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콴유가 전하는 이중언어 교육 이야기 - 싱가포르의 위대한 도전
리콴유 지음, 송바우나 옮김 / 행복에너지 / 2020년 11월
평점 :
품절
모국어를 정확하고 우아하게 구사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글로벌 유력 언어를 따로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면 경쟁에서 앞서가는 좋은 무기를 가진 셈입니다. 언어는 어렸을 때 학습해야 한다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며, 타고난 재능과 무관하게 성실한 습관으로 얼마든지 외국어 능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성실한 습관, 끈기" 자체가 이미 재능 이상의 영역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말레이 반도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열도에도 화교들이 무척 많이 삽니다.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중국계들이 진출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는 본토의 가혹한 행정을 피해 이주했다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여튼 이들은 남다르게 강한 자녀 교육열을 지녔으며, 그 결과 토착인들보다 훨씬 근면하고 건전한 생활 패턴을 정착시켜 부유하게 살아 왔습니다. 말레이 반도 끄트머리의 싱가포르 인들도, 또 인도네시아의 화교들도 다수 토착인들로부터 드물지 않게 잔인한 핍박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단수 조치 등 격렬한 대립 끝에 리콴유가 말레이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할 때 그는 북받치는 감정 때문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죠. 여튼 리콴유 같은 이를 그 대표로 삼을 만한 싱가포르인들의 유별난 교육열과 절제된 태도는 세계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괜히 국립 싱가포르 대학 같은 글로벌 명문교가 거기 있는 게 아니죠. 물론 과거 영국 지배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현재는 정치적으로 지극히 안정되었지만(물론 이에 대해서도 내외의 비판이 만만치 않습니다), 또 영국은 타 제국주의 국가들에 비해 대체로 세련되고 포용적인(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정치를 폈다지만, 이 책에서 회고되는 리콴유 버전의 현대사는 그런 우리의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중국어로 공부한 사람들은 하층민의 삶을 살아야 했을 뿐 아니라, 당국에서는 이들에 대해 잠재적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씌우기까지 했다." 청년 리콴유는 이후 싱가포르의 수상으로서 우리에게 남은 이미지, 즉 바늘 꽂을 틈도 상대에게 허용하지 않는 깍쟁이 엘리트의 모습과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한국의 86세대 못지 않게 반외세 반독재를 외치던 열혈파였던 거죠. 하긴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아직도 살아 있는) 역시 의사 답지 않게 근본주의 스탠스로 이슬람을 믿었고 "아시아에는 아시아의 길이 있다"며 서구식 민주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말레이시아뿐 아니라 영국은 홍콩에서도 아주 서투른 대응을 펴서 현지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공산화를 자초할 뻔했습니다. 홍콩 영화 주윤발 주연의 <강호정>을 보면 이 상황이 잠시 언급되죠. 영국의 식민 통치가 세련되어진 건 현지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겪고 나서입니다. 이 책을 보면 이런 사정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라고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약하고 문화가 없는 사람들은, 고기를 써는 기계에 넣으면 일반 소시지 길이로 나올 겁니다." 소름이 끼치지만 언제나 컬러플한 레토릭을 과시했던 리콴유 수상이 과연 말했을 법한 그런 워딩입니다(p60). 싱가포르라고 해서 화교들만 사는 건 당연히 아니며, 말레이시아만큼이나 인종, 민족 구성이 다양(p72 참조)합니다(단 화교가 다수이긴 하죠). "교육은 교육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은 국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p62) 역시 그의 입에서 나왔을 만한 언사죠. 독립 후 싱가포르는 정치 단위로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국민(이래봐야 도시국가 시민 정도지만)에게 영어로 말할 것을 정책으로 정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가 젊어서부터 말레이어를 자유자재로 말할 줄 알았기에(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이중언어 구사능력을 모든 국민에게 함양하는 게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굳건히하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습니다.
