장님이 좋은 분이라 위기도 잘 넘기고 불법체류 단속 외에는 크게 신경 쓸 게 없었습니다. 브로커 아주머니를 통해 꼬박꼬박 큰 돈(한국에서야 푼돈이지만)을 부치던 아리엘은 고향의 아내에 대해 좋지 못한 소문을 듣는데요...
두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알렉스와 메리입니다. 메리는 봉제공장에 다니는데 솜씨가 정말 좋다고 합니다. 이렇게 타고난 적성이라도 일에 잘 맞으면 그나마 다행이죠. 문제는 공장의 김 과장이 아주 질 나쁜 녀석이고, 메리는 필리핀에 이미 남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김 과장 때문에 공장을 그만둘 생각을 했으나 최 부장 같은 좋은 사람도 회사에 있기에 메리는 계속 직장을 유지합니다. 사실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한국에 김 과장 같은 사람이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최 부장 같은 이가 있어서 한국인인 게 부끄럽지가 않네요(p53). 다만 위장이라도 남편이 있어야 이런저런 신경 쓸 일이 없어서 편하다는 소리에 메리는 알렉스를 얼결에 남편으로 내세웁니다만 진짜 난감한 일(우리 독자들이 보기에)은 그 다음에 터집니다. 참고로, 소설이니까 이렇게 설정되었겠지만 필리핀 현지의 메리 남편은 몸이 안 좋습니다. 버스 기사였는데 큰 사고를 당해서라는군요.
위장결혼은 세번째 이야기에도 등장하고 앞의 두번째 사연 메리와 알렉스가 잠시 단역(?)으로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는 한국인 이혼녀인 혜리 씨(실장님)가 주인공인데 그녀는 폭력 남편에게 크게 실망하고 이혼한 여성입니다. 결혼 전에 잘해줄 것 같더니 결혼 후에 태도가 싹 바뀌어서 아내를 길들이려고 폭력을 예사로 휘두릅니다. 많은 여성들이 큰 충격이라며 스테레오타입처럼 거론하는 유형이죠. 그런데 아까도 제가 귀갓길에 장바구니를 아내의 손에서 살포시 나꿔채는 어느 남편분을 봤습니다만 이제는 우리 주변에 아내를 끔찍히 챙기는 분들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튼 이 혜리씨의 남편은 그냥 찌질이고, 혜리씨는 사무실에서 큰 부상을 입을 뻔하다 필리핀 노동자 샤무엘의 도움을 받고 호감을 느껴 그에게 위장 와이프가 되어 줄 생각을 품게 됩니다. 사실 이건 불법이죠. 무작정 미담으로 칭송할 건 아니겠지만 소설이니까요. 여튼 우리가 예상 가능하듯 일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더 발전(...)하게 됩니다. 아 그리고 샤무엘은 어떤 못된 아줌마한테 속아 편법으로 국적취득을 하겠답시고 돈을 줬는데 이걸 사기당하는 통에 사정이 더 급해진 거고요. 여튼 우리 나라 한 구석에 전혀 상상을 불허하는 이런 요지경이 펼쳐지기도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샤무엘은 이 앞에 실장님을 한 번 더 구해 주는데 편의점 앞에서 웬 불량배등들과 마주쳤던 거죠. 이때는 샤무엘도 같이 큰 봉변을 당할 뻔했는데 루프탑의 필리핀 동포들이 우루루 몰려나오는 통에 살아난 겁니다. 어글리 코리안의 대표적 예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고 짝을 찾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기도 하지만 일단 공인 커플이 만들어지면 절대 존중(p105)한다! 이국에서도 이런 룰을 지키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아직 대부분 젊어서 철이 없을 법도 한데 말입니다. 산드라가 아모르와 빨리 맺어진 건 권 사장 때문이었는데 맨앞 소설의 김 과장 같은 인간입니다. 대신 산드라가 다니는 회사의 김 사장은 좋은 사람이고 (불필요하게도) 권 사장 체면을 좀 세워 주기도 합니다. 술만 안 마시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이죠. 참고로 산드라는 이혼녀였고 필리핀에서는 국립 병원 간호사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과분한 여자라며 아모르가 감지덕지하는 겁니다. 둘 사이에 생긴 아기 이름은 버린코인데 birth in Korea란 뜻이라고 해서 약간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사연 중 개인적으로 가장 뿌듯한 느낌이 드는 이야기입니다.
쟈스민은 공장에서 일하는데 또 저 앞의 김과장, 권 사장 같은 한심한 한국인 공장장놈에게 걸려 나쁜 일을 당할 뻔합니다. 이런 사람도 있지만 새로 일자리를 찾게 된 공장의 사장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라서 그녀는 하나님의 섭리(p127. 참고로 필리핀에는 가톨릭 신자가 많고 작중 쟈스민도 성당을 다니지만 표기는 이 책의 것을 따르겠습니다)까지 떠올리게 됩니다. 다만 나이가 사십대로서 너무 많고 몸이 불편하다는 게 단점인데 그런 게 눈에 안 들어오나 보죠. 근데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라, 쟈스민 역시 필리핀에 남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안되죠. 아무리 외롭고 그 사장님(이분은 독신입니다)이 좋은 분이라고 해도요. 쟈스민이 유독 이렇게 외로움을 타고 연정을 품는 게 남다른 미인이라서일까요(그런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여튼 이런 식의 사랑에는 찬성을 보내기가 어려우나, 뭐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런저런 차마 말 못할 애환이 많다는 취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여섯번째 방랑자 레이의 사연은 많이 결이 다릅니다. 레이는 한국에서 일하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주위 사람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에릭은 그런 레이에게 돈을 빌려 주는데 결국 레이는 건강 관리를 잘 못 해 이국에서 숨지게 되고 돈은 그냥 떼였나 보다 생각했으나 전혀 예상 못하던 일이 생깁니다. 몇 배의 돈을 고향에서 대신 변제 받은 거죠. 알고보니 레이는 독자가 생각도 못 하던 고귀한(?) 출신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고 참 세상은 의외의 일로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이야기에 등장하는 안드레아는 엄마가 교사이며 아빠가 한국인입니다. 어린이가 주인공이라서 더 몰입감이 생기는데 이 이야기 역시 읽어가며 혀를 차게 되었습니다. 참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편으로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숨이 나올 만큼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저지릅니다만 같은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 이해하게도 됩니다. 그런가하면 "세상 사는 일이 너무 편하면 타락하게 된다"면서 놀라울 만큼의 통찰력을 보여 주는 말도 간혹 하는군요. 우리는 어떨까요? 수십 년 전 외국 땅으로 가서 힘든 노동을 하며 고향으로 송금하던 노동자, 광부, 간호사 분들도 현지인 눈에 이 비슷한 모습으로 비쳤을까요? 많은 생각을 하게 돕는 독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