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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 서정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1월
평점 :
어느 나라에서건 신분 자체의 세습(世襲)은 폐습(弊習)으로 여겨지며,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다면 그건 정상국가가 아닙니다. 대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교육을 시켜 좋은 학벌을 얻어 주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돕는 부모가 있다면 그런 이들은 칭찬을 받습니다. 중국인이나 유대인들, 또 일부 인도인들은 유독 자국 아닌 다른 나라들에 진출하여 터잡고 사는 경우가 많은데(디아스포라), 대부분이 자녀 교육에 열성이라서 토착인들보다 더 잘살고 사회적 존경을 더 많이 받곤 합니다. 오바마도 한국에 대해 유독 정감 어린 언급을 자주 하는 사람인데 그 모친의 행태가 한국인들의 그것과 닮은 데가 많아서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먼저 위대해야 자식들이 출세하거나 위대해지는 법인지 말이죠.
그런데 이런 메리토크라시(물론 메리토크라시라고 해서 무조건 부모의 열성 교육을 전제로 삼는 건 아니겠지만요)를 두고,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면서 경계의 시선을 보내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책의 저자가 그러합니다. 최근 저는 수학 신규 교육과정에 AI수학을 편입하는 문제를 두고, 일부 시민단체에서 어려운 내용은 안 된다, 지필고사 위주는 안 된다, 실습 위주라야 한다며 강력한 제동을 걸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이 이슈 한정은 아니고 대체로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수월성 위주의 교육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사교육을 뿌리뽑고 공교육을 정상화한다, 시민 간 연대 의식 고취가 중요하다 등의 명분이 있으나 사실 그 외에 다른 근본적인 이유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며, 훈장 등의 영전은... 어떠한 특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이게 건국 이래로 계속 이어진 우리 헌법의 전문 또는 본문 등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기회만 균등하면 불평등 문제는 해결될 줄 알았는데, 해결되기는 고사하고 소득 불균등 문제는 오히려 지금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가장 심각하다고도 합니다. 저자 대니얼 마코비츠 역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천재형 학자이며 의심할 여지 없는 엘리트 출신입니다(책 날개에 나오는 문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로 심각해지는 불평등 문제의 진짜 원인이 따로 있으며, 그게 바로 메리토크라시라고 지적합니다. 메리토크라시야말로 사회적 부조리를 타파하는 지름길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폐단의 주범이라니 진정 충격입니다.
"능력주의 직업 문화는 육체에는 만족을 줄지 모르지만 정신에는 타격을 준다."(p110)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조직 안에서 인정 받고 성과 내고 승진 빨리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하면, 몸이 좀 축날 수는 있어도 마음은 진정 뿌듯한데, 정반대로 저자가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저자는, 몸과 마음이 힘든 건 육체노동의 장(場)뿐 아니라 아마존의 사무실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아마존의 사무실이 아니라 물류창고로 잘못 읽었을 정도입니다.
그 이유인즉슨, "서로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어색하거나 민망한 느낌이 들어도 (다른 동료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라" 같은 윗선에서의 주문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풍조를 가리켜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라고도 하네요. 하긴 그렇습니다. 생전에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명문대 출신 신입사원들을 불러 놓고 한강 백사장에서 씨름을 시킨다거나,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 큰 소리로 판촉을 시킨다거나 하는 훈련을 시켰다고 합니다. 샌님 같은 기질을 뜯어고치고 참된 조직인이 되려면 이런 방법밖에 없다는 거죠.
저자의 결론은, 이런 무자비한 풍조 하에서 "거의 모든 동료가 자기 자리에서 흐느끼는 모습"을 보는 걸로 끝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게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희한한 풍토가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기업 아마존의 풍속도 중 하나라는 거죠. 확실히, 이렇게 해야만 조직이 발전하고, 경쟁의 장에서 전리품을 취하고, 조직원들과 주주들에게 줄 셰어가 늘어난다면, 이 회사, 나아가 이런 경쟁의 구조가 앞으로 얼마나 지속가능하겠냐는 겁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이고, 그에 따른 (예측 가능한) 해답 도출의 입구이겠습니다.
