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0 - 소유의 문법
최윤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20년 9월
평점 :
품절


아마도 우리 역시 폐쇄된 사회에서 왜곡된 가치관을 주입 받고 자라나면 별다를 바가 없지 싶습니다. 책 제목을 보십시오. "어젯날 철전지원수의 땅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물론 여기서 철천지원수의 땅이란 대한민국, 혹은 미국을 가리키겠습니다. 대한민국은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세워 미국에 의해 조종되는 나라이며, 미국은 조국 통일을 방해하고 결정적인 순간 전쟁에 참여하여(그를 넘어, 아예 "일으켜") 수많은 동포를 학살한 원수이다... 뭐 이 정도가 평균적인 북한 주민들의 세계관이고 공감대이겠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도(놀랍지만) 이런 생각에 경도되거나 동조하는 이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튼, 이 책의 저자들은 한때 철천지원수로 여겨왔던 땅에서 의외로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맛보고 완전히 다른 눈이 열리는 감격스런 체험을 한 탈북인들입니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 이름이 익은 이들도 있습니다.

책 처음에는 주성하씨의 글이 나오는데 동아일보에서 14년간 국제부 기자를 지냈다는 말이 있네요. 이분은 텍사스에 체류했고 20세기 초에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던 갤버스턴이 허리케인에 의해 박살난 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사실 미국도 여러 유명한 도시들이 있지만 그들의 전성기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양상으로 연명하는 곳이 많고 지금 눈으로 보면 "왜 이런 데가 그렇게 유명하며, 심지어 연고 야구단까지 있지?" 싶은 곳이 많습니다.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지난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현재의 모습뿐 아니라 지난 내력에까지 관심을 두려 하는 그 지적인 자세가 돋보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필자는 축구팬인지 해외 체류 당시 "한국 사이트에서 축구를 볼 수 없는 점이 가장 불편했다"는 말을 합니다.

"왜 그리도 큰 재난을 당한 곳에서 콘크리트 아닌 나무로 시설을 세웠지?" 아마 이에는 여러 답이 가능하겠습니다. 첫째 미국은 정부 주도가 아닌(중국 등과는 달리) 개인이 비즈니스이든 뭐든 이끄는 곳이므로, 그 개인이 "이곳의 사업성이나 영속성은 이 정도다" 싶어 그 계산에 맞게 건물이든 뭐든을 세우는 것입니다. 영토가 광활하고 무엇이든 개인 책임으로 시작하니 이 점에서는 한국이 더 나은 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허리케인의 진로가 항상 일정한 건 아니니, 멕시코 만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넓은 곳이라, 다음에도 이 진로를 택한다는 법은 당연 없죠. 반면 한국은 태풍이든 폭우든 상습 침수지가 따로 있습니다.

텍사스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우리는 해외 자원 거래시에 원유 상품 표준 중 하나를 WTI라 부르며 자주 참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I의 원어 intermediate가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모르고서는 온갖 말도 안되는 억측이나 잘못된 정보를 늘어놓는 곳들뿐입니다. 예전에는 이를 "중질유"로 번역했는데 해당 상품은 중질유 아닌 경질유이며 중질유는 표준적 거래 상품이 아예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이트에는 정제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하는데 사전을 찾아 보면 그런 뜻이 있기는 하지만 저 상품은 분명 "원유"이지 정제유가 절대 아닙니다. 이 서평에 적지는 않겠으나 왜 intermediate가 붙었는지를 이해하려면 텍사스, 나아가 남부 일대에 과거 번성했던 중간재 시장이나 거래소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번영했던 시장은 현재 그 흔적만 남았거나 아예 없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밀수꾼들은 북한이 어떤 곳인지 다 알아요. 서로 '김정은 저 XX' 같은 말도 하곤 해요." 하다못해 밀수꾼들도 바깥 세상을 접해 본 체험을 통해 무엇이 실상에 가까운지를 (멀쩡한 사람들보다) 더 잘 아는 것입니다. 견식이 넓고 바깥 체험을 해 봤는지의 여부가 이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일본에는 "시골 벽지에서 쉬지 않고 일하느니 차라리 에도에 가서 낮잠을 자라"는 속담이 있다고 하죠. 그런데 북한 밀수꾼들도 아는 진실을 한국 같은 개명천지에서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이들이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게 어쩌면 더 놀라운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세뇌를 받아 오류와 무지에 빠진 건 뭐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그러려니 합니다만.

