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이드 수잔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인 "블랙 아이드 수잔"은 꽃 이름이기도 하고, 이 소설 속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의 여성 피해자들을 가리키는 (안타까운) 별명이기도 합니다. 원제는 "수잔"뒤에 복수 접미사 -s가 붙어 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끔찍한 사건의 여성 피해자들이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자가 범인이라고 여겨, 그자를 진범으로 지목한 검찰 측에 유리한 증언을 했건만, 이후에 벌어지는 여러 수상한 사건이나 직감 등은 혹시 그자가 진짜 살인마가 아닐 수 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경우 평범한 이들이라면 오랜 동안 양심의 가책에 휘둘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 내가 입은 피해가 얼마인데, 내가 혼자서 그를 찍은 것도 아니고 공권력에서 그를 범인으로 밝혀냈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이러면서 나의 상처를 달래는 데 필요한 모든 분노 발산을 그에게 집중할 것 같습니다. "범인이 아니면 어쩌지?" 그건 지금 너무도 힘든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나도 힘들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도 미개하고 무책임하며 사악한 생각입니다.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무기력한 여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했다는 누명을 썼다면, 대체 그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내가 힘들다고 아무나 골라잡아 화풀이를 해도 되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기막힌 문제는, 그 사람이 진범이 아니라면 정말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악마는 여전히 밖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리라는 점입니다. 소설 속에도 내내 암시되듯, 진범은 다시 무고한 희생자를 찾거나, 심지어 꼴에 보복이랍시고 피해자를 향해 다시 걸어올 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진상을 규명하여 그 일을 저지른 진짜 범인을 밝히는 일은, 어떤 거창한 윤리적 결단까지도 못 되며, 당장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억울한 사람을 감옥 안에 잡아 넣고 혼자 마음 편하려 드는 자체가, 살인마보다 별반 나을 것도 없는 악독한 심성의 발로입니다. 살인 혹은 어떤 범죄의 진상을 밝히는 건, 변덕스러운 대중이 그때그때 모여 합의 비슷한 과정으로 결정될 성질이 전혀 아닙니다.

이 소설 중에 자주 언급되는 OJ 심슨 사건은, 전직 미식축구 슈퍼스타이자 영화배우, 코미디언이었던 심슨이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도주하다가 체포되어 끝내 유죄 판결을 받았던, 25년 전 미국을 뒤흔들었던 소동이었습니다. 사건의 전말도 드라마틱하기 짝이 없지만,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까지의 재판 과정도 엄청 센세이셔널했습니다. 이 소설 p174에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 조니(자니) 코크란은 당시 그의 변호사였으며, 현란한 말재주(때로는 거짓말)로 배심원단을 들었다 놨다 한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였습니다. 결코 존경스러운 사람은 못 되지만, 일을 맡기려면 저런 사람한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은 아마 누구나 했을 겁니다. 반면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을 당하고 일시적으로 눈까지 멀게 된 테사는, 자신의 마음을 치료하려고 아빠가 붙여 준 의사를 때로 비웃고 속이기도 합니다. "와, 이런 사람한테 아빠가 돈을 내야 하나?" 어설픈 위안의 시도에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찹니다.

소설의 큰 줄기는, 이제 아이(이름이 찰리지만 딸입니다) 엄마가 된 그녀가, 과학의 발전으로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가 가능해진 지금 진범의 존재에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는 과정을 다룹니다. 충격으로 눈이 멀었다가 회복해 가던 사건 직후를 왔다갔다 하면서 말입니다. 25년 전 수잔 서랜든 주연, 존 그리셤 원작의 영화 <의뢰인>에 보면 어느 경박한, 돈에 눈이 먼 기자 때문에 피해자의 신원 일부가 밝혀져 마피아 암살자가 병원까지 꼬마를 죽이려 찾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이 엄마가 된 그녀도 무심히, 아니 섬세한 의지의 발로로, 옛 피해 현장을 찾아갔다가 집주인에게 사진을 찍혀 이제 미국, 아니 온 세계의 SNS망을 탈 것을 걱정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래 전이라면 20여년이라는 세월의 전후가 사람 사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다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었겠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그리고 우리가 사는 바로 지금) 그새 발전한 과학기술의 성과로 사람들이 잘못 알아왔던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악마와 같은 가해자야 말할 것도 없지만, 피해자를 비롯 우리 모두도 나 자신의 방어를 위해, 혹은 상대의 악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저런 거짓말을 피치 못하게,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해 댑니다. 1인칭 시점인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대목은 오히려 이런 대목들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참으로 다양한 동기에서 사소한 거짓말을 하고, 그 과정과 동기를 우리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그녀가 주인공이고 피해자라서라기보다, 사실 우리들 중 누구라도 매번 정직하지 못하기에 그녀에게 은밀히 공감합니다. 소설 속에서 내내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단어가 "공범"인데, 이 과정에서 우리 독자들도 복잡다단한 그녀의 심리 동선을 따라가며 뭔가 모르게 "공범"이 되는 느낌입니다. 요즘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를 제재로 삼은 이런저런 대중소설이 꽤 많지만, 이 작품은 좀 결이 다르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기에 읽으며 새로운 감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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