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나의 청춘 - 가장 위대한 영국인, 청년 처칠의 자서전
윈스턴 처칠 지음, 임종원 옮김 / 행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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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은 20세기 중반, 세계가 악마의 손에 넘어갈 뻔한 파멸적 순간에서 반인도주의 진영을 격파한 진정한 영웅입니다. 하지만 나면서부터 좌절과 실패 없는 평탄한 인생을 살아 왔는가 하면 그런 축복 받은 경로와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그는 신분 질서가 유독 까다롭게 지켜지는 영국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명문가문 태생이었지만 작위와 재산은 다른 형제에게 상당부분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쳐도 그는 귀족 가문 출신에게 보장되다시피한 다른 엘리트 인생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고 자신의 격정과 본능, 지혜가 이끄는 가장 험악한 선택만을 골라서 걸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진정 놀라운 점이며, 그랬기에 히틀러가 프랑스 영토 거의 3/5를 함락할 시점 영국 정부가 무조건 항복 안까지 검토할 절망적 시점에서 "단호한 항전"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본디 귀하게 자란 인생은 잔혹한 시련이 닥칠 시 일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나약한 선택을 하기 일쑤이며, 20세기 중반 영국은 그 정도로 낡고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이런 인물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유럽은 물론 세계 전체가 히틀러를 위인, 신인으로 숭배하는 체제 하에 살고 있었을 터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은 어찌해서 그런 그릇과 배포가 길러졌는지 그 젊은 시절을 중점으로 살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런 훌륭한 인물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누렸고, 그가 죽을 때까지 약 20년 동안 변하지 않고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다(p94)." 이 말은 그가 젊은 시절 군에서 모셨던 브라바존 대령을 두고 한 것입니다. 그 성씨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아일랜드계이며 책에는 "가난한 아일랜드 지주 출신"이란 말이 나옵니다. 지주가 "가난하다"는 건 형용모순일 수 있으나 저 무렵 아일랜드 지주들은 위에서는 잉글랜드의 압박을 받고, 아래로부터는 동족인 아일랜드 소작농들의 거센 반란에 직면하는 등 고충 끝에 신분이 몰락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는 시스템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직분에 충실한 장교였으며,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로서 젊은 윈스턴의 인성을 형성하는 데 한몫을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 , 그리고 얼스터 문제조차도 우리의 우정을 갈라 놓지 못했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적어도 북아일랜드 이슈만큼에서는 윈스턴과 대령의 의견이 매우 크게 갈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건 민족 간의 원한에 엮인 거라 그리 작은 대립도 아닐 텐데, 성숙한 인격체들은 언제나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빌미를 사전에 피합니다.

제국주의 영국은 히틀러의 도발을 트리거 삼아 전후 거의 한순간에 해체되다시피했습니다. 이에는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이 식민 각국에 민족주의 이념을 전파한 공도 있을 테며, 애초부터 대영 제국 내부의 모순, 즉 넓은 해외에 분산된 광대한 영토를 해군력 하나만으로 관리하기가 어려웠다는 근원적 이유를 도외시하기 어렵습니다. 영국의 하층민, 서민 출신들은 처음부터 군에 입대하여 병으로서 식민지에서 복무함으로써 출세를 도모했고, 윈스턴처럼 터프하게 경력을 가꿔 나가려는 인물들은 장교나, 혹 그게 안 되면 종군기자로서 현장 경험을 쌓으려 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의 선택은 좀 유별난 편이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크리켓이나 폴로 경기가 큰 인기를 끄는데, p194에는 더럼 경보병 연대 팀의 무적 기록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럼 식민지 출신 팀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비실비실한 상대이기만 했냐면 그렇지 않아서, 같은 페이지에는 "마하라자의 자존심도 가볍게 쓸려나갔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실 북서부 인도, 현재의 파키스탄 접경 지역 주민들은 오랜 동안 인도 전역을 통치해 온 무사 출신의 후예들이거나 그들과 불굴의 라이벌 관계를 이뤄 온 종족들입니다. 체격도 정신적 무장도 세계 어느 종족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강건한 이들이죠. 아무리 통치국이라고는 하나 식민지를 지배한다는 게 얼마나 터프한 일인지 짐작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폴로 이야기는 이 책 곳곳에 등장하는데 p150, p254 같은 대목도 재미있게 읽어 볼 만합니다.

빈돈 블러드 경(p163) 같은 매우 특이한 캐릭터도 젋은 처칠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무려 찰스 2세 시절(그러니 이 시절 윈스턴보다 230년 전 사람) 왕실의 보물을 훔치려 한 블러드 대령의 후손이라는 점을 크게 자랑스러워 했다니... 그런데 이 부분 행간을 잘 읽어 보면, 당시 각종 부채 때문에 재산이 저당잡혀 있던 찰스 2세가 고의로 절도를 사주했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기 물건에 대한 절도의 교사범이 찰스 2세였던 셈이죠. 여튼 이런 캐릭터의 범상치 않은 과거사가, 심지어 파슈툰 족의 공감도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윈스턴의 해석이 재미있습니다.