저자는 예일 대학 로스쿨의 예도 듭니다. 이 학교는 원래 동문의 자녀에게 가산점을 주는 등의 입학 관행으로 유명하죠(이 학교뿐 아니라 아이비리그 어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스탠포드라든가). 학교 순위를 높이려면 능력주의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고, 그래서 최근에 이곳은 저 관행을 폐지했다고 합니다(p6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격생의 출신 성분을 조사하면 상위 1% 출신이 훨씬 많아졌다고 합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에 더욱 심화된 경제적 불평등의 원인을 조사하면 더욱 놀라운 결과가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자본이 노동의 소득 지분을 빼앗아간다고 여기지만(p69), 최근의 추세는 노동 내 소득 이전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할 수 있는데, 책에서 예로 드는 건 대기업 CEO와 생산직의 급여 격차입니다. 전문의와 간호사의 급여 격차는, 종전의 4배에서 현재 7배로 벌어졌다고 합니다. 70년 전에 20배이던 것이, 현재는 300배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대비율이므로 절대금액을 고려한 인플레이션과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물론 인플레까지 감안하면 생산직 노동자가 받는 고통은 훨씬 클 것입니다). 과거 마르크스 등은 자본 섹터가 노동 섹터로부터 빼앗아가는 현상과 기제만 분석하고 비판했지만, 이제는 노동 섹터 안에서 더 심각한 이전(移轉)이 벌어지는 겁니다.
사실 독자인 저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런 격차가 생긴 원인은 어쩌면 각 직군의 생산성과 기여도의 차이가 그만큼 세밀하게 측정 가능해졌고, 관리직의 난도는 그대로이거나 더 늘어난 반면, 단순노무직의 경우 자동화시스템에 의해 대체되거나(앞으로 강한 의미의 AI가 산업에 전면 도입되면 모를까, 의사결정, 관리직은 그 대체가 힘듭니다) 해외이주노동자들과의 경쟁(자유무역협정 등)에 직면하게 된 부분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간호사가 노무직이라는 건 절대 아니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고요. 여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능력주의 관철이 만능이 아니다, 능력주의가 불평등의 결과적 심화라는 역작용을 분명 낳기도 한다는 쪽이며, 이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별로 없을 줄 압니다.
더 심각한 건 이른바 인간소외 현상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아마존 사 내에서 그 나름 주변의 부러움을 받고 일류 회사에 입사한 엘리트 사원들이, 일과가 끝나고 나서 자기 모멸감을 달랠 길 없어 책상 앞에서 눈물 짓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직장은 물론 급여를 받기 위해서 다니지만, 그 외에도 자아실현이라는 고차원 욕구의 충족에도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존엄도 유지 못하며 무너진다는 게 어디 말이 되겠습니까. 엘리트 사무직이 이 정도이면 생산직의 사정이야 미루어 짐작이 되죠. 이런 사회에서 구성원의 행복과 만족이란 달성되기 어렵겠고 말입니다.
"악의적인 토착주의는 어김없이 그 같은 패턴(가장 억압받는 이들, 혹은 소수자 집단에게서 체제에 대한 정당한 항의 수단을 뺏어가는 패턴)이며, 능력주의의 이방인 선호로 말미암아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을 사로잡는다.(p142)" 참 표현의 맛이 기가 막힐 뿐더러, 사실 지난 4년 동안 미국에서 트럼프라는 이단아적 정치인이 그토록 환영받았던 비결을 정확하게도 짚은 문장입니다(다음 페이지에 바로, 포퓰리즘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당신이 그런 처지인 건 어디까지나 본인 능력과 노력이 부족해서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는 간단한 설명, 아니 강요가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뭐 이 역시 부분적으로는 강력한 진실임에 틀림 없습니다. "능력주의의 이방인 선호!" 캬. 이 한 구절이 왜 그토록 대학교재(이름난 대학일수록 더)의 저자 이름이 그토록 발음하기가 어려운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존 스미스 같은 이름이 원서에 새겨진 걸 혹 본 적 있습니까? ㅋ 한편으로, 그래서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미국에 가서 놀아야 하는 겁니다. 머리만 좋고 자기 분야 실력만 확실하면 열렬히 환영해 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능력주의 만능의 사고가 자동으로 정당성을 얻는 건 물론 아니겠고요.
