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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는 법을 잊어버린 나에게 - 나를 보는 연습으로 번아웃을 극복한 간호사 이야기
장재희 지음 / 나무와열매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인간에게 감정이 없다면, 치열한 생존 경쟁에 얼마든지 몸을 맡기고 사나운 적들과 부대끼며 승부를 치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감정을 온전히 지닌 채로, 싸움에는 싸움대로 또 참여를 헤야 하니 그게 문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기에, 싸움에 설령 이겨도 그 과정에서 다친 감정을 돌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안 그러면 결국 피로스의 승리에 그칠 뿐이죠.
때로 인간은 사나운 소통에 엮이지 않아도, 외로움이나 상실감, 혹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또 감정에 상처를 입습니다. 가만있기만 해도 절로 생채기가 나기도 하는 게 감정입니다. 감정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감정의 결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남에게 통하는 방법이 내게도 듣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생을 가장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돌보는 데 능한 유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 수백억의 돈이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막대한 양의 지폐 다발을 고층 빌딩 위에서 뿌리고 사회에서 잠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은 손에 들어왔으나 마음을 너무 다쳐 돈만 봐도 원수 같은 느낌이 들어서가 아니었을지.
저자는 암 진단을 받으신 부친께서 돌아가시는 과정을 지켜 봐야 했었습니다. "나에게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자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p14)" 그 다음에 저자가 보인 반응은 분노입니다. "나는 슬픈데 왜 저 사람들은 기쁜 걸까?"(p16) 마치 20세기에 활동한 저명한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정립한 교과서적 단계를 보는 듯합니다. 아마 저자께서도 이후 간호학을 전공하며 저 유명한 설명 체계를 공부할 때 더 각별한 기분이 드셨을 겁니다. 당시 아직 어린 나이였을 텐데도 저자는 "지금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아빠의 배우자였던 나의 엄마이겠다."란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특한 반응이며, 사람은 이렇게 가혹한 계기를 통해 한 걸음 더 성숙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 중에 환자가 있으면 그 가정이 환자 위주로 돌아간다(p45)." 저자는 간호사가 되신 후 수많은 환자를 봅니다. 쉴새없이 구토하는 환자, 제 힘으로 바로 앉아 있지도 못하는 환자... 저는 예전 KBS 어느 다큐에서 등에 큰 상처를 입은 환자를 의대 교수님들이 치료하는 과정을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지, 여기를 이렇게 치료하면 당장 아파서 누울 수가 없다니까." 의사든 간호사든 진정한 의료인은 그저 손상된 유기물을 원상 복구에 가깝게 고치는 기술자 그 이상의 존재라야 합니다. 환자 입장에 일단 서 보지 않고서 어떻게 최상의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겠습니까? 결국 멀쩡하게 등의 상처를 낫우어도, 그 과정에서 환자가 편히 누울 수도 없다면 그건 치료가 아니라 그저 공산품의 공정처리입니다. 아니 그 과정의 고통 때문에 결국 환자한테 다른 탈이 날지도 모릅니다.
어떤 특별한 상처를 누구에게 강하게 입는 것 같은 계기 없이도, 그간 억누르고 숨죽여 참아 왔던 감정들이 갑자기 폭발할 때, 그럴 때 사람은 완전한 혼란에 빠집니다. "내가 왜 이러지?" "오래된 생각과 묵었던 감정이 뒤엉켜 용수철처럼 내 몸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p66) 대체로 이런 일을 겪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할 겁니다. 아 이건 별 일 아니다, 괜찮을 거다. 그러면서 일상으로 다시 복귀하려고 애씁니다. 저자는 이 일을 겪기 전,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기도 하면서 주변과 소통하고 기분도 맞추려고 해 왔다며 솔직하게 털어 놓습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사실 순간순간 감정은 과부하가 걸린 채 노동을 하는 겁니다. "내 생각과 감정이 나를 태우는 줄 모른 채 내 몸은 점점 활활 타들어 갔다."(p70) 감정적 상처가 안으로 곪아 결국 육신에까지 탈이 나는 과정은 정말 섬뜩합니다.
"병원에서 에너지를 쓰고 나면 내 몸에는 어떤 운동을 할 만한 조금의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p76)." 내가 번아웃이라니! 사실 번아웃 증후군은 서양이나 동양 가리지 않고 비슷한 문명 체계에서 복잡한 업무와 소통에 시달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올 수 있는 병인 듯합니다. 제가 제 주변에서 개인적으로 접하기로는 남성보다 여성분들이 좀 더 많은 것도 같지만 정확한 사실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저자분은 친구가 보내 준 루이스 헤이스의 <치유>를 읽습니다. 또 A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고도 합니다. (p46에 나오는 "교수님"과는 다른 분일까요?)
"부정 모드를 자동으로 긍정 모드가 켜지도록 반복 연습하기 위해 아네스 안의 <프린세스 마법의 주문>을 다시 꺼내들었다(p139)." "간절히 원하는 꿈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p140)" 사실 저자분은 또래 여성들이 무척 되고 싶어하기도 하는 간호사가 되었고, 또 그토록 꿈 꾸던 미국 간호사가 결국 된 분이니 행운아입니다. 스스로도 말씀하시듯 자신의 몸도 못 가누는 환자들만 당장 봐도, 얼마나 복 받은 인생인지 수시로 확인이 가능하죠. 그러나 이런 분도 소통와 일이 주는 별다른 스트레스를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어야 하며, 그래서 "나에게 사랑을 주는 연습(p141)"을 의식적으로 해 내지 않으면 위험한 지경까지도 가는 병을 스스로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땀이 잘 나지 않는 내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p151)" 이는 보이차를 전문가 분에게 직접 내려 받고 처음 겪어 보는, 마치 기분 좋게 사우나를 마치고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저자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참 자연스럽게 붙이는 듯합니다. 내가 살갑게 대하고 어떤 안도감을 받고 싶어도,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기 때문에 나의 호의가 언제나 보상을 받는 건 아니며, 보상은커녕 어처구니없는 악의로 갚아지기도 합니다. 여튼 이 모든 건 에덴동산이 아닌 현실의 세계를 사는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 하는 세금과도 같고, 그러기 위해선 강해져야겠죠.
"내 안에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남아 있다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p160) 저자께서도 잘 말씀하고 있듯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게 가장 좋겠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이를 애 써 부인할 게 아니라, 이게 내 맘에 남아 곪아터지지 않게, 밖으로 잘 나가도록 다스려야 합니다. 이게 바로 나를 돌보는 길의 대전제이자 출발점인 듯합니다.
저자는 본래 결혼식도 양가 어른들만 모시고 조촐하게 치르시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전통혼례"로 관심이 갔는데, 독자인 제 생각에도 아주 근사한 아이디어였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아 이렇게 상처 입은 한 영혼이 지극한 행복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바른 길을 찾아가는구나 싶어서 마구 응원하는 마음이 솟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책을 쓰는 것도 내 자신을 올바로 들여다보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너무나 큰 오해를 하는 게, 나를 돌보고 나를 케어하는 게 어떤 자기기만을 통한 indulgence 같은 걸로 특효를 본다는 거죠. 절대 속임수로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내면의) 진짜 나를 돌볼 수 없고, 저자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똑바로 보는 게 우선인 듯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중 저자님보다 혹 더 심각한 경우로 아파하는 분이라면, 그 역시 저자님의 제안대로 "나를 바로보기"부터 치유의 첫걸음을 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책이 참 예쁘게 만들어져서 소장하고 싶은 느낌이 절로 듭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