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무것도 아닌 기분 -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나를 찾아온 문장들
이현경 지음 / 니들북 / 2020년 7월
평점 :
아나운서란 참 화려한 직업 같은데 그런 직종에서도 여러 가지 애환이 있나 봅니다. 하긴 사람 사는 모습이 어딘들 비슷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죠. 이 책은 우리가 SBS, 특히 피겨 스케이팅 중계 할 때 그 낭랑한 목소리를 익히 들어 온 이현경 아나운서의 솔직한 고백이 담긴 책인데, 읽으면서 뭔가 뜨끔해지는 대목도 있고 인생을 깊이 성찰하는 계기도 던져 주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게 너의 한계야." 사람이 직장이나 혹은 어떤 조직이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일관성, 규칙성, 성실성인데, 때로는 이게 "한계"로 지적 받을 수도 있나 봅니다. "의외성"이란 게 있어야 재미가 있다는 말씀은 물론 옳으나, 재미가 또 다는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피겨로 바로 연결시켜서 연기의 레귤러함과 파격의 미, 이쪽으로 화제를 옮기는 게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재주는 그것도 흔한(?) 규칙성의 일부일까요, 아님 어떤 깨달음의 효과일까요?
누구든 익숙한 루틴에만 빠져 있으면 지겹기도 하고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그 익숙함을 못 견뎌하는 게 보통인데, 저자는 그런 루틴 속에서 자신만의 무엇을 찾아내는 데에 특별한 의미를 두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건 사람마다 다 성향, 가치 부여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데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은 결국 그 길로 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또 그 사람이 어떤 직종에 종사하는지에 따라서도 다른 결론이 나올 듯합니다. 루틴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직종도 있을 겁니다. 아닌 직업이 훨씬 많겠지만.
"그러다 보면 나만의 춤사위를 인정 받는 때가 온다.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내가 나만 믿어 준다면" (p51)
사실 꼭 어떤 위인이 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어떤 업적을 후세에 남기지 않더라도, 나와 내 주변의 지인들이 알아 주는 사람이 된다면, 또 무엇보다 내 자신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만 되어도, 그래서 죽음의 자리에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만 있어도 그 사람이 인생의 승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 누구보다 자신이 정확히 평가하고 있으므로, 내가 내 자신의 마음에 든다면 그게 최고의 성취 아닐지요.
우울증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별 이유 없이 찾아와서 끈덕지게 사람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저자님의 경우 부친상을 당하고, 또 얼마 안 되어 세월호 사건이 터져 더욱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합니다. 확실히 세월호 사건은 많은 국민들을 힘들게 만든 사건이고, 이런 사건이 개인적 불행에 덧이어 일어났으니 얼마나 힘드셨을지 쉬이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기억하는 한 떠나지 않는다(p69)." 이런 인디언 속담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는데, 기억을 곱게 다듬어야 남은 사람들 마음에 상처가 안 남을 듯도 합니다. 돌아가신 분들보다 더 힘든 건 언제나 남은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예전에, 하드 렌즈에 대해 어떤 전문가께서 (제 기억으로는 다른 방송도 아니고 바로 SBS에 나와) 하드렌즈가 당장은 불편해도 눈 건강에는 더 좋다며 홍보하시는 걸 본 적 있는데 저자께서도 혹시 자사 방송을 보고 결정하신 건 아니었는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책에 나오는 대로 유난히 뭐가 안 맞는 체질이 있기 마련입니다(그저 심리적 불편함일 수도 있지만). "뭐 다 지난 이야기다.(p82)"라며 아쉬운 커리어 구축의 챈스를 놓친 시기를 담담히 회고하는 데서 일종의 달관이 느껴지기도 했네요.
세상에 운이 따라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멘토 노릇을 잘해 주셨으니 직분 중 중요한 몫을 잘해 낸 셈이라 누군가가 "잘했다"며 토닥여 줄 만도 한데, 그런 사람이 곁에 없어 아쉬움이 더 컸던 것 아니었을까 제 멋대로 짐작해 봤습니다. 운 좋은 사람을 운 계속 좋게 이끌어 주는 그 사람이 바로 더 큰 실력을 갖춘 사람 아닐지요. 그런 사람이 곁에 있기에 운 좋은 사람더러 운 좋다고들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탕수육을 먹고 싶은 사람은 탕수육을 먹고, <트랜스포머>를 감명 깊게(?) 본 사람은 그 감명을 유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조직 문화가 개인의 취향을 강요하는 부분이 있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특정 직종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일반, 혹은 국외자들의 선입견이 개인의 영역을 침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처음 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긴 평범한 시청자인 저부터도 아나운서가 안경 끼는 문제, 취향이 어떻다는 문제에 대해 일정한 편견을 갖고 있으니 뭐. 이것도 일종의 폭력, 혹은 이기주의가 아닐지요.
"어떻게 하든지 꾸역꾸역, 지속하면 어떻게라도 하겠지(p165)."
우공이산이란 말이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힘든 건 남들 눈에 띄고, 어떻게든 튀고 이런 게 아니라, 한결 같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유지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책 제목은 "아무것도 아닌 기분"이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항상 그 자리에 한결 같은 퍼포먼스로 머물러 있는 그 역량이 위대해 보입니다. 2진이라는 겸손함 속에 사실은 은근한 플렉스가 숨은 건 아닐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