"나는 영국에서 일어난 혁명이, 프랑스 혁명보다 더 심각하고 더 처절했음을 목격했습니다. 지배층은 정치적 기득권을 모두 빼앗겼으며, 재산과 토지도 잃었습니다... (p116)" 우리는 흔히 영국식 계급구조가 불변의 공고함을 지니는, 세계 역사상 가장 보수적인 것으로 오해합니다만 보는 시각에 따라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는 걸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처칠은 이 의견에 동조했다는 것이며, 이 말을 한 사람은 폴 캉봉 프랑스 대사였습니다. 어쩌면 이 말이, 존 F 케네디가 자신의 졸업 논문으로 제출한 <Why England slept>의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영국은 묻는다
위기가 임박하면
인도의 아들은 죽기살기로 싸울 것인가?

바다 건너 위대한 백인의 어머니여
영원히 제국을 통치하고
오랫동안 다스리고
영광과 자유가 위대한 백인의 조국에 있다"(p158)

지금 시각으로 약간 역겨울 수 있지만 식민지에 주둔하던 어떤 연대의 군가 가사라고 합니다. 연대에는 물론 인도 현지에서 징병된 병사, 부사관들도 많고, 이들 중 상당수는 제국주의의 질서에 순치된 이들이라 이런 가사가 매우 자연스럽게 입에서 불려지는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후 1차 대전 당시,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조차 영국군에 협력하고, 그 대가로 종전 후 독립을 보장받자는 움직임이 컸으며, 놀랍게도 간디 역시 여기에 가담, 주도하는 처지였습니다. 무작정 선과 악, 흑과 백으로 나눠서 볼 게 아니라 이런 시대상도 정확히 알고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 영국은 이후 그 약속을 아주 뻔뻔스럽게 위반했죠.

처칠은 원래 자유당 소속이었다가 뒤에 당적을 옮겨 보수당원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도 당시에는 말이 많았는데 처칠은 위트 있게 이런 공격을 받아넘긴 일화도 유명하죠. p269에는 제임스 모들리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살아온 경력을 보면 처칠 같은 이와는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 게 분명한데도 노동당은커녕 자유당도 아닌 보수당 출신입니다. 한편으로, 19세기 초 극심했던 노동 착취상과 달리, 이 무렵이면 노동자 계급 출신 중에서도 자주성가한 사람이 많이 나온다는 뜻도 되며, 그런 현상을 보고 처칠 같은 귀족 출신이 (혹시 저들이 우리를 앞지를지 모른다는 속 좁은 조바심이 아니라) 국가가 제대로 되어 간다는 안도의 생각을 품는다는 게 이 책에도 잘 나옵니다. 그게 맞죠. 백성이 가난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니 귀족인들 무사하겠습니까? 같은 시대 러시아를 보면 무슨 꼴이 나는지 알 수 있죠. 한편으로 재미있는 말도 많이 나오는데, 밸푸어 하원의장(우리가 아는 그 사람입니다)이 젊은 윈스턴을 두고 "약속된 청년(promised, 즉 전도양양한)인 줄 알았더니 약속만 하는 청년이었군(즉 자기 말을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거나, 4대째 들어 다시 나막신(가난한 계층이 잠시 출세하는 듯하다가 도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풍자를 담은 속담)" 같은 게 있습니다. 이 시절의 회고에서 나중에, 처칠 앞 임기에 나치 상대로 유화정책을 편 체임벌린 같은 이도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인생의 가장 낮은 단계로 타락할 때 "막장"이란 단어를 쓰는데, 이게 탄광업 용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물론 한국도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해당 업종에 종사하는 어려운 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된 직업인데 왜 근래들어서 이 말이 유행하는지는 알 수 없죠. 여튼 젊은 윈스턴은 남아프리카 식민지까지 그 부지런하고 모험심 가득한 발을 뻗어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고 막장 체험을 하는 등 태생이 고귀한 부잣집 도련님으로서 상상도 못할 고생을 합니다. 이래서 옛 사람들 말이, "귀한 자식일수록 험하게 키우라"고 했나 봅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전도서 4:31, 이 책 p363에서 재인용)

자, 이렇게 험한 고생을 겪었으며 그 와중에서 세상을 보는 지혜를 많이도 쌓은 젊은 윈스턴은, 일인지하 만인지상, 영국 여왕 한 사람만을 그 머리 위에 둔 수상 직위를 노년에 두 차례나 지냅니다. 왕은 아니어도 왕 다음 가는 높은 사람이었던 그도, 말년에 젊은이들이 이런저런 도전을 해 오면 무척 성을 낸다거나 괴팍한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그가 조금만 더 여유를 가졌으면, 이처럼이나 반항기 넘치고 모험심 가득하며 기성 체제에 대한 회의와 도전을 삼가지 않았던 자신의 젊은 날을 봐서라도 더 위트 있게 대했을 만도 한데요.

거의 정확히 이 책이 다룬 시기를 영상으로 옮긴 작품으로는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간디>를 연출한 그 사람입니다)이 1972년에 찍은 <영 윈스턴>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단 이 책과는 별개의, 윈스턴처칠이 쓴 다른 회고록에 바탕을 두었죠. 또 윈스턴 처칠의 2차 대전 후 은퇴 시기를 다룬 책으로는 좀 램스덴이 쓴 <Man of the century>가 있으며, 을유문화사에서 이종인 씨가 옮긴 번역본으로 나와 있으니 이 멋진 책의 후편 읽는다 셈 치고 참조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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