주성하 기자의 여기 글에는 계속 "의성이"가 등장하는데 물론 공저자 조의성씨를 가리키는 말이겠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저는 예전 미국 액션 스릴러 <에일리언 2>가 떠올랐는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 여성 리플리는 본인 코가 석 자이면서도 어린 소녀 뉴트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쓰며 결국 구해 냅니다(만 이후 3편 시작에는 죽은 걸로 나오며 이는 속편 감독의 구제불능 비관주의 세계관이 한몫했죠). 자유의 소중함은 나 개인의 생존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떤 "기치"의 상징적인 귀환도 거들어야 그 느낌이 더 절실해지는데 이 책에서도 조의성씨의 존재가 자유의 소중함을 독자에게 더 절감케 합니다.

"사실 부모와 나라는 선택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출신지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 같아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물론 북한은 일단 우리의 대화 상대로 인정이 되고 시작해야겠습니다만, 권력을 휘두르는 김정은의 온갖 만행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그런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우리 민주주의 체제를 찾아온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멸시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은, 혹 자신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이들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탈북인 전체를 두고 "배신자"라고 하던데, 그런 사람들은 혹 "김정은에 대한 충성, 신의"를 중시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에 대해서는 "혐오, 차별"을 지양하라면서, 반대로 탈북민에 대해서는 비열한 모욕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중 잣대도 어디 이만한 게 또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반공주의니 냉전시대 사고니를 들먹이는데, 그런 건 모르겠고 비판의 초점은 자신이 다스리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김정은의 폭압과 독재에 놓인 겁니다. 히틀러니 박정희니 전두환이니에 대해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 아닙니까? 왜 김정은만 여기서 예외가 되어야 합니까?

요즘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산불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가 봅니다. 이 책에서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자연 피해가 잠시 언급되는데, 저자들은 "산불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멀쩡한 팩트를 놓고도 기막힌 왜곡을 일삼거나, 자신의 이익에 맞춰 교묘히 비트는 못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자분들은 인생에서 극적인 체험과 모진 고생을 한 분들이기에 아마 우리들보다 더 그런 악종들을 더 많이 마주쳤을 듯합니다. 이런 인간들을 두고 무슨 용서니 뭐니 한가한 개념을 적용하는 건, 마치 김정은의 신년사처럼이나 무의미한 시도일 것 같네요.

한국은 영어 공부를 하기에 참 편안한 환경입니다. 원어민의 발음이나 감성에 노출될 기회가 많고, 그런 시도를 하는 데에 무슨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지도 않는, 그야말로 천혜의 환경입니다. 환경은 이렇게 좋은데 정작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그에 비해서는 드문, 참 이상한 실태이기도 합니다. 2부에서 시작되는 조의성씨의 회고담은,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젊은 분의 이야기라서 더욱 공감이 잘 됩니다. 아무리 우리 중에 불리한 여건인 이들이 있다고 해도, 아무려면 탈북민보다 불리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책의 2부를 읽고 사람이 진정으로 배움에 뜻을 두면 불가능할 게 없겠다 싶었습니다. 영어 공부는 둘째치고, 이제는 미국 여행을 간다고 해도 아마 그 풍광과 현상이 다른 눈으로 보이지 싶었습니다. 자유란 그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며, 의식주만 해결된다고 만족하는 건 개돼지나 다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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