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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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사람은 죽고 나서 심판의 자리에 선다는 게 동서양 불문하고 거의 공통된 상상의 지점입니다. 물론 죽어 보고 나서 귀환한 사람이 없기에 정확한 실상은 알 수 없지만, 주어진 생을 열심히, 보람되게 사는 게 인간의 도리이며 생각이 그에 미치지 못 하면 사람 값어치를 못함이나 다름 없다는 판단이, 문명권을 가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보이는 결과가 좀 신기하기도 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 작품은 희곡인데, 옮긴이의 권말 해설을 보면 "첫 희곡 <인간>은 전통적인 형식을 좇지 않아 소설로도 읽혔다"고 합니다. 이 작품도 지문이 그리 많지 않아 아주 전통적인 희곡 형식이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신, 대화 위주로 구성되었기에 독자가 읽기에는 편합니다. 지문도 거의 없고 배경 설명이 적기에, 이런 형식은 정말 저승의 심판장에서 극히 제한된 이동만으로 이뤄지는 이야기에 적합한 듯합니다.

일제 강점기 소설가인 김동인의 단편 중에 <명문>이라는 게 있는데, 진실된 기독교 신앙을 갖고 평생을 살다 마침내 사후세계의 주재자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만 그 심리가 아주 부조리하고 부당합니다. 항의하는 주인공에게 재판장은 "하하, 여기도 그저 법정일 뿐이다!"라며 비웃습니다. 명감독 리들리 스콧의 다소 속물스런 영화 <프로메테우스>를 보면 "피조물보다 열등한 조물주"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지금 베르베르의 이 희곡에도 "사려깊지 못하고 그저 직업적 관성으로 피고인들을 다루는" 저세상 법조인들이 등장하는데, 정말 이런 사람들이 영혼을 다룬다면 이 생을 열심히 사는 우리들의 두 어깨에서 맥이 쫙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도 이들 역시 어떤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어서, 이승으로 환생하기도 하고(안 하려 드는 게 보통이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진짜 신의 존재를 의식하는가 봅니다. 그저 "의식"할 뿐 확신하는 게 전혀 아니어서, 세상의 궁극적 이치에 대해 무지한 건 우리 물질계의 인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베르베르의 요 직전 작품 <기억>에도 환생, 윤회의 테마가 다뤄졌더랬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억>에서는 환생만 소재로 쓰였으며, 이 작품에서처럼 무슨 죗값이라든가 업보(業報), 카르마 같은 것은 언급되지 않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지상에서 예컨대 주인공 아나톨 피숑 같은 이가 재판장으로서 함부로 피고인들을 저승으로 보내든가 하면, 그 남겨진 업보가 이승의 일, 개별 영혼의 행로를 어지간히 꼬이게 한다는 식의 설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숑 씨가 (동종 업계에 종사함에도 불구하고) 저승의 법정에서 유난히 푸대접을 받는 겁니다. 일을 똑바로 안했다는 거죠.

재판장 가브리엘은 이런 이유, 즉 일을 슬로피하게 진행했다는 이유로 피숑 씨를 갈굽니다(그러니 동종 직종인으로서 무능자에 대한 경멸감, 견책 같은 게 작용했습니다)만, 검사 베르트랑은 좀 다른 이유에서 피숑 씨를 부당하게 취급합니다. 저승의 법정에서 마땅히 취급되어야 할 사안인 듯은 하지만, 피숑 씨가 인성과 감수성, 공감 능력, 정직성 따위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그를 몰아세웁니다. 주어진 진짜 재능을 발휘하지 않고 속물스럽게 판사직을 택한 것도 죄목 중 하나라는군요. 제 갈 길을 갔다면 제라르 드파르듀 같은 배우를 능가했겠다는데, 작품 후반부에는 유언을 분명히하고 오겠다는 피숑 씨는 "국세청한테 사기친다"는 부당한 비판도 듣습니다. 근데 자칭 진보파인 드파르듀도 탈세 비슷한 짓을 저질러 큰 비난을 받았죠.ㅎ

베르트랑이 유독 이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카롤린을 짝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변호인 카롤린은 피숑 씨의 생애 내내 그의 수호천사였습니다. 그러니 마치 영화 <토탈 리콜(1990)>에서 마이클 아이언사이드가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미워하는 것처럼(ㅋ) 피숑 씨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겠죠? 존경 받는 법관이었던(과연?) 피숑을 함부로 "아나톨"이라 이름을 부르고(친하지도 않으면서), 그를 "자기중심적이고 단선적으로 세계를 보는 멍청이들"의 범주에 함부로 집어 넣습니다. 물론 피숑 씨가 실제로 그런 멍청이였을 수도 있으나, 제 생각에는 뺀질뺀질하고 이기적인 속물이었을망정 멍청이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멍청이의 정의가 대단히 자의적이긴 합니다만, 70페이지가 지나도록 아나톨 피숑은 자신이 죽은 사실을 못 깨닫습니다. 우리 독자들은 두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벌써 눈치를 다 채었는데도 말입니다. 판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 멍청이라면 다른 시민들이 참 피곤하고 불안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피숑 씨가 다소 이기적인 건 맞지만(출세를 위해, 또 충동적인 기분에 의해 첫사랑을 버림), 멍청했으면 과연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갔겠습니까? 그가 아주 늦게 사실을 깨달은 건, 생에 대한 집착이 그만큼 강했고, 속물적으로 선택한 삶의 경로가 일단 정해진 후에는 하나하나의 처분에 매우 집요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는 그가 자신의 생을 그만큼 사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자신이 죽었다는 현실을 깨달은 후에는 그의 판단이 매우 빨라집니다. "생이 감옥이었으니 차라리 여기 머물겠다"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정말로 멍청한 이승의 장삼이사들에게선 이런 말도 안 나옵니다. 항소하는 권리가 없는 법정이 어디 있냐며 지금 절차를 만들라는 정당한 항변도 합니다. 가브리엘도 명색이 판사인데 이런 말에 귀를 닫을 수 없습니다. 카롤린은 "그의 영혼은 아직 어리다(p87)"는 말도 하는데 이게 철이 덜 들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나이에 비해 아직 열기가 죽지 않은 순수함에 대한 지적일 수도 있습니다.

(내용 누설에 주의하십시오)
아나톨 피숑은 막판에 마음을 바꿉니다. 그러자 재판관인 가브리엘이 이번에는 자신이 환생하여 아무개 씨의 아기로 태어나겠다고 자원합니다. 그 자리는 (아마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우리 독자들이 선입견[베르트랑 때문에 생긴]을 지우고 보면 그럭저럭 좋은 법관이었을 듯한) 아나톨 피숑 씨가 대신해도 될 듯합니다. 이 역시, 한 번 정도는 생을 살아 보고 더 좋은 법관이 되고 싶었던 가브리엘의 회심이라지만, 피숑 씨의 태도로부터 약간은 영향을 받은 게 아니었을까요?

가브리엘은 아마, 지상의 삶으로부터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다 보니 지리 감각을 잊은 듯합니다. ㅎㅎ 작품 중에는 "티롤 근처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어느 나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티롤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자리한 지방입니다. 여기에서 스칸디나비아는 멀고도 멀죠. "너를 죽게 하지 못한 건, 다 너를 강하게 만든 것이다"라는 말은 얼마 전 출간되었던 <기억> 중에서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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