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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 기술, 일본 소부장의 비밀 - 왜 지금 기술을 중시하는 일본 기업에 주목하는가?
정혁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8월
평점 :
소부장은 소재, 부품, 장비를 가리키는 약어(略語)입니다. 한국 역시 이제는 오랜 동안 제조업 강국의 위상을 지켜 왔으므로 소부장 강국 중의 하나입니다만, 그래도 아직은 일본의 저력과 깊이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작년 여름 일본이 불화수소 금수를 단행함에 따라 급속히 소부장의 국산화를 도모했으며, 지금은 놀랍게도 상당 부분에서 성과를 크게 내는 상황입니다. 일부 몰지각한 층에서나 비관적인 시각을 노출했을 뿐이며, 불필요하게 자국 비하에 나섰던 이들은 현 시점에서 달성된 가시적 성과를 보고 크게 반성할 일이겠습니다. 천성이 무지한 데다 체계적 사고를 할 능력이 없으면, 감정에 기반한 폭주를 하다가 망신이나 당하기 마련이죠. 불화수소가 뭔지나 어디 알겠습니까?
아무튼 일본에는 여전히 강한 기업이 많고, 그 중 상당수는 소부장 섹터에서 특유의 저력을 발휘하는 중입니다. 이제는 일본을 총제적 롤 모델로 삼고 맹종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럴수록 겸허히 남의 장점을 배워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강자로 거듭날 수 있는 길입니다. 지금 증권시장에서는 제약바이오뿐 아니라 5G, 2차 전지 등에서 큰 랠리가 일어나는데, 이 섹터 모두에서 소부장은 매우 중요하며 눈 밝은 투자자들에 의해 주가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일본 기업의 장점까지 겸한다면 이런 기업들(의 주식)은 앞으로 더욱 성장주로서 각광 받을 것입니다.
나가시노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 막강했던 다케다 가문의 전력을 격멸했던 역사적 전투인데, 여기서 저자는 신상목의 책을 재인용하여 그 혁신의 정신을 지적합니다. 또 이후 덕천막부가 천하를 재통일한 후, 다소 이상하게 들리는 "쇄국 정책과 서양 문물 수입의 병용"을 정책으로 채택하는데, 여기에도 일본 특유의 실용주의가 드러납니다. 인공섬 같은 건 1990년대 부산에서도 추진하려다 만 적이 있는데, 에도 막부는 17세기에 이미 데지마라는 인공 섬 건설을 나가사키 상인들에게 발주한 바 있습니다.
본래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도모할 때는 프랑스를 모델로 삼았으며 근대 민법전 제정 작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프랑스가 크게 패하고 바야흐로 독일 제국이 창립되자 일본도 시선을 돌려 독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빛나는 과학 발전상이라든가, 다른 나라가 좀처럼 따라올 수 없는 공학 부문의 선진상은 일본에 강한 인상을 주었을 터이며, 이후 유카와 히데키 교수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에사키 레오나, 이후 다나카 고이치 등의 수상은 일본 과학과 기술의 놀라운 성취를 증명합니다. 특히 마지막 분은 학벌도 경력도 두드러질 게 없는 회사원 출신이라서 더욱 놀라웠죠. 저자는 이에 대해 "신기술 연구를 지원하는 기업 문화"의 소산이라고 지적합니다.
요시노 아키라 씨는 리튬이온 전지의 개발로 노벨상을 받은 엔지니어입니다. 지금은 리튬이온 전지가 안 쓰이는 데가 없다시피하지만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최신형 PCS폰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만든지 3년 동안 전혀 매출이 발생하지 않다가 1995년이 되어서야 팔리기 시작했다(p86)." 과연 우리 같으면, 근 10년을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할 이런 무모한 도전이 싹을 피울 수 있었을까요?
한국에서도 1960 ,70년대에 심각한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나서 혼식 장려라든가 술 제조 제한 등의 조치를 정부가 취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알아서 잡곡류가 웰빙 식문화를 이끄는 등 환경이 크게 변했지만 말입니다. 일본도 1차 대전 후 쌀 가격이 폭등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합성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치 요즘 유행하기 시작한 배양육하고도 비슷할 듯합니다. 일본은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대량으로 미곡을 수입(약탈)하여 오히려 가격 폭락 사태를 부릅니다.
일본의 이화학 연구소는 과학자의 낙원으로 불리며(p94), 이는 "연구 성과를 바로 산업화"하는 데에 탁월한 그들 특유의 기업 문화에 기인합니다. "출신 대학, 소속기관, 전공 등 영역의식은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었다(p95)." 우리 기업 문화하고는 너무도 차별화되는 풍토이며, 한국이 사실 가장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병폐를 극복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책은 앞에서 일본과 독일의 역사 발전상의 공통점을 짚었습니다만 과연 그래서인지 일본과 독일은 "가족 기업 성격, 장기근속 일반화, 종업원 중심 경영(p103)" 등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도 코스닥이나 코스피를 보면 강한 중소기업이, 그것도 소부장 섹터에서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입니다만 여전히 대기업 중심의 생태계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굴지의 대기업도 대기업이지만, 경제, 특히 제조업 섹터가 중소기업 위주로 돌아갑니다.
