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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서양미술 ㅣ 인문여행 시리즈 14
샤를 블랑 지음, 정철 옮김, 하진희 감수 / 인문산책 / 2020년 8월
평점 :
미술, 혹은 어떤 분야이건, 기존에 어떤 성과가 이뤄졌으며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켜 왔고, 어떤 기법으로 예술가가 자신의 영혼, 의도를 담아내는지에 대한 "언어적 설명" 같은 게 필요합니다. 일류 예술가의 솜씨까지는 당연히 몰라도, 어떤 감식안(eye for beauty) 같은 것이나마 모두가 갖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타고난 눈이 없다면, 그걸 갖춘 사람한테 말로나마 설명을 들어야 일류들(과 그들의 작품)에게 최소한의 공감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그 공감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려 구상의 형태로 남긴 그 의지와 성취를 엿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도 조금이나마 그 비슷한 사람이 될 수 있겠으니.
"전통적이고 억지로 꾸민 듯한 회화에서 자유롭고 활기찬 회화로 변해가는 것을 우리는 바티칸의 '서명의 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p64)" 이 구절을 읽으며 저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서유럽 기사들의 자유로운 놀이 문화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는 역사서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어떤 문화, 문명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아니고의 한 기준은, 그 문명권에 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활기차게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예전에 시진핑도 <태양의 후예>를 보고 "왜 이런 작품이 중국에서는 안 나오냐"며 탄식했다고 하죠. 어떤 드라마 같은 게 무슨 미켈란젤로의 작품처럼 위대한 가치를 지녔다는 게 아니라,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이미 사육되는 동물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게 저의 의도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자유롭기만 해서 예술의 성취가 완료되는 건 아닙니다. 피카소는 "나는 소년 시절부터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자유니 파격이니 하는 것도 기존의 전통이 성취하고 집약한 모든 기법을 달통한 후에야 의미를 가집니다. 첵에서도 "라파엘로의 <디푸스타>의 경우 초창기 회화의 엄격한 규칙을 그대로 따랐다"고 서술합니다. 그래야 "그 반대편에 있는" <아테나 학당>의 창조적인 시도와 결과가 비로소 빛이 (더) 나는 거죠.
천재들은 구태여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심심상인처럼 눈빛만으로 서로 통하는 어떤 경지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말로 설명을 해 줘야 궁극의 경지에 대해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죠. 샤를 블랑은 우리가 잘 알듯 19세기 노동 관련 사상가로 평가되는 루이 블랑의 동생인데, 이 책 서문에도 나오듯 당시 부르조아 계층에 미술을 감상하는 관점과 취향의 어떤 표준을 제시한 게 바로 이 저자입니다.
이 책은 당시 부르주아적 미술관의 집약과 표준을 담았지만, 사실 지금의 우리가 읽어도 별 거부감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니 부르주아 아닌, 그들이 혁명을 통해 타도했던 귀족의 패러다임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명작이라 이해하는 거의 모든 예술가의 명작들이 그런 관점에 대부분 기초하여 창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혹 그런 고전으로부터 그렇지 않은 점을 찾아내는 혜안을 갖췄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일류 평론가(혹은 예술가)이겠고 말입니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샤를 블랑의 이 책을 탐독하고 이전 시대와 동시대 예술의 정수를 더 잘 이해했다고 하는데, 그 점을 방증이라도 하듯 책에는 저자의 자부심 담긴 구절이 여럿 있습니다. "뒤러, 쿠쟁, 비뇰의 저서 들은 이미 알려진 것 이상의 내용은 담고 있지 못하다(p86)" 같은 말이 그렇습니다. 이 바로 앞 구절에 보면 "가스파르 몽주가 기초를 놓은 도형기하학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원근법에 대한.."이란 말이 있는데, 수학사를 공부한 이들은 알겠지만 수학자 가스파르 몽주는 기하학 외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천재였죠. 이책 출판보다 훨씬 뒤에 창작된 달리의 한 작품은, 십자가를 4차원으로 해석한 결과를 화폭에 멋지게 담아내었습니다. 천재들이기에 전혀 다른 학문의 성과를 끌어와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말로 설명되는 희극 배우의 무언극(無言劇)은 눈으로만 말을 하는 화가의 무언극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p129)." 사실 우리들 관객은 매우 멍청하기에, 저자의 말마따나 과장된 몸짓 아니면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든, 정확하게 표현하면서도 강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고충, 즉 완전하고 흠결 없는 표현을 하면서도 동시대 (멍청한) 관객과 소통도 해야 하는 고충을 잘 집약한 것입니다. 반면, 미술가는 그렇게, 즉 정확하면서도 "강하게" 표현한다는 게 어렵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배우와 화가의 공통점은, 둘 다 희극에 가까울수록 개별적인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왜 시정(詩情) 그 자체의 원천으로 거슬러올라가지 않고 그 해석에 연연하는가?" 사실 저자의 이 말은, 명작을 보고도 명작인 줄을 몰라서 이런 책(물론 명저입니다만)에 의존을 해야 하는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명언입니다. "보여 주는 장면이 고상해지고 훌륭하게 된다면, 스타일은 (저절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p303)" 이 말 역시, 화가 같은 창조자뿐 아니라 우리 어리석은 관객들도, 마음 속에 아름다움과 품위에 대한 바른 눈이 생긴다면, 구태여 이론서를 통해 어떤 기법상의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작품 자체를 보고 온전히 감탄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이 아닌 손가락만 보고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