"부유한 가정 출신 고교 졸업생을 명문대에 확실히 보낼 방법은 없다. 그러기에는 부유한 가정이 너무 많고 명문대의 숫자가 너무 적다.(p249)" 이것은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목동 같은 중간층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입시 교육 경쟁이 그토록 치열하게 이뤄지는 것이며, 이들이 정시위주 정책을 열렬히 지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부유한 부모에게 태어나는 게 대학 졸업의 충분조건이며, 엘리트 대학 졸업의 필요조건인 것이다.(p251)"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정확하게(적어도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려는 데 정확하게) 쓰였는지를 보십시오. 또 그냥 대학과 엘리트 대학이란 범주가 얼마나 차별적이면서도 저자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게끔 사용되었는지를 보십시오. 이 저자의 결론에 동의하건 아니건 간에 이런 서술 스타일은 경탄을 자아냅니다. 사실 이런 정책적 제안과 단정은, 몇 가지 소수의 반례만으로 쉽게 뒤집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 기업은 경영인 없이 굴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300)" 제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경영인의 역할이 달라지고, 하위 성원에 비해 기여도와 생산성이 높아지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게 누가 자의로 획정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시장의 법칙에 의한 것이니 말입니다. 또 19세기의 중역의 주요 역할은 조직의 관리 감독이 아니라 자금 조달에 가까워 마치 오늘날의 벤처 캐피탈과 유사했다는 진단도 소름끼칠 만큼 정확합니다. 결론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기보다 이렇게 사회현상을 보는 뷰의 레인지, 혹은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의 우아함과 치밀성에서 천재의 재능이 증명되는 듯합니다.
"20세기 중반의 엘리트는, 다른 계층과 차별화할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단이 많지 않았다(p344)." 그래서 디자인도 모더니즘, 간소한 맛을 더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엘리트와 중산층 (중간층이 아닌)사이에 명확한 단층선이 존재(p348)한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며 아마 동시대인 다수가 공감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에 불필요한 과시적 향락 산업이 더욱 발달하며, 그 결과는 구태여 번잡한 말로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예전이라고 무조건 빈부의 격차가 적었다는 게 아니고, 19세기 제2차 산업혁명이 진행할 당시 미국의 신흥 부유층(졸부)의 타락한 소비상은 베블렌의 저서 <유한계급론>에도 잘 나옵니다. 이 책에도 베블렌의 문장과 업적이 언급됩니다. 아마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제2의 베블렌을 자처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블렌 역시 당대 부유층 사이에서 인기 있던(?) 지성인이었으니 말입니다
과거에는 부유층과 지배 계급이 게으른 빈곤층을 닦달했다면, 현재는 그 반대입니다. 엘리트층은 경쟁 때문에 숨 쉴 수도 없을 만큼 어떤 강박에 시달리며, 하위 계층은 갈수록 부족해지는 일자리 때문에 본의 아니게 게으름에 내몰립니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강요이지요. 대출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으며, 우리나 일본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급전 대출 업체가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p373). 소득의 불균등이 심해지니 주제 못할 돈을 어떻게든 굴려야 하겠으며, 반대로 하위 계층은 어디서건 돈을 빌려야 생계가 유지되겠으니 말이죠. 이러니 어떤 정치인이 거론한 "보편적 대출권"도 한편으로 수긍이 가는 겁니다. p401에는 대출을 증권화한 채권이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인 분야 중 하나라고 나오며, 다른 이야기 할 필요 없이 2008년 대위기를 불러온 (파산한) 페니매이 같은 게 다 이런 부류였습니다.
메리토크라시는 원래 사회학자 마이클 영에 의해 "비판적, 풍자적" 의도로 고안된 용어(p435)이며, 그래서 메리토크라시의 어떤 "메리트"를 논한다는 건 역사적으로 역설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어떤 시스템을 비판할 때는 그에 대한 대안이 반드시 제시되어야 하며, 무작정 감정적으로 마음에 안 든다고 부분적 폐단을 일반화하는 건 매우 미성숙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경제정책도 케인지언과 클래시컬을 병용해야 하듯, 사회의 자원과 성과 배분도 무작정 능력주의에 의존해서는 (어떤 시각으로 보더라도) 파멸만 부를 뿐입니다. 온정과 인도주의, 연대의식 같은 것이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거버넌스 요소로 작용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기업도 ESG를 강조하는 거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