"히든 챔피언의 절반은 독일이다." 히든 챔피언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 책에서 자주 나오는 용어인 GNT, 즉 글로벌 니치 탑이겠습니다. p105에서 독일 자동차 기업은 다양한 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책 처음에서도 다루었듯 일본 역시 한우물만 파는 기업이 많죠. 물론 이런 장인 정신은 기술 우대 풍조, 기술의 심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겠으나, 급변하는 트렌드에 제때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한 예로 최근 현대차, LG, 삼성, SK 총수 들이 연쇄회동을 가지며 테슬라 주가의 미친 상승이 상징하는 자동차 산업의 완전 재편에 대응하는 제스처를 보였는데, 이런 건 우리 기업들이 재빠르게 현실에 대처하는 기민성의 징표입니다. 한우물만 판다고 능사는 아니죠. 어떤 애널리스트는 "현대차는 주가가 크게 오르지 않는다. 전기차를 만든다 해도 기존 내연기관차의 시장을 그대로 가져올 뿐이 아닌가?"라고 하던데, 독일이나 일본 메이커가 머뭇대는 사이 전기차, 수소차 시장 셰어를 재빨리 점유한다면 당연 시장 선점 아니겠습니까? 최근 상승하는 주가가 이를 증명하고 남습니다.
인쇄는 전통적인 산업 섹터로서, 선명하고 오래 색이 바래지 않는 인쇄는 그 완성도와 고급성을 상징할 만큼 중요한 척도입니다. 일본에서는 돗판과 다이니치 양대 기업이 있어 가히 "백년전쟁"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런 경쟁이 기술의 완성도와 장인 정신의 건설적 경쟁이란 점에서 타 산업 분야에까지 귀감을 이루는 것입니다.
모터는 자동차 등 수많은 장치와 기계에 핵심으로 쓰이는 심장과도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니혼덴산과 마부치모터가 오랜 세월 동안 겨뤄 왔으나 비교적 최근 니혼측이 새로 진입한 파워윈도 영역에서 특히 심한 격돌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 싸움에서 마부치 측이 의론의 여지가 없는 압승을 거뒀는데 그 비결을 여럿으로 책은 분석합니다. 우리도 매년 "표준품셈"이란 게 계산되어 서점에도 두꺼운책으로 출간됩니다만 마부치 측의 원가 절감 혁신이라는 게 실로 대단했나 봅니다. 마부치는 주문(개별) 생산에서 표준품 생산으로 전략을 바꾸었고, 이것이 연쇄적으로 원가 절감 효과를 낳았던 거죠.
우리 같으면 40년 적자 산업에 과연 투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가치 창출"은 어느 기업이나 쉽게 입에 올리는 구호입니다만 도레이는 말이 아닌 실천으로 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40년 적자 산업이란 바로 "탄소 섬유 개발"을 뜻하는데, 지금은 누구나 알듯 이 탄소섬유 분야가 산업의 전체 판도를 바꿀 만큼 중요해졌지만 198년대에 이런 혜안을 가졌다는 게 그저 놀랍습니다.
반도체는 굴지의 삼전이나 하이닉스뿐 아니라 한국에도 중소기업 중에 세계적 기술력을 자랑하는 곳이 제법 많습니다만 원조는 아무래도 일본이라 봐야겠죠. 반도체용 웨이퍼, 염화비닐 섹터에서 신에츠는 세계 1위이며(p196), 싷리콘, 포토레지스터는 3위라고 합니다. 물론 이제는 한국에서, 특히 포토레지스터 분야에서 세계 정상을 다투는 기업들이 있는데 작년 이후 촉발된 소부장 국산화의 효과입니다. 책에는 특히 PVC 분야에서 LG화학(얘도 이제는 한국에서 손꼽는 가치주가 되었죠. 불과 며칠 전 주가를 보십시오)과 비교하는데, 매출액은 60%이면서도 영업이익이 2배라고 합니다. 이게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저 앞에서도 원가 절감을 통해 경쟁사를 꺾어버린 강소기업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JIT와 칸반 시스템 이야기는 이미 1990년대부터 경영학 교과서에 나올 만큼 도요타의 혁신은 유명하고 모범적입니다. "재고는 절대악" 어떻습니까? 토요타의 혁신은 이미 남부럽지 않게 성과를 달성하던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자기 혁신을 도모한 결과이기에 더욱 대단합니다. 삼성에서 이건희 회장이 1990년대 중반 "불량품 화형식"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글로벌 대기업이 과연 있었겠습니까? 소부장에서는 특히나 혁신과 기술연구가 중요하며, 한국도 마냥 기업 적대적인 풍조를 키우거나 엘리트 교육 지양을 외칠 게 아니라, 오늘날 눈부신 발전을 이끈 인재와 기업이 과연 어디서 비롯했는지, 현실에 기반한 각성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