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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건너는 집 ㅣ 특서 청소년문학 17
김하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게 큰 기대를 갖지 않고 읽었는데 ㅎㅎ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시간을 건너는 집"은 작품 속에서 "타임하우스"라고도 불립니다. 하얀 운동화(이것도 어디서 왔는지 모를)를 신은 네 아이들에게 어느날 집 하나가 등굣길에 보이고, 어떤 할머니와 이상한 아저씨 하나가 아이들을 안내합니다. 현대 한국에서 이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아마 백이면 아흔이 사이비 종교 같은 걸 떠올릴 건데 아이들도 대뜸 경계하며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어?" 같은 반응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뭐였냐 하면, 이 집에 들어온 특별한 기회, 정말 특별하긴 하죠, 이 기회를 받은 아이들은 현재, 과거, 미래로 각각 향하는 문 세 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현재를 잠시 건너뛸 수도 있고,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으러 갈 수도 있고, 이도저도 싫으면 현재로 그냥 나가면 됩니다. 이런 선택이 주어진다면 대부분이 ㅎㅎ 복권 같은 걸 떠올리겠으나 그런 건 규칙 위반이라서 안 됩니다. 터무니없는 요행수, 아이들이니까 노력 없이 갑자기 명문대 입학 이런 것도 안 되며, 가까운 이의 "죽음"도 되돌릴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에이 뭐야 하며 아이들이 실망하는 게 당연하며, ㅎㅎ 사실 아이들이 실망하는 건 또 그러려니 하는데 성인 독자들도 그럼 뭐가 대단한 기회냐며 유치하게 더 실망하는 게 아마 보통일 겁니다. 와 이거는 작가 상상력의 부족 아닌가, 이런 반응도 제 주위에서 봤습니다. 근데 전혀 아니고, 끝까지 다 읽고 진짜 충격 받았으니까 도중에 중단하지 마시고 일단 폈으면 완독들 하시길 바랍니다.
이 아이들은 왜 타임하우스로 초대되었을까요?알고보니 하나같이 어떤 문제에 맞닥뜨린, 갑갑한 인생을 사는 애들이었습니다. 어떤 애는 학교에서 지독한 왕따를 당하는데 그 주범은 더 어렸을 때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두 명이었습니다. 책에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두 명은 아마 나쁜 친구를 접하고(여기까지는 설명이 나옵니다), 뭔가 신세계를 만나고 스스로 종전의 자신과 다른 존재로 훌쩍 컸다고 여겼을 겁니다. 사실은 갈데까지 간 타락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종전의 자신에 머물러 있는 듯한 자영이가 엄청 한심하고 찌질하게 보였겠죠. 대부분 불량청소년이 왕따를 괴롭히는 건 이런 심리적 단계이며, 꼴에 뭔가 꼬투리를 잡아서 단죄를 하고 시작합니다. 자영이가 당하는 왕따는 정말 지독하며, 여기서 격분하여 작품 읽기를 도중에 그만두는 독자도 있을 텐데 그러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수는 불량청소년과 어울리는 수준의 사회성도 없고 그냥 혼자 지내는 싸이코패스입니다. 진짜 싸이코패스인지 아니면 어디서 보고 그렇게 정체성을 규정하여 흉내만 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중에 자영이한테 "널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뭔지는 스포일러)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어!"라고 하는 대사에서는 와 얘 진짜 노답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불량 청소년들을 만나 (엄마가 힘들게 번) 돈을 뺏기는 장면에서는 또 생각이 달라집니다. 강민이가 나중에 "와 너한테 돈을 뺏다니 대체 얼마나 무서운 애들이었음?"이라고 물었을 때 독자인 저도 실소가 나왔습니다. 수가 많아도 흉기 하나로 바로 제압이 가능한 이수이니 말입니다. 작품 중에서도 설명이 되지만 이수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려는(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의도였던 거죠. 그러면 싸이코패스는 아닙니다. 다른 정신병일 수는 있지만.
이수는 이런 애고, 또 자영이는 왕따고, 다른 여자애 선미는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인데 약간 치매기가 있는 할머니가 또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 셋 중에 누가 가장 지독한 곤경에 빠져 있을까요? 엄마가 또 노답이기까지 한 이수 아니겠나 싶고, 선미는 그래도 집안이 살만은 하지 않냐, 자영이는 (소설에도 나오는 것처럼) 학폭은 구제 수단이 있고 본인만 독하게 마음 먹으면 뭐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여기 나오는 애들처럼 어린 나이에는 모든 게 똑같이 지옥 같은 순간입니다. 누가 낫고 못하다고 등급을 매길 게 아니죠. 뭐 그래도 진짜 큰 사고를 치고 어디 가기 직전인 이수가 제일 딱하긴 합니다.
그런데 아마 많은 독자들이 그리 느끼겠지만, 강민이는 생긴 것도 번듯하지, 부모님 직업도 빵빵하지, 본인 공부 잘하지 여기 다른 세명의 노답 케이스와 비교될 인생이 아닐 듯한데 왜 (초대되어) 온 걸까요? 이게 포인트입니다. 이걸 이상하게 생각한 독자라면 거기까지 책 제대로 읽은 거죠. 책의 진짜 반전이라 할 만한 놀라운 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큰 사고를 친 애까지 끼었으니, 할머니와 멸치 아저씨(ㅋ)는 와 이번 케이스는 진짜 장난 아니다 싶었으나, 오히려 요번 애들이 진짜 착했다고 작품 결말에서 리뷰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정체(내력)도 알려 주는데, 뭔가 마음이 찡해지는 느낌이었어요. H G 웰즈의 <더 월>이란 고전 단편이 있는데 그것도 어린이가 벽에 난 신비스러운 문(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작품과 함께 한동안 제 마음에 오래 남을 듯한, 마냥 해피 엔딩도 아니면서 여운이 긴 그런 멋진, 재미있는 소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