그전까지 싱가포르는 마치 1950년대까지의 미국처럼 인종과 민족을 분리해서 처우했습니다. 중국어를 말하는 이들은 특정 대학교에만 진학하게 했고, 학교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공공시설이 언어별 민족별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판에 리콴유가 중국인들에게까지 영어를 공용어로 삼게 하니, 싱가포르의 다수 종족이었던 그들이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리콴유 자신도 중국계였으면서 동족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런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는 자체가 그의 리더로서 자질을 증명합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코르시카 인의 피해의식 가득한 정체성에 머물렀다면 어떻게 프랑스의 영웅, 세계적 위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것이 바로 위인의 그릇이죠.
"그들은 영어가 유일한 공용어로 기능하면 더 많은 다국적기업이 싱가포르를 찾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p80)."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다민족 분리주의가 득세하거나 중화 우월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하면 가뜩이나 작은 싱가포르가 결국은 깨어질 운명이었겠고, 이제는 다국적기업이 그저 싱가포르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 싱가포르가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 모든 게 공용어 지정 정책 덕분이라 해도 아주 과장은 아닙니다.
싱가포르가 독립 후 수십 년 동안 리콴유 혼자 독재를 펼친 사회로만 알고들 있지만 이 책 p226 이하에 나오듯 탕량홍 같은 포퓰리스트의 도전도 있었습니다. 리콴유는 1997년 총선에 출마한 변호사 탕을 회고하며,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다수 중국계를 선동하던 달변가"로 그를 규정합니다. 이는 마치 현재 터키를 다스리며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꿈꾸는, 즉 국부 케말 파샤가 애써 확립했던 세속주의를 다시 뿌리에서부터 흔드는 에로도안 같은 유형이라고 생각되네요. "왜 우리가 가마를 날라야 합니까? 우리는 가마 위에 앉아야 합니다." 들으면 솔깃하지만 이 말을 다수 국민이 따랐다면 싱가포르는 지금쯤 사분오열되었을 겁니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는 고촉통(오작동)을 리콴유는 이후 후계자로 삼으며, 그가 잠시 중간관리한 후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아들에게 권력이 넘어갑니다.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실패한 정치인 탕량홍은 우리 식으로 보자면 민주투사, 민족주의자로서 새로운 노선을 제시했을지도 사실은 모르는 일입니다. 또, 권력 세습이란 설령 그 나라에 아무리 불가피한 면이 있고 후계자가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 해도 대체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 모든 부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여튼 하나로 통합한 그의 업적은 결코 경시될 수 없습니다.
1970년대 후반 리콴유는 다시 한 번 싱가포르인, 그 중에서도 중국계에게 큰 부담이 될 정책을 선포하려 듭니다. 영어는 영어대로 쓰되, 중국어를 말할 때는 표준중국어를 쓰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화교들은 참 묘한 게, 중화권으로서의 긍지(?)를 가지면서도 말은 꼭 방언을 쓰며 무슨무슨 지방 출신임을 또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는 영어 공용화 정책을 능가할 만큼 격렬한 반발을 부릅니다. "방언을 못 쓰게 하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 "결국 영어만 남고 중국어는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도 주된 반발 원인은, 왜 남방계인 우리들이 북방계인 표준중국어를 써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는 거시적으로 볼 때 지역감정의 발로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외국어는 어렸을 때 반드시 먼저 배워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만 책 p284에 보면 리콴유는 "가능하면 유아 때 시작하는게 좋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유아기를 넘기면 외국어 학습이 불가능에 가까워진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본인 역시 표준중국어나 말레이어는 다소 늦은 시기에 시작(p185)했으니 말입니다.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고 상대를 뒷말 없이 제압하려면 해당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단 이 책의 역자는 "머리가 굳기 전에 시작해야 효과가 난다(p291)"면서도, 역시 제도와 인프라의 중요성를 강조하며 늦은 나이에라도 외국어를 배울 것을 간접적으로 거론합니다. 인재의 역량은 결국 언어를 통해서만 발현될 뿐이기 때문이죠. 이런 역자의 주장이 백 번 맞는 말이며, 반면 무슨 뉴런 연결이 어쩌구 하며 부정적인 면만 내세우는 헛소리는, 자원할당이 거짓말 고안에만 쏠린 사이비 거짓말쟁이의 구질구질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노력을 이길 천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 책을 보면 슈퍼엘리트 리콴유가 얼마나 노력벌레이기도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