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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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인 덕에 세계에 자랑할 국보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보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잘 아는지 스스로 반성하거나 공부할 시간을 잘 갖지 않습니다. 한국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부흥에 성공했다거나, 세계에 내세울 만한 좋은 기업을 여럿 갖고 풍요롭게 사는 것도 물론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세계 어디에도 없는 놀라운 문화재들을 이처럼 보유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면 더 자랑스러운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 실린 문화재들은 아예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것들이니 말입니다.

p56에는 "왜 국보 1호가 숭례문인가"라는 토막 상식이 나옵니다. 사실 이는 여러 매체나 시민단체 등에서 예전부터 지적했던 이슈입니다. 과연 남대문이 국보 1호의 자격이 있는지의 문제가, 2008년에 화재로 전소되기 전에도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어차피 일제가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부여했을 뿐이니 아무 의미를 둘 게 없다지만 그래도 국민감정이 꼭 그렇게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는 "남대문이 국보 1호"라는 일반상식이 돌고돌다 그간 너무 많은 가치가 자연스럽게 부여된 탓이 클 뿐입니다. 어차피 전면 해제 후 새 번호를 부여한다 해도, 이번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이후의 문화재 서열(?)을 놓고 또다시 아무 의미 없는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죠. 그 외, 국보지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저 뒤 p310 이하에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은진미륵은 1970년대에 우표 도안으로도 쓰였고 그 친근한 모습 덕분에 인지도가 꽤 높지만 오랜 세월 동안 "보물"의 지위였다가 2년 전에 국보로 격상되었고 책에도 이 사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견훤과 그 패륜의 아들 신검 간 상쟁사가 잠시 언급되는데 황산벌을 이 불상이 멀리서 굽어보는 그 위치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알듯 황산벌은 이 고사의 276년 전(p105)에도 다른 큰 일의 무대이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 뒤에는 관촉사 창건 설화가 나옵니다. 이름이 통칭 은진미륵이지만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정식 명칭이라고 저자는 환기합니다. 왜 민중이 오랜 동안 이 상을 미륵으로 불렀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정제미와 이상미와는 달리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았다는 게 책에 나온 구절인데, 최근에는 고려 시대의 조형에 대해 학계에서 전면적으로 독자적인 미의식 추구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쪽입니다.

팔만대장경의 가치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널리 가르치는 편이지만 종교편향이라는 오해를 부를까 우려가 있어서인지 최근에는 그리 강조를 안 하는 듯합니다. 책에 나오듯 추사 김정희도 "판각이 마치 신선이 쓴 듯한 필체"라며 한참 후대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국난 중에 이런 성과물이 나왔다는 사실도 놀라우며, (그런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으나) 만약 우리가 국보를 단 한 점만 보유할 일이 있다면 단연 첫손에 꼽힐 만합니다. 실록 완역으로 최근 널리 인용되는 고사가 "왜인들이 자주 찾아와 특히 세종에게 대장경을 내어줄 것을 간청 혹은 위협했다"는 일화입니다. 정부에서 대내외적으로 숭유 억불책을 쓰니, 필요도 없는 대장경은 우리에게 준들 어떠겠냐는 참으로 뻔뻔스런 작태였죠. 책에는 이 당시 존불정책을 편 무로마치 막부의 그 나름 급한 사정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임란 당시에는 왜의 모 승려가 "팔만대장경이 훼손되면 일본이 망할 것"이라며 경거망동 자제를 촉구했다고도 합니다. 세종 자신이 불교를 깊이 믿은 이유도 있지만, 여튼 먼 훗날을 내다보고 국보를 미리 지킨 그 혜안에도 감탄하게 됩니다.

p139에는 "영국인은 인도를 잃을망정 셰익스피어를 지키겠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석굴암이 있다"고 한 고유섭의 말이 인용됩니다. 셰익스피어 운운은 저명한 평론가 칼라일의 것인데 현재는 영국이 아대륙을 포기한 지 이미 70년이 넘었고 저 말 자체가 제국주의의 뻔뻔함을 나타낸다고 해서 지명도가 확 낮아졌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마 성장과정에서 자주 접했을 겁니다. 고유섭 선생은 이른바 "무기교의 기교"라는 명언으로 잘 알려진 분이었죠. 석굴암은 고대 건축의 한 경이에 속하는 걸작이지만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 일제가 섣불리 콘크리트, 시멘트 등으로 떡칠을 한 탓에 가치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급한 수단으로 보전하려는 최선의 시도였다는 옹호론도 있지만 현재의 눈으로 보면 그저 가슴이 아플 뿐이죠.

마르코 폴로가 황금의 나라를 찾아 떠난 게 지팡구, 즉 지금의 일본이었다고 하지만 진짜 황금의 나라는 p221에 나오는 대로 201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전시회의 별칭이기도 하듯 신라였겠죠. 국보 83호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작이지만 그 관리번호(아무리 행정기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가 83이란 사실은 잘 모를 듯합니다. 이 83호를 놓고 2013년의 저 전시회에 출품할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의 반대가 있었으나 상급 기관인 문체부가 중재에 나서 겨우 출품이 결정되었다고 합니다(p221). 야스퍼스가 극찬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책에도 잘 나오는 것처럼 그 극찬은 원래 일본 고류지(광륭사)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다루기 힘든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83호가 미적 가치가 더 뛰어나다는 게 저자의 단언이고 또 중론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더욱 화제가 되었지만 한글 창제에 대해서는 승려 신미가 기여했다는 설이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는 실록을 인용하여 세자(나중에 문종이 되는 분), 딸 정의공주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추정합니다. 그 따님의 총명함에 대해서는 민간기록인 <죽산안씨 대동보>(즉 해당 가문의 족보입니다)에서 따로 언급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총명한 여성이 있는가 하면, 멍청한 자신의 지능에 대한 열등감과 전문성 부족 때문에 오히려 피해의식에 쩔어 있는 한심한 고자질쟁이도 있는 법이죠.

미술품에 대한 평가는 확실히 시대가 바뀌면서 같이 변천하기도 하나 봅니다. 예전에는 고려대의 작품에 대해 앞 신라대의 그것에 견줄 바가 못된다는 듯 폄하하는 입장이 보통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죠. 책 p313 이하에서, 2013년 미국 메트로폴리탄에서 연 전시회에서 정작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 보원사지 철조여래좌상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는 석굴암과 비슷한 시기인 8세기로 그 제작 시점이 짐작되며, 물론 고려가 아닌 신라 代입니다. 그러나 책에서도 설명하듯 철불 양식은 중국에서도 송대에 접어들어 널리 퍼졌는데 우리는 이미 이 시기에 철불을 능숙히 만들었으며 철불은 이후 고려대의 지배적인 양식으로 자리잡습니다. 이 작품은 미국인들의 극찬을 받았지만 정작 우리의 평가는 박한 편이어서 아직도 국보는커녕 보물 등 어떤 형식으로도 문화재 지정이 안 된 상태입니다. 이 작품은 책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라 나옵니다만 부여군 등에서 최근에 연 전시회에서는 "국외 반출로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와야 할 문화재"를 언급하는데, 이분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닌 향토, 본향으로 돌아와야 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재가 영화스럽고 과거가 다소 부끄럽다고 해도, 조상님들의 노력과 은혜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우리가 없는 법입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데 하물며 찬란한 문화유산까지 이렇게나 많이 남겨주셨으니 그 은공이란 이루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보다 밖에서 더 높이 평가하고 감탄하는 우리들의 국